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나이는 세어 무엇하리 / 김정남

문근영 2018. 11. 9.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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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세어 무엇하리


                                                                           김 정 남(언론인)

얼마 전에 지리산을 다녀왔다. 금방 갔다 왔어도 지리산은 또 가고 싶어지는 산이다. 가서 파묻히다 오고 싶은 산이다. 지리산은 가기 전에는 설레고, 가면 그 속에 파묻히고 싶고, 다녀오면 힘들었지만 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산이다.

내가 지리산을 찾는 것은 이인노(李仁老)처럼 이상향이라는 청학동을 찾아서가 아니요, 무릉이 예라고 읊었던 남명(南冥)의 풍류를 흉내내기 위함도 아니다. 망해가는 세상에서 글 읽는 사람 되기 어렵다던 황매천(黃梅泉)을 흠모해서도 아니다.

신록의 계절이 오면 지리산 산행에

다만 나는 가끔 세상의 잡답(雜沓)을 떠나고 싶다. 사람을 떠나 사람의 일을 잊고 싶다. 그러나 그러기가 어디 쉬운가. 또 그럴 만한 곳이 마땅치도 않다. 있다면 바다건너 외딴섬이나 지리산 정도가 고작이 아닐까 싶다. 3개 도(道) 5개 군(郡), 15개 면(面)에 걸쳐 있는 산의 덩치가 2-3일 사람을 품어줄 만한 산이다.

더구나 지금은 신록이 짙어가는 계절임에랴. 풀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한 가지로 숨쉬고, 노래하고 싶은 계절이다. 전후좌우 안전(眼前)이 온통 신록뿐인 속에서 나는 무념무상, 무장무애, 더 없는 유열과 평화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한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여행이 내게는 지리산 종주다.

나는 해마다 신록의 계절이 오면 지리산 종주산행에 따라 나서곤 한다. 두 해 전에는 연하천에서 폭우를 만나 종주를 단념해야 했고, 지난해에는 무슨 일이 있어 그 기회를 놓쳤다. 노고단 산장에서 1박을 하고 새벽에 출발하여 세석산장에서 자고 천왕봉을 거쳐 내려오는 2박3일의 종주산행은 내게 언제나 벅차다.

노고단 산장에서 나는 그 옛적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咸泰式)이 유배지와도 같은 피아골 산장에서 내려와 연곡사 부근,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주선해 준 집에 짐을 풀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젊은 날, 지리산에 들어와 산을 지켰고, 죽는 날까지 지리산에서 살고 싶어 했던 그의 하산(下山)을 축하해 주어야 할 일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다.

예전에 우리는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의 능선길이 45km, 1백리 산길로 알고 다녔다. 종주 능선 백리길은 언제나 우리를 뿌듯하게 했다. 공단이 들어서고 난 뒤, 그 길이 36km, 29km로 점점 줄더니 지금은 25.5km가 되었다. 그 동안 길을 새로 내거나, 지름길을 다듬어 실측한 수치라 하니 믿을 수밖에 없지만, 어쩐지 20여km를 빼앗긴 느낌이다.

종주길은 언제나 쫓기듯이 바쁘다. 반야봉을 뻔히 쳐다보면서도 거기 올라가 볼 새가 없다. 반야봉 아래 있다는 암자, 묘향대에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도 여태 가보지 못했다. ‘반야봉의 낙조’, ‘벽소령의 달’ 같은 낭만도 즐길 여유가 없다. 운때가 맞아서 ‘노고단의 운해’를 볼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세석 철쭉’은 옛날의 장관을 잃은지 오래다.

지리산 봉우리와 골짜기 마다 그 붙여진 이름이야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지만, 나는 연하(煙霞)라는 이름을 그 중 좋아한다. 연하천과 연하봉이 있는데, 연하천이라는 이름이 생긴 내력은 들어보지 못했다. 거기는 샘물이 있는 습지로 산안개가 깊은 곳이기에 붙여졌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연하봉이라는 이름은 70년대 초반 구례산악회 연하반에서 지리산 능선길을 개척할 때, 이 지역에 이르자 갑자기 농무가 끼어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는데, 이튿날 안개가 걷히고 난 뒤 얼굴을 드러낸 아름다운 봉우리를 보고 연하봉이라 이름붙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천왕봉에 올라 사진을 찍다

천왕봉은 멀리서 볼 때면 언제나 신비롭다. 그곳에 이르면 거기까지 올라온 내가 대견스럽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기분도 조금은 든다. 본시 사진찍기를 즐겨하지 않지만 몇 년 만인데다, 내 생전에 몇 번이나 더 올라올 수 있을까 싶어 독사진으로 찍었다.

봄·여름·가을·겨울, 그 어느 때인들 좋지 않은 산행이 있을까마는, 내게는 신록 속의 지리산 산행이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신록 속의 지리산을 바라보면 피천득의 ‘5월’이 생각난다. 거기에 빗대서 나는 이렇게 곳으로 외치는 것이다.

“신록 속의 지리산을 걸으면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지리산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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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정남
· 언론인
· 前 평화신문 편집국장
· 前 민주일보 논설위원
· 前 대통령비서실 교문사회수석비서관
· 저서 :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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