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77

2022년 경상일보 동시 부문 당선작-비행운 - 조현미

비행운 - 조현미 비행기가 지나간다 높푸른 하늘에 밑줄 좍 ── 그으며 멀리멀리 날아간다 고추 따던 식구들도 비행기를 따라간다 할머니는 제주도 고모 집으로 외숙모는 바다 건너 베트남으로 내 마음은 말레이시아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간다 비행기는 매일매일 바다를 건너는데 높고 넓은 하늘길을 쉬지 않고 나는데 코로나 19가 바닷길을 막았다 하늘길을 막았다 식구들 마음처럼 고추는 붉게 익고 외숙모 목은 한 뼘 더 길어졌다 혼자서만 가는 게 미안했는지 비행기도 …… 말 줄임표를 남긴다 잘 지내시나요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식구들 마음에 밑줄 쫙 ── 긋고 간다 ▲ 조현미 ■당선소감-조현미 / 빛의 이면, 그림자의 나날 잊지 않겠다 동심과 시심 사이에서 오래 서성거렸다. 막막했고 자주 길을 잃곤 했다. 내 안의 작은..

2022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가루약 눈사람'

가루약 눈사람-전율리숲 감기는 다 나았니 나는 녹지 않았어 발자국도 나지 않았어 아직 다정한 어른은 되지 못했지만 가끔은 아빠처럼 우체국 커다란 창문 앞에서 잠자고 엄마처럼 기념품 가게에서 일해 너의 청록색 엄지장갑을 심장 자리에 넣어두는 걸 깜빡했는데도, 오늘은 춥지 않더라 무려 스무 날 전 네가 내 볼에 붙여주었던

2021년 조선일보 동시 당선작 엄마의 꽃밭- 김광희

엄마의 꽃밭- 김광희 종일 튀김솥 앞에 서서 오징어 감자 튀기는 엄마 밤늦게 팔에다 생감자 발라요. 그거 왜 발라? 예뻐지려고 웃으며 돌아앉아요. 얼마나 예뻐졌을까 곤히 잠든 엄마 팔 걷어 봐요. 양팔에 피어 있는 크고 작은 꽃들 튀김기름 튄 자리마다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동생과 나를 키운 엄마의 꽃밭 팔뚝에 가만히 얼굴을 묻으면 아릿한 꽃향기에 눈이 촉촉해져요.

2021한국일보 신춘문예동시당선작 검은 고양이-최영동

검은 고양이-최영동 전봇대 밑을 두리번거리는 그림자 그 속에서 발톱이 솟아올랐다 날카롭게 가다듬은 발톱에 아무것도 걸려들지 않아 등뼈는 어제보다 하늘로 솟구치고 뱃가죽은 전단지처럼 펄럭거리네 사방에 참치 캔이 구르고 살코기가 있던 자리 혓바닥보다 콧잔등이 먼저 파고들었어 살코기 한 점 남아있지 않은 오늘 저녁 지붕 너머로 번쩍 저녁을 낚아채려는 고양이의 앞발 솟아오르는 발톱에 걸려드는 생선 꼬리 같은 골목의 불빛들

[2021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별들이 깜빡이는 이유 - 동시 박미영

별들이 깜빡이는 이유 - 박미영 하늘 배터리가 얼마 안 남았다, 오버! 노을이 빨갛게 위험 신호를 보낸다. 저녁은 절전 모드로 진행 중 배경부터 어두컴컴하게 밝기 조절 완료 바람과 구름도 잠시 멈춤 완료 새들도 가만히 대기 모드 완료 하나둘셋넷, 둘둘셋넷…… 드디어 나타났다, 오버! 별들이 깜박깜박 하늘을 충전시키고 있다.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아버지 구두-김사라

아버지 구두-김사라 새벽녘 아버지 구두가 집을 나선다 내가 잠들었을 때 나가서 잠들기 직전에야 돌아오는 구두 어떨 때는 내가 잠들고 나서 꿈속에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돌짝길 걷다 다쳤을까 옆구리가 조금 찢긴 구두 밑창은 할머니 무릎뼈처럼 닳았다 아버지 구두의 원래 꿈은 무엇이었을까 제 빛깔을 잃고 흙먼지를 뒤집어 쓴 아버지 구두를 오늘은 꼭 수술대 위에 눕힌다 구두의사 면허증이 없지만 첫 수술하는 의사의 마음으로 구두를 안았다 구둣솔로 아버지 삶에 떨어진 먼지를 턴다 우리집 앞마당까지 놀러오는 비둘기가 모이를 콕콕 찍어 먹듯 솔에 콕콕 바른 구두약으로 긴급 처방을 내린다 이제 기름칠만하면 잘 나가는 내 새 자전거처럼 아버지 구두도 막힘없이 걸어 나가겠지 아버지 삶에 윤기를 내기 위해 아버지 나이만큼 주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