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辛卯)년이라는 명확한 기록이 있으니 1831년이 분명하고, 10월 16일이라는 날짜의 표시가 있으니, 초겨울의 중순 때임도 확실합니다. 1818년 9월에 57세의 나이로 귀양이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 그런 무렵이면 한창 학문적 저술들을 마무리하고 한가롭게 시를 짓고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으며 즐거운 생활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날 당대의 귀공자 해거재 홍현주(海居齋 洪顯周 : 1793-1865)가 서울에서 시골의 다산을 방문했습니다. 홍현주가 누구인가요. 다산을 그렇게도 아끼고 인정해주었던 정조대왕의 외동딸 숙선옹주의 남편, 영명위(永明尉)가 바로 그였습니다. 그 무렵 39세의 왕성한 임금의 사위가 70세의 노학자 다산의 명성을 듣고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연천 홍석주(뒷날 좌의정에 오름), 항해 홍길주(평강현감 역임)의 아우인 해거도위,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의 손자들인 3형제는 문장과 학문으로 세상을 울리던 노론 대가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 귀공자가 시골에 은거하던 다산을 방문했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다산은 복권도 되지 않았고 당파로서도 노론과는 크게 대립되던 남인의 가계가 아니던가요. 그러나 해거도위 일행은 다산을 찾아와 시를 짓고 학문을 물었습니다. 그 다음날 그들은 수종사로 등산을 갔으나, 몸이 노쇠한 다산은 오를 수가 없어 집에서 시나 짓고 있었습니다.
운길산의 수종사 옛날엔 우리 집 정원 水鍾山昔作吾園 마음만 내키면 훌쩍 가서 절문에 이르렀네 意到翩然卽寺門 이제 보니 갑자기 높아 죽순처럼 뾰족하니 今視忽如抽竹筍 하늘 높이 치솟아 모연하여 붙들기 어렵네.
젊은 사람들 모두 수종사에 오르고 늙은 노인은 산에도 오르지 못하고 밤에 잠은 오지 않으니 할 일 없이 지어낸 10편의 시의 한 편입니다. 집에서 가까운 운길산의 수종사, 어린 시절부터 젊은 날에는 수시로 오르고 찾아갔던 곳, 그렇게 가깝고 높지 않았는데, 그림에 떡처럼 바라만 보고 있으니, 왜 그렇게 높고 가파른 산이 되었느냐는 구절에는 늙어버린 다산의 처량한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글 잘하고 뛰어난 용모, 당대의 귀인이던 홍현주와 함께 오르지 못한 산이 너무 그리워 지은 시 같습니다.
이 무렵의 뛰어난 다산의 서정시들은 정말로 맑고 깨끗하며, 안온한 마음이 들어 있어, 그의 인품과 인격이 고스란히 모아져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생애의 끝자락에 찾아주던 임금의 사위, 다산에게 얼마나 기뻐할 손님이었겠습니까. 잊혀질 인물이건만, 반대로 학문이 익고 인격이 높아지던 이유로 다산에게는 방문객이 늘어나기만 했으니 인격의 향기는 감춰지지 않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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