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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남한산성, 기억의 방식 / 심경호

문근영 2018. 11. 5. 01:19

제142호 (2009.6.17)


남한산성, 기억의 방식


심 경 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1.


이덕무는 남유두(南有斗), 이광석(李光錫)과 함께 남한산성의 동장대에서 노닐고 함께 시를 지었다. 「남한동장대초부심계부(南漢東將臺同樵夫心溪賦)」라는 제목이다.


     空外飄衣影              공중에 옷 그림자 나부끼고

     峰嵐抹淺靑              산 아지랑이는 연청색.

     境宜初夏集              지대는 초여름에 모이기 좋고

     詩最夕陽聽              시 낭송은 석양에 듣기 좋군.

     雜樹精華溢              온갖 나무마다 정화가 넘쳐나고

     荒城氣勢停              허물어진 성은 기세가 멈추었다.  

     旗竿留壯蹟              깃대에 장한 자취 남았기에

     豪想與亭亭              호방한 상상이 더불어 정정하다.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초청으로 나도 나무마다 생기가 도는 이 초여름에 산성을 찾았다. 일요일이라 산성을 오르는 마을버스에는 유람객들로 가득했다. 급한 고개를 돌 때마다 통로에 비집고 들어선 할머니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산비탈의 잡풀들에 눈을 주면서 하나하나 이름부르는 그 음성은 전혀 쇤 소리가 아니었다. 기세가 멈춘 듯 허물어진 성이라고 하면서도, 이덕무는 깃대에 장한 자취가 남아 있어 호방한 상상이 그 깃발만큼이나 정정하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되뇌여보았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형세상 일시 굴욕을 보았지만, 국난의 때에 갖가지 담론들을 수렴해가는 경험을 축적한 곳이다. 이곳은 이미 백제의 위례성과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또 호란의 이후 남한산성은 국난의 방어처로서 줄곧 의식되어 왔으며, 평화시에는 정신적 이완의 유상지로서 기능했다. 그 뿐만 아니다. 남한산성과 인근 광주는 서책의 간행이 활발했던 문화창출의 공간이기도 했다. 


2. 


인조 14년 겨울에 청나라의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하자 인조와 관료들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한 달 보름여 간의 항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성안과 민초들의 고통이 심해지고, 주화파와 주전파와의 갈등이 격화되자, 인조는 항복을 결심했다.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인조는 곤룡포와 익선관을 벗은 채 걸어서 송파의 삼전 나루로 나아가 청의 관복을 입고 삼배구고두례를 해야 했다.


그런데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병자호란 때 조선이 굴복한 것은 북송이 후금에게 패하여 천자가 납북되어가는데도 후금과 맹약을 맺은 일과는 다르다고 했다. 물론 의리를 존숭해서 척화를 주장한 것은 민족의 기개를 떨친 장엄한 일이었다. 하지만 주화를 주장한 최명길도 스스로의 직분을 다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었으리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장유가 삼전도비문을 쓴 것은 임금이 욕을 당하는데 혼자만 깨끗할 수가 없으므로 스스로 욕을 보고 훗날 국력을 일으켜 복수설치할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김만중은 현실정치에서는 당론을 주장했지만 병자호란 때의 각 사람의 대처방식에 대해서는 의리의 척도만이 아니라 민족과 백성의 처지, 가문의 당론 등 다양한 요소를 함께 고려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이 시점에서 선인들의 행적을 평가할 때에도 이와 같은 상대주의가 필요하리라.


지극히 풀기 어렵고 전망을 예측하기 어려운 현안에 대해 서로 상이한 관점을 지닌 복수의 의견을 절충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 점은 이미 『장자』가 말한 바 있고, 현대의 정치학과 철학이 누누이 강조하는 바다. 다만 남한산성에서의 결정은 공적 담론의 결과였기에, 그 담론의 과정만은 배울 필요가 있다.


3.


남한산성의 일에 관해서는 인민의 참상을 기록한 자료가 의외로 적다. 정파들이 공적 담론을 진행하는 동안 백성들은 어떤 처지에 있었고, 백성들은 어떻게 현실에 대처해야 하는가? 이 점에 대해 식자층의 보고는 인색하기만 하다. 같은 시기, 강화도의 참상을 보고한 『강도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통진과 김포 등지의 피난하는 백성들과 서울에서 도망쳐 온 사족 등, 수많은 사람과 물건들로 해안과 들이 가득 찼다. 매달리듯 소리치며 건네줄 것을 호소하는데, 배는 건너편(강도 해안) 나루에 묶여 있었으니 건널 길이 도무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병이 엄습하자 순식간에 거의 모두 유린을 당하는데, 혹은 찔려죽거나 혹은 강물에 몸을 던져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같았다. 그 처참한 모습은 차마 말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강화도 함락 이후 요행히 투생한 이들도 줄줄이 묶여 나갔으며, 빈궁 일행은 이미 적의 포로가 되었고, 원손은 다시 주문도(석모도 서쪽 섬)로 피신해야 했는데, 무고한 백성들은 해골이 되어 산야를 덮었다고 한다. 『강도몽유록』이 그 정황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요행히 살육을 모면한 사람들도 줄줄이 묶여 나갔으며, 머리를 나란히한 해골이 산에 쌓였다. 앞에서 잡아당기고 뒤에서 몰아 마치 양떼 몰 듯 하였다. 요행히 죽음을 면한 자들은 백에 한 둘 뿐이었는데, 부모를 잃은 아이, 아내를 잃은 남편, 그 아픔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여기서부터 유추한다면, 산성의 위에서 바라보이는 들판에 나무와 풀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호인들이 가득했던 당시에, 그 후방의 백성들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으리 짐작된다. 정권을 담당했던 이들은 호란의 이후에 즉각, 주리고 헐벗었을 뿐 아니라 가족을 잃고 떠도는 백성들을 깊이 애도했어야 했다.


식자층은 의리의 관점에서 사실을 논단하는 데는 뛰어났으나, 불행하게도 생활하는 인민의 고충에 대해서는 그리 시선을 두지 않았다. 앞으로 단편적인 자료라 해도 그것들을 수집해서 정리하고 재해석함으로써 실제 생활하는 사람들의 현실대응의 방식을 객관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4.


남한산성은 아름답고 또 위세가 당당한 성이다. 축성과 동시에 조성된 사장대 중 서장대는 특히 오래도록 보존되었다. 처음에는 단층 누각이었으나 1751년(영조 7)에 왕명으로 유수 이기진이 2층 누각을 중축하고 내편을 무망루, 외편을 수어장대라 명명했다. 그 수어장대 밑에 청량당이 있다. 이 당우는 인조 2년(1624) 산성의 축성을 맡았던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인 이회(李晦)의 혼령을 받들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당시 축성의 총책임은 이서(李曙)가 맡고, 동남축성은 이회가, 서북축성은 벽암대사에게 맡았다. 그런데  이회는 축성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무고를 입고 죽임을 당했다. 그의 부인은 성 쌓는 자금을 마련하여 오던 중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강에 빠져 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회의 축성 사실은 공식 기록이나 사대부의 미문 속에 나오지 않는다. 그의 사실은 구비전승 속에서 더욱 생동감 있게 추억되어 온 듯하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조선중기의 역관 홍순언이 명나라 상서의 부인이 될 기녀를 도와주어 종계변무의 일을 성사시켰다는 고사를 고증한 「당릉군유사징(唐陵君遺事徵)」이란 논문을 남겼다. 실은 홍순언이 도와준 그 기녀가 과연 어느 상서의 부인인지 확증할 역사자료는 중국이나 한국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홍순언은 종계변무의 일로 군의 봉호를 받았고, 그의 일을 추억하는 글로 『어우야담』을 비롯한 많은 문헌이 남아 있다. 그렇기에 정인보는 사실고증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의리(정신지향)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역사 가운데는 문헌자료가 부족한 것이 적지 않다. 그것들을 모두 사실고증의 차원에서 오유의 일로 돌릴 것인가?


이회의 사실은 민중들과 하급 관료들이 성 쌓기에 동원되어 겪은 고충이나 그들의 실질적 공적을 반영하고 있다. 이회의 사적과 같은 전승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재해석하는 일이 지금 필요하다. '문헌'이란 본래 문과 헌의 종합이다. 문이 역대의 문건을 가리킨다면, 헌은 당시 현자들의 설을 가리킨다. 마단림(馬端臨)이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엮을 때 그는 자서(自序)에서 문헌기록과 함께 구전의론(口傳議論)을 취재원으로 삼았다고 했다. 남한산성의 기억에 관한 자료도 문헌기록과 함께 구전의론을 한데 수습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남한산성 일대는 문화 창출의 공간이기도 했다.


나는 과거의 논문에서 고려대학교 신암문고본 『한문초(韓文抄)』(零本)가 ‘효종 원년(1650) 남한산성 중간 목판본’이고, 그 초간은 임진왜란 이후 병자호란 이전에 이루어진 사실을 알고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다. 각수들은 모두 승려들이었다. 그런데 『광주읍지』와 『남한지』를 보면 광주와 남한산성에는 상당수의 책판이 후대까지 보존되어 있었다.


우선 규장각에는 『광주읍지(廣州邑誌)』 필사본이 두 종류 있는데, 그‘책판(冊板)’조에 각각 『사략 초권(史略 初卷)』 등 22종이 수록되어 있다. 또 장서각에 소장된 홍경모 편찬의 『남한지(南漢志)』에는‘누판(鏤板)’조에 『역본의(易本義)』 등 32종의 책판이 기록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의 『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에도 그‘누판’조에 『역본의(易本義)』 등 32종의 책판이 기록되어 있다.


책판의 제작과 책의 인쇄에는 남한산성 일대 사찰의 승려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배불론자라고 할 한유의 산문집을 간행한 것은 일종의 관용 정신이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5.


어느 시대나 위기는 있다. 병자호란 때 선인들이 위기를 극복해 나간 방식을 추체험해 본다면 현재나 미래의 위기에 대처하는 유력한 방안을 떠올리게 될 듯도 하다. 특히 선인들의 역사기억 방식과 문화 창출의 의지를 살펴보는 일은 역사문화의 지속적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경기 지역에서 굴지의 역사미를 담고 있고 생태 환경이 잘 보존된 남한산성 일대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누구나 석양을 바라보며 역사를 논하고 호방한 상상을 하게 되었으면 한다.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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