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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언책(言責)보다 어려운 건 없다 / 민병욱

문근영 2018. 11. 11.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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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책(言責)보다 어려운 건 없다


                                                     민 병 욱(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최종 관문이었다는 ‘책문’(策問)을 읽고 무릎을 쳤다. 출제문과 답안이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엄격한 왕정국가, 임금의 한마디에 생사가 걸렸을 그 시대에 응시자들은 거침없이 왕의 폐부를 찌르는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의 심기를 이렇게까지 건드리고도 무사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진사시나 생원시에 합격한 33명이 전시(殿試)에서 마지막으로 치른 시험이 책문이었다. 출제자인 임금이 정치현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응시자들의 대책을 묻는 형식이었다. 이미 급제한 사람들만 보는 시험인 만큼 낙방은 없고 순위에 따라 최고위 관리, 즉 왕의 정치적 파트너가 될 수 있는지를 가늠했다고 한다. 아주 현실적인 인재등용 방식이었던 셈이다. (김 태완 편저. ‘책문-시대의 물음에 답하다’ ·소나무 출판사)

“인재를 불러들여 나랏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

광해군 때 이런 문제가 나왔다. “내가 나라의 대업을 이어받긴 했지만 나는 지혜도 모자라고 현명하지도 않다. 깊은 못과 살얼음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갈 방법을 모르듯,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인재를 불러들여 나랏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선비들은 의견이 달라 서로의 차이를 조정할 길이 없고, 서로 마음을 다해 공경하고 화합을 이루려는 미덕도 찾아볼 수가 없다. 도대체 어찌 해야 되겠는가?”

이에 임숙영은 이런 글을 써 올렸다. “어진 신하만이 바르게 간언할 수 있고 현명한 임금만이 간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 임금의 허물을 바로 잡으려다 도리어 임금에게 죄를 받고, 이 때문에 위로 조정에서부터 아래로 초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말하는 것을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바른말을 할까 경계하고 형은 아우가 직언을 할까 경계합니다. 저마다 이 시대의 금기가 된 직간을 피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잘 보이고 아부하는 것이 풍조가 되고 부드럽게 꾸미는 것이 절개와 지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모두 전하께서 열어놓은 것입니다.”

대담하다. 왕이 직접 읽어볼 글을 이렇게 쓰는 배짱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신하의 직책 중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해 충고하는 언책(言責)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며 외척의 교만과 횡포를 제재하고 궁녀들의 규정을 벗어난 인사개입을 금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끝내 “임금의 잘못이 곧 국가의 병”이라면서 “전하는 자만을 심각하게 경계하십시오. 자만하면 뜻이 날로 교만해지고, 마음이 날로 게을러지며, 덕이 나날이 깎이고, 공이 나날이 무너집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아무리 전하의 덕을 칭송하더라도 전하께서는 믿지 마십시오”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어진 신하만이 직언하고, 현명한 임금만이 받아들이고”

역시 광해군 때의 조위한도 “임금님 신상에 관한 말을 하면 곧바로 배척당하고 궁궐에 관련된 말을 하면 지방관으로 보직이 바뀐다”면서 “이게 전하께서 간언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겉만 번지르르한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꼬집었다. 심지어 세종 때의 이석형도 “거리낌 없이 자기 의견을 내기는 어려워지고 (임금의) 마음에 드는 계책만 진술하려는 생각에 점차 익숙해져 아첨하는 말만 나날이 늘어간다”고 경계했다. 신숙주도 “절실한 말을 두려워하고 강직한 말을 싫어한다면 그게 어찌 거리낌 없이 언로를 연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고 왕에게 묻고 있다.

위아래 소통이 바르고 원활해야 바른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상인까지 말길이 트이고’ ‘깃털처럼 보잘것없는 의견에도 귀 기울여야’ 정치의 도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소통의 정치가 화두가 되고 있다. 거기에 시국선언은 매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고루한 옛날이야기라고 치부하지 말고 모두 한번쯤 책문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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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민병욱
·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 전(前) 동아일보 정치부장 논설위원 출판국장
· 저서: <들꽃길 달빛에 젖어>(나남출판, 2003)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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