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아내의 이름은 천리향 / 손택수

문근영 2019. 1. 19. 08:50

아내의 이름은 천리향

 

손택수

 

 

세상에 천리향이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곳에 천리나 먼

거리가 있다는 거지

한 지붕 한 이불 덮고 사는

아내와 나 사이에도

천리는 있어,

등을 돌리고 잠든 아내의

고단한 숨소리를 듣는 밤

방구석에 처박혀 핀 천리향아

네가 서러운 것은

진하디진한 향기만큼 

아득한 거리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지

얼마나 아득했으면

이토록 진한 향기를 가졌겠는가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것은

살을 부비면서도 

건너갈 수 없는 거리가

어디나 있다는 거지

허나 네가 갸륵한 것은

연애 적부터 궁지에 몰리면 하던 버릇

내 숱한 거짓말에 짐짓 손가락을 걸며

겨울을 건너가는 아내 때문이지

등을 맞댄 천리 너머

꽃망울 터지는 소리를 엿듣는 밤

너 서럽고 갸륵한 천리향아

 

- 손택수 시집, 『목련전차』에서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