[스크랩] 걷는 독서 / 한이나 걷는 독서 한이나 바람이 부드러운 해거름 무렵 나는 걷는 독서를 한다 히잡을 쓴 열다섯 살 소녀 누비아가 되어 당나귀에게 풀을 먹이며 밀밭 사이로 얇고 깊게 스며든다 낭송하는 소리들이 경치를 이룬다 흙의 향기와 밀의 수런거림과 새의 지저귐이 책에서 줄맞춰 뛰어 나온다 하루의.. 좋은시 2019.01.19
[스크랩] 아내의 이름은 천리향 / 손택수 아내의 이름은 천리향 손택수 세상에 천리향이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곳에 천리나 먼 거리가 있다는 거지 한 지붕 한 이불 덮고 사는 아내와 나 사이에도 천리는 있어, 등을 돌리고 잠든 아내의 고단한 숨소리를 듣는 밤 방구석에 처박혀 핀 천리향아 네가 서러운 것은 진하디진한 향기.. 좋은시 2019.01.19
[스크랩]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속도에 대한 명상 13 반칠환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 좋은시 2019.01.19
[스크랩] 떨어진 별처럼 / 김혜순 떨어진 별처럼 김혜순 나는 아주 많아요, 별처럼 나는 아주 꺼끌꺼끌 해요, 별처럼 나는 아주 속이 뜨거워요, 별처럼 나는 아주 무서운 내부를 가졌어요, 별처럼 나는 가까이서 보면 무겁고 멀리서 아주 멀리서 보면 빛나요, 별처럼 어렸을 적에 우리 엄마가 우리 집 점원더러 아픈 나를 .. 좋은시 2019.01.19
[스크랩] 오늘 / 오현정 오늘 오현정 지금이 가장 좋은 때 첫 해산 후 숲길 걷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 이제까지의 부끄러움 다 가려주는 활엽수가 친구하자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 오후의 햇살이 지혜를 찾아다니는 詩人 지금 이 순간이 고통의 詩를 빚는 행복한 시간 먼 길 돌아 다시 출발점.. 좋은시 2019.01.19
[스크랩] 왼쪽 바짓가랑이가 자주 젖는다 / 공광규 왼쪽 바짓가랑이가 자주 젖는다 공광규 소변보고 오줌을 털면 왼쪽 바짓가랑이가 자주 젓는다 왜 항상 왼쪽이지? 의식하고 털어도 왼쪽 가랑이가 젓는다 군대 가기 전 두 친구와 방안에 나란히 누워 돌팔이 의무병 출신 직장 선배한테 포경수술을 받을 때 표피가 잘못 잘린 탓이다 술집.. 좋은시 2019.01.19
[스크랩] 지하의 문사 / 조옥엽 지하의 문사文士 조옥엽 두 눈 감는 그 순간까지 캄캄한 땅 속, 제가 만든 감옥에서 퇴고를 거듭하다 끝내 거꾸러지고 마는 천형이라 하기엔 너무도 가혹한 형벌 그러나 잠시도 굴하지 않고 약진에 약진을 거듭해야 직성 풀리는 끈질긴 성미는 대대손손 이어온 가문의 오랜 .. 좋은시 2019.01.19
[스크랩] 스마트폰 / 김기택 스마트폰 김기택 눈알이 스마트폰에 달라붙어 있다. 떨어지지 않는다. 얼굴을 옆으로 돌릴 수가 없다. 스마트폰에 붙들려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머리를 억지로 잡아당겨 화면에서 떼어내고 싶지만 두 눈알은 스마트폰에 남고 눈구덩이가 뻥 뚫린 머리통만 떨어져 나올 것 같아 엄.. 좋은시 2019.01.19
[스크랩] 싸늘한 응시 / 박종해 싸늘한 응시 박종해 푸른 실핏줄이 엉킨 철책을 감고 온몸이 신열로 달아오른 장미가 똬리치고 있다 서화담을 찾아간 황진이의 어깨가 처져있다 뜨거운 입김도 싸늘한 의지에 닿으면 농염한 육신과 함께 흐물흐물 삭이어 내리는 것일까 황금빛 관능으로도 녹일 수 없는 아득한 현기증 .. 좋은시 2019.01.19
[스크랩] 리라 / 손택수 리라 손택수 리라 있지? 고대엔 리라 현을 양의 내장으로 만들었대 내장을 재로 씻어서는 갈기갈기 찢었지 하필 재였을까 잿더미였을까 멀리 독일까지 가서 고고학 공부를 하는 허수경 시인에게 들었다 왜 고국을 떠났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담담하게 시 때문이라고 했다 독하구나, 모국.. 좋은시 2019.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