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옛 선비들의 여름나기 / 신병주

문근영 2018. 11. 21. 07:45

제145호 (2009.7.22)


옛 선비들의 여름나기


신 병 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푹푹 찌는 한낮의 무더위 속에서도 갓을 쓰고 도포를 차려 입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모습을 연상하노라면 답답함이 먼저 와 닿는다. 체면상 옷을 벗고 돌아다닐 수도 없고, 농민이나 노비처럼 시냇물에 풍덩하기도 쉽지 않다. 부채를 부치면서 책을 읽으며 더위를 피해 보려 하지만 이 역시 만만치가 않다. 한여름의 무더위는 조선의 선비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들은 과연 어떻게 더운 여름을 이겨 나갈 수 있었을까?


 한강의 얼음으로 더위를 녹이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었다 뿐이지 선비들의 여름나기는 기본적으로 우리네의 여름나기와 비슷했다. 간편한 복장, 부채질하기, 등목 하기, 서늘한 나무 그늘에서 쉬기 등등. 일부 잘 나가는 양반들은 귀하다는 한강의 얼음까지 맛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겨울철 한강의 얼음을 떠서 동빙고와 서빙고에 보관하였다. 동빙고는 한강변 두뭇개,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고, 서빙고는 지금의 서빙고동 둔지산(屯智山) 기슭에 있었다. 19세기 서울의 관청, 궁궐 풍속 등을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궐외각사(闕外各司) 조항에는 ‘빙고(氷庫)’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동빙고가 두뭇개에 있다. 제사에 쓰는 얼음을 바친다. 서빙고는 둔지산에 있다. 궁 안에서 쓰이고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할 얼음을 공급한다. 이들 빙고는 개국 초부터 설치되어 얼음을 보관하고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동빙고에 옥호루(玉壺樓)가 있는데 경치가 뛰어나다.”


 동빙고의 얼음은 주로 제사용으로 쓰고, 서빙고의 얼음은 한여름인 음력 5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 종친과 고위 관료, 퇴직 관리, 활인서의 병자, 의금부의 죄수들에게 까지 나누어 주었다. 얼음은 네 치 두께로 얼은 후에야 얼음을 뜨기 시작하였다. 이에 앞서 난지도 등지에서 갈대를 가져다가 빙고의 사방을 덮고 둘러쳤는데 냉장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얼음을 뜰 때에는 칡으로 꼰 새끼줄을 얼음 위에 깔아 놓고 사람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였다고 한다. 얼음을 뜨고 저장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세종실록』에는 장빙군(藏氷裙)에게 술 830병, 어물 1,650마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타나 얼음을 저장하는 사람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얼음을 빙고에서 처음 꺼내는 음력 2월 춘분에는 개빙제(開氷祭)를 열었다. 얼음은 3월 초부터 출하하기 시작하여 10월 상강(霜降) 때 그 해의 공급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겨울에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이 얼지 않으면 사한단(司寒壇)에서 추위를 기원하는 기한제(祈寒祭)를 올렸다. 영조 때에는 기한 제 이후에 얼음이 꽁꽁 얼자 제관(祭官)들에게 상을 내렸다.


산행을 통한 여름 나기


 또 하나의 더위 극복 이벤트는 바로 산행이었다. 여름철 선비들은 더위를 피해 산수가 아름다운 인근의 산으로 장기간의 산행을 떠났다. 더위도 피하고 스승과 제자들이 회합하면서 학문과 현실을 토론하는 시간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산행에서 느낀 감흥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담아 기행문으로 남겼다. 선비들이 즐겨 찾았던 산은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 지리산, 오대산, 묘향산, 속리산, 가야산 등 예나 지금이나 명성이 높은 산들이었다.


 1558년 첫 여름 조식(1501~1572)은 제자들 일행과 함께 지리산 여행을 떠났다. 여름의 더위를 피해보고자 그의 제자들이 선생이 공부하고 있던 지리산 근처에 모여 단체 산행을 한 것이다. 칼국수, 단술, 생선회, 찹쌀떡, 기름떡과 같은 음식과 소합원, 청양유 같은 비상 구급약도 준비하였다. 조식은 산을 오르는 데만 만족하지 않았다. 지리산 곳곳의 유적들을 보고 역사 속 인물들을 떠올렸고, 세금이 무거워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현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지리산 산행은 선비로서의 위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재충전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기행문의 말미에서 조식은 지리산 산행을 떠난 것이 11번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만큼 지리산은 한 여름의 피서처로, 제자들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공간이었다. 


 조식의 「두류산(:지리산)유람록」을 비롯하여, 남효온의 「금강산유람기」, 김창흡의 「오대산기행」, 채제공의 「관악산유람기」 등 산행의 감흥을 기록한 선비들의 기행문은 문집 속의 기록으로 남았고, 현재는 번역까지 되어 있다.


 부채의 즐거움


 조선시대 풍속화에도 일부 나오지만, 최근까지도 더위를 쫓는 일등공신은 부채였다. 휴대하기에 편리함과 더불어 선비들에게는 체면치레용으로 부녀자에게는 장식품으로 부채는 활용되었다. 19세기의 학자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라는 책에는 황해도 재령 등지에서 생산되는 풀잎으로 엮어 만든 부채인 팔덕선(八德扇)의 이야기가 나온다. 팔덕이란 바람 맑은 덕, 습기를 제거하는 덕, 깔고 자는 덕, 값이 산 덕, 짜기 쉬운 덕, 비를 피하는 덕, 햇볕을 가리는 덕, 독을 덮는 덕 등 8가지로 부채의 실용성을 압축적이고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우리 속담에 ‘단오 선물은 부채요 동지 선물은 책력(冊曆)’이라는 말이 있다. 음력 단오는 곧 여름이 시작됨을 의미하고 더위에 대비하여 부채를 준비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조선 말기까지는 공조에서 해마다 단오 부채를 만들어 왕에게 올렸고, 왕은 다시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다. 각 지방에서도 그곳 특산품으로서 부채를 궁중에 진상하였고, 관리나 친지들에게 선물하였다.


 부채에서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은 부채의 그림이다. 조선후기 서울의 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識)』에는 ‘단오에 부채를 서울 관원에게 나누어주는데, 부채 면에 새나 짐승의 그림을 그렸다’고 하여 부채에 그림 그리는 풍습은 오래도록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부채에 이름 있는 화가들의 그림이나 명필가의 글씨를 받는 풍습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부채 중에는 김홍도의 「서원아집」, 정선의 「정양사」, 최북의 「설경산수도」 등 명화(名畵)들이 많다. 부채는 여름에 주로 사용되었으나, 숯불을 피울 때나 다리미질을 할 때 등 일상생활에 자주 활용되었다. 양반이나 부녀자가 체면용이나 얼굴을 가릴 때 쓰는 경우도 흔하였다. 부채는 더위를 쫓는 가장 간단한 휴대품이자 각 방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실용품이었던 것이다.


 올 여름 옛 선비들의 풍류가 묻어나는 부채를 들고서, 명산대천을 유람해 볼 것을 권한다. 국토와 산천의 아름다움, 그리고 역사를 노래한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명산의 기억들을 정리한 기행문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옛 선비들의 기상까지 이어받는다면 금상첨화이고.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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