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지 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5월초 연휴 기간에 지리산길 도보여행을 다녀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상사 앞 매동 마을에서 출발하여 금계 마을까지 가는 지리산길 1구간을 대구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온 것이다. 아침 7시에 출발하여 국도만도 못한 88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도 저녁 7시 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지난 겨울에 두 번 다녀온 적이 있어 길은 낯익은데 보이는 풍광과 같이 걷는 일행은 전혀 달랐다. 우선 길을 걷는 사람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버스 두 대로 왔다는 어느 모임의 회원들은 모두 이름표를 달고, 수학여행 온 학생들처럼 즐거워하며 재잘거린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는 사람들의 말씨도 제각각이지만, 쉼터에서는 모두 격의 없이 길동무가 되어 인사를 주고받는다.
서울서 출발하는 당일치기 관광버스가 3시간 반만에 매동 마을에 도착한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길을 찾는지 알 만하다. 심지어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충청도 아저씨도 일행의 도움을 받아가며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금계마을에 도착했다. 허기야 우리 일행에는 술꾼이 몇 명 끼어 있어 중간 중간 쉼터가 나타날 때마다 막걸리 마시느라 꽤 지체가 됐지만 말이다.
지리산길의 피해로 민원이 있었다는데 군데군데 세워 놓은 안내판과 길표시 덕분에 길 잃을 염려는 없다. ‘묵정밭’을 모르는 도시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안내판을 세워 설명을 해주니 고맙기는 한데, 밭 한 자락을 보라색으로 수놓고 있는 자운영에 대한 설명은 없다. 몇 억씩 들인 사방사업에 대한 안내판은 사진까지 곁들여서 호화판으로 세워놓았으나 ‘다랑논’이나 ‘등구재’에 대한 안내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주 눈에 띄는 것은 길 가의 고사리나 두릅. 도라지, 고추 같은 농작물에 손을 대지 말라는 호소문이다. 여러 사람이 지나다보니 간혹 손을 타는 수도 있는가보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더니, 실은 한 주민이 이런 문제로 지리산길을 문제삼아 민원을 제기했고 그 때문에 지리산길의 일부 노선이 변경되었다고 누군가가 귀띔을 해준다.
그래서 창원 마을 당산 나무는 먼발치에서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지리산길을 처음 걷다가, 해질녘 당산 나무 앞 평상에 앉아 바라보던 지리산 주능선의 모습은 얼마나 근사했던가. 두 번째 왔을 때는 당산 나무에 끌려 창원 마을 옆 지리산 로지에서 민박을 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마을에 들르지도 못하고 바뀐 길표시를 따라 금계 마을 쪽으로 빠지고 말았다.
민원을 제기한 주민은 10여년 전에 귀향한 서울의 일류대학 출신이라고 한다. 큰맘 먹고 번잡한 도시를 떠나 한적한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왔더니 어느 날 갑자기 지리산길이 뚫리면서 도시 사람들이 몰려와 농작물에 손을 대고 하니 기분이 상할 법도 하다. 더구나 각 시군이 관광자원 개발한답시고 지리산에 다투어 길을 내고 땜을 막고 케이블카를 놓으려 하는 걸 보니 더욱 속이 탔을지 모른다. 나중에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니 논리가 정연하고 빈틈이 없다. 지리산길이 좋아 주변 친구들에게 권하여 함께 걷자고 나선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였다.
“높고 험한 산을 타는 사람은 믿을 만하다” 그러나 외진 마을을 찾는 손님들이 반갑고 이들에게 민박도 제공하고 농산물과 음식을 팔아 장사를 하겠다는 기대에 들떠 있는 마을 이장과 주민들을 고발하고 인터넷에 글을 올려 지리산길을 추진하는 ‘숲길’이라는 단체까지 비방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도 든다. 가격표를 보고 알아서 돈을 내도록 한 무인 주막은 얼마나 멋있는 발상인가. 지리산길을 만들고 걷는 사람들은 댐이나 케이블 카, 자동차길 같은 개발 방식에 반대하여 힘들게 두 다리로 걷는 쪽을 택한 사람들이다. 간혹 호기심에 고사리 순을 몇 개 꺾고 화장실이 없어 길가에 실례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앞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불편을 감수하고 1천 m 이상의 험한 산길를 걷는 사람들은 일단 믿을 만하다. 알프스를 즐겨 오르던 선배는 언젠가 하산 후 기차시간이 촉박하여 애를 태우고 있는데, 마을 주민 한 사람이 아무 조건 없이 선선히 자기 차를 내주면서 기차역까지 타고 가서 열쇠를 어떤 가게에 맡기라고 하더란다. 고맙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어떻게 처음 보는 이국인에게 차를 내주느냐고 물었더니, 1천m 이상의 높은 산을 타는 사람은 다 믿을 만하다고 대답하더란다. 지리산길을 만들 때 너무 쉬운 길만 택하지 말고 때로는 1천 m가 넘는 험한 길도 포함시켜야 산길 걷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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