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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바마시대와 한국20]한국 역대 대통령들의 도덕성 / 김종철

문근영 2018. 10. 8. 00:15

 

 

[오바마시대와 한국20]


7.3. 한국 역대 대통령들의 도덕성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 ‘상징적 국가원수’이던 윤보선과 최규하는 논외로 하고 도덕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이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미국 하와이를 근거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은 3·1 운동 직후인 1919년 9월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는데,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상하이를 방문한 뒤로는 임시정부를 다시 찾은 적이 없을 정도로 불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한다. 그는 1945년 8·15 이래 미국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아 1948년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지만, 민족의 최대 숙원이라고 할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공권력으로 무산시키고, 친일에 앞장섰던 지주와 자산가들이 중심이 된 한민당과 손을 잡는다.
 
 

많은 국민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지만, 그는 1960년 3월 15일의 대통령선거에서 사상 유례가 없는 부정이 저질러진 데 분노한 마산 시민들의 항거를 외면하고 종신집권의 길로 치닫다가 4월혁명으로 정치적 파산을 당한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에 세상을 떠난 뒤 꼭 30년이 되는 지금도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 분야를 아울러서 그를 연구한 전문 자료들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도덕성 측면에서 보면, 박정희는 ‘정의’와 윤리에서 크게 벗어난 인물이었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소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1940년 4월 일제의 ‘꼭두각시 정부’라고 불리던 만주국의 육군군관학교에 들어간다. 1942년 10월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제의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치된다. 이때부터 일본군 장교인 그가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이 그의 생시와 사후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케네디, 박정희의 ‘불법’을 ‘승인’하다


박정희의 생애에서 인간적으로 심히 괴로운 시기는 1948년의 ‘여·순 반란사건’ 때였을 것이다. 1946년 12월에 한국 육사를 2기생으로 졸업한 그는 48년에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여·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된다. 그가 맏형인 박동희의 영향으로 남로당에서 활동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남로당에 가입한 장교들의 명단을 군 수사대에 넘겨주고 실형은 면한 채 예편당하고 사상 전향을 한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한다. 군 수뇌부에 있던 만주 출신 인맥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 뒤 박정희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켜서 결국 미국 케네디 행정부의 ‘승인’을 받은 것은 정치적으로는 승리였을는지 모르나 국가적으로는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나는 청년기인 1967년부터 박정희의 ‘삼선 개헌’ 공작을 지켜보고, 1972년에는 동아일보사의 기자로서 ‘10월 유신’이라는 헌정쿠데타를 목격했다. 그리고 1974년 10월 24일에 선배 ·동료들과 함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참여한 바 있다. 1972년 10월 17일에 박정희가 선포한 ‘유신’이라는 것은 잔혹한 공포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뜻한다. 그는 언론과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그의 영구집권 기도에 반대하는 민주인사들을 닥치는대로 투옥한다. 1974년 1월에 1호가 나온 ‘긴급조치’가 그 시발점이다. 2백 명이 넘는 청년·학생과 기성세대가 ‘민청학련’과 ‘인혁당’이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하거나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는 혐의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장기형부터 사형까지를 선고받는다. 박정희의 그런 폭정을 보면서도 겁에 질린 채 기사 한 줄 제대로 쓰지 못하던 동아일보사의 젊은 언론인들이 발표한 것이 바로 ‘10·24 선언’이다.


그 운동이 전국의 언론사들로 들불처럼 번지자 ‘유신 선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사의 광고주들을 협박해서 동아일보, 동아방송,  월간 신동아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마침내 1975년 3월 12일부터 동아일보사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들이 사주 김상만의 손에 차례로 해직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무려 1백30여 명이 회사를 쫓겨나는데, 그중 113명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를 만들어 34년 동안이나 동아일보사와 국가를 상대로 명예회복과 배상을 요구한다. 그 결과 2008년 10월 21일,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동아일보사와 국가는 명예회복과 보상을 해야 한다”는 요지의 결정을 내린다.


‘유신 피해자들’에 대한 진실화해위의 결정


이 결정 이전에 박정희 정권 시절에 사형을 당한  ‘인혁당 사건’의 8명과 민족일보사 조용수 사장이 대법원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정신적, 물적 배상을 받는다.


그런 일을 자행한 박정희는 1998년 2월 25일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래 노무현 정부가 물러나기까지, 보수세력이 명명한 ‘잃어버린 10’년 동안 화려하게 부활해서 이명박 정부 시기에도 현대사상 최고의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아래에 인용하는 글을 쓴 학자는 보수세력이 박정희를 미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화여대 국문학과 교수이며 소설가인 이인화가 1990년대 후반에 쓴 글을 바탕으로 박정희를 ‘국가적 영웅’으로 미화하는 방식을 소개한다.


  (이인화의 눈에) 박정희는 ‘비로소 눈을 비비고 (···) 진정 위대했던 한 사람의 국가지도자로서 바로 보게 되는’ ‘선악을 초극한 인간 운명의 한 전형’으로 부각된다. 굴절 심한 박정희의 인생역정, 즉 스물여덟 살에 일본 육사를 나온 만주군 중위, 서른두 살에 숙군 대상자로 사형 구형을 받은 남로당 군사부 비밀당원, 마흔다섯 살에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짓밟는 쿠데타 주모자 등의 ‘씻을 수 없는 죄과, 이 도덕적인 오점들’은 ‘이 국가에 대한 경건주의와 숭고한 자기희생의 의지를 낳았’으며, ‘그(박정희)의 영혼에 암세포처럼 번져갔던 죽음의 힘’으로 승화된다. 이 ‘죽음의 힘은 그를 채찍질하여 국익에 이르는 좁고 험한 길로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게 만들었’고, ‘오직 민족을 번영으로 이끌 절박한 시대적 과업만이 자기구원에 이르는 길’이었으며, ‘모든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자랑하던 북한의 전쟁도발을 막으며 경제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이 늙고 탈진해 쓰러질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이인화, 1997). 이렇게 ‘죽음의 형이상학’을 배경으로 한 초인적 초월성 맥락에서 정당성에 대한 이성적 관심은 사실상 조소의 대상일 뿐이다.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의 ‘민주화시대의 박정희’, 이병천 엮음,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2007년 8월, 창비. 374쪽)


이인화의 눈에 비친 박정희는, 요즘 말로 ‘좌빨’이었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질서를 짓밟았는데, 그런 오점들이 민족을 번영으로 이끄는 시대적 과업에 대한 사명감으로 이어져 ‘자기구원’에 이른 셈이 된다. 나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한다. 2008년 말에, ‘국민 여동생’이라는 애칭을 가진 문근영이라는 여성 연기자가 오래 동안 숨어서 해온 기부가 수억 원이 넘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많은 사람들의 감탄과 칭송이 잇따랐다. 그런데 보수를 자처하는 한 논객이 “문근영의 외할아버지가 6·25 때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잡혀서 장기형을 살고 얼마 전에 죽었다. 외손녀의 기부도 사회주의적 운동의 일환”이라는 요지의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이인화는 박정희를,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헤매다가 진리를 깨닫고 성자가 되어 종교를 창시한 듯한 인물로 비약시켰는데,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일가친척 중에 왼쪽으로 기운 사람이 있었다면 ‘좌빨’이 되는 것이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도덕 불감증


전두환은 군인 시절부터 거의 언제나 노태우의 앞에 서서 대통령 자리까지 달려왔다.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그는 4년제 정규 1기 졸업생으로서 1955년 2월 노태우, 정호용과 함께 소위로 임관된다. 1961년에 육사에서 대위로 근무하던 그는 5월 16일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육사의 ‘지지 시위’를 유도해서 박정희의 신임을 얻는다. 그는 소령이던 1962년에 영남 출신 장교들을 주축으로 한 ‘하나회’ 조직을 주도하고 1988년 2월 대통령직을 물러날 때까지 정치적 기반의 하나로 삼는다. 그는 대구·경북의 ‘명문고’를 나오지는 않았으나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군대에서 ‘승승장구’해서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관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오른다. 바로 이것이 그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피살 뒤 후계자로 솟아오르는 데 결정적 디딤돌이 된다.


그가 노태우와 더불어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신군부’의 집권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는 1981년부터 88년까지 대통령 노릇을 하면서 1979년의 12·12 쿠데타와 광주학살의 주동자라는 낙인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동족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잔혹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는 1987년의 6월항쟁 뒤  ‘친구이자 정치적 후배’인 노태우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여소야대’로 야당의 공세에 밀리던  노태우의 결정에 따라 1988년 11월 강원도의 백담사로 ‘귀양살이’를 떠나서 두 해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전두환의  ‘수난’은 세월이 갈수록 심해진다. 그는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 두 해만인 1995년에 ‘내란 및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는 이 재판에서 ‘제5공화국 비리’에 관한 심리를 아울러 받고 2,205억 원의 추징금을 내라는 판결을 받는다. 그런데 그중 532억 원만을 납부하고, 자신의 통장에는 29만원밖에 없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함으로써 사람들의 실소를 산 바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정직한 정부’ 만들기를 거울삼아 한국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논하면서 전두환을 반면교사로 거론하는 것은 어쩐지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도 역사의 일부라서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노태우는 시종일관 전두환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간 사람이다. 그는 ‘하나회’ 핵심이면서도 군대 진급이나 보직에서 전두환에게 늘 뒤지더니,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내다가 마침내 1988년 2월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는 김영삼 정부 시절의 ‘내란 음모 및 군사반란’ 재판에서 징역 15년에 추징금 2,629억 원을 선고받는다.


거의 언제나 전두환의 ‘종범’처럼 다루어지던 그가 추징금에서만은 4백억여 원이나 앞선 것이다. 노태우는 그 중 2,286억 원을 납부함으로써 전두환보다 도덕적으로 ‘비교우위’에 서게 된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도덕적 상처


김영삼과 김대중은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가장 오래된 ‘숙명의 라이벌’이다. 나는 요즈음도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서 웃는 적이 더러 있다. 김대중이 남북관계나 국내정치에 관해 발언을 하면 김영삼이 조건반사적으로 반박이나 공격을 하는 때가 그렇다. 김대중이 어떤 말을 했건 간에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호된 비난이 날아간다. 그러나 공격을 받은 쪽에서 대응하는 것은 별로 보지를 못했다.


김영삼은 1927년생이고 김대중은 1925년생이니 호적상으로는 후자가 두 살 위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언제나 김영삼이 한 발 앞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1951년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김영삼은 이듬해 5월 장택상 국무총리의 비서관으로 들어간다. 1954년 이기붕의 권유로 자유당에 입당해서 고향인 경남 거제군에서 총선에 출마한 김영삼은 압도적인 표차로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27세의 최연소 의원이 된 것이다.


이승만의 종신집권 기도에 반발해서 자유당을 떠난 그는 1958년 총선에서민주당 후보로 부산시 서구에서 출마했으나 부정 혐의가 짙은 투개표 때문에 낙선하고, 1960년 4월혁명 뒤에 치러진 총선에서 재선의원이 된다. 그는 1964년 통합야당인 민중당의 원내총무로 임명되는가 하면 대변인을 맡기도 하다가 1969년 11월 김대중, 이철승과 함께 ‘4O대 기수론’을 외치며 신민당 대통령후보 선출 전당대회에 나가서 언론과 정치인들의 예상을 뒤엎고 김대중에게 패배한다. 이때부터 김대중과 김영삼의 경쟁은 더욱 뜨거워진다.


그러나 두 사람이 늘 다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김영삼은 1983년 전두환 정권에 맞서 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김대중과 함께 만들기도 한다.  1980년 5월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은 국내 대리인을 통해 김영삼과 힘을 모아 신민당을 만들어서 민정당의 ‘제2중대’라는 비판을 받던 유치송의 민주당을 누르고 강력한 교두보를 쌓는다.


그러나 그들은 1987년의 6월항쟁 직후 영원히 돌아설 수 없을 정도로 결별한다.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명된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형식적으로 단일후보를 추진하다가 독자 출마의 길로 나가서, 결과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탄생’한다. 그 뒤 김영삼은 1988년 4월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을, 김대중은 새로 만든 평화민주당을 이끌고 경쟁하는데 선거는 김대중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자 1990년에 김영삼은 김종필과 손을 잡고 ‘삼당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옮겨 간다. 그 이후 김영삼이 1992년에, 김대중이 1997년에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두 사람의 경쟁은 ‘40대 기수론’의 경우 말고는 해묵은 순서를 계속 밟아 나간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에 도덕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이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앞에서 말했지만, 민주세력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김영삼과 김대중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영삼은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같은 개혁적 조치를 함으로써 좋은 평가를 받은 반면에 차남인 김현철이 ‘소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권력을 휘두른 까닭에 ‘문민정부’와 ‘민주세력 최초의 집권’이라는 말이 무색해져버린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에 그 시절 기억이 또렷하지 않아서 내가 쓴 글을 찾아 보니 이렇다.


 (···)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가 1년 가까이나 남았는데도 머리칼을 자른 삼손처럼 보인다. 요즈음 몇 사람만 모여도 대통령과 둘째 아들 현철씨를 공격하지 않고는 얘기를 이어갈 수가 없다. ‘달리는 여론조사기관’이라는 택시 기사들은 대통령 부자가 존칭을 박탈당한 지가 오래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10% 안팎으로 곤두박질쳤다 하니 92년 선거에서 그에게 갔던 1천만여 표는 거의가 달아났다는 말인가?

 (·····)

 대통령이 이렇게 궁지에 몰린 직접 원인이 현철 씨임은 물론이다. 지난 4년 동안 현철 씨와 그의 사조직 또는 정보조직이 즐기던 ‘언론놀음’과 여론재판은 이제 부메랑이 되어 그의 머리를 치고 있다.

 (·····)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관직도 없는 30대 청년이 총리와 장관 인사에 개입하고, 안기부 고위간부를 마름 부리듯 하며, 집권당 공천에 관여하고, 국빈들이나 머물 고급 호텔의 방을 사랑방처럼 썼다 하니····· 하물며, 만약 한보에 간 5조 원의 은행돈 대출에 그가 개입했다는 소문이 진실로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겨레> 1997년 3월 18일자 칼럼 ‘왜 불행한 대통령들뿐인가’에서)


결국 김현철은 1997년 2월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구속되어 옥살이를 하고,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영삼은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등의 부도가 잇따르면서 마침내 IMF 외환위기를 맞아 숨을 가쁘게 쉬다가 김대중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물러난다.


전남 신안군의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1943년에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회사원 생활을 하다가 8·15 해방 뒤 목포신문사와 해운회사의 사장으로 일한다. 그는 해운업을 하면서 몽양 여운형이 주도하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정치생활을 하는 기간 내내 ‘좌익’ 성향이라는 공격에 시달린다. 그는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총선에 나가서 낙선한 뒤 1956년 민주당에 입당해서 장면의 신파 계보에 들어간다. 그는 4·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든 뒤 1961년 5월 14일 강원도 인제 재선거에서 당선되지만 이틀 뒤에 일어난 군사쿠데타로 의원 선서도 하지 못한다. 그렇게 비운의 정치인이 된 그와 박정희의 악연은 그때부터 18년 동안 계속된다.


마침내 그는 1963년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초선으로 의사당에 들어간다. 그 선거 때, 박정희가 김대중이 장차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미리 막으려고 공화당 후보로 김병삼을 내세워 ‘총력지원’을 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967년에 재선된 김대중은 앞에 말한 ‘40대 기수 경쟁’에서 김영삼과 이철승을 이기고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된다. 그는 1971년 4월의 대선에서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해 총통제를 계획하고 있다”고 유권자들에게 경고하면서 파죽의 기세로 투표일을 향해 가지만 호남 출신인 그를 지역감정으로 몰아붙이는 박정희 진영의 홍보전과 ‘부정’ 혐의가 짙은 투개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1972년 10월에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고 영구집권 체제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일본에서 들은 그는 미국에 가서 교민들과 함께 유신 반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머물던 호텔에서 한국 중앙정부 부원들에게 납치당한다. 그는 일본의 바다에서 ‘상어밥’이 될 뻔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비행기 소리에 놀란 납치자들이 급히 한국으로 데려와서 ‘귀가’시키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앞에 적었듯이 그는 1980년 봄 전두환 일파의 ‘신군부’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쓰고 사형선고까지 받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다시 죽을 고비를 넘긴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간신히 이기고 대통령이 된 그는 같은 민주화운동 출신인 김영삼이 수구보수세력으로 넘어가서 대통령이 된 것과는 달리 자력으로(보수의 김종필과 손을 잡았으므로 완전한 자력은 아니지만) 정권을 장악한 민주진영 최초의 정치지도자가 된다.


그는 당선자 시절부터 환란을 수습하면서 국가 부도의 위기에서 국민을 구해내고, 보수언론 사주들을 탈세 혐의로 구속하는 등 개혁을 시도하지만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김대중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한 것은 그의 세 아들이었다. 홍일, 홍업, 홍걸이라는 이름이어서 ‘홍삼 트리오’라고 불린 그들은 그의 임기 말을 여러 가지 스캔들로 얼룩지게 한다. 김대중 측근과 직계 가족의 어지러운 이권 찾기에 관해서는 다음 글이 그 본질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현 정부하에서의 부패게이트에도 과거 정부에서와 같이 여전히 공식적 권력이 부당하게 이용되고 있지만, 더욱 큰 문제는 비공식적 권력(막후 권력 혹은 실세)이 공식적 권력을 통제·왜곡한 것이다. 왕조시대가 아님에도 막후정치가 득세하여 국정을 농단하고 부패문제를 형성하는 주된 고리 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공식적인 법과 제도적 절차가 무시되는 후진국의 모습이다. 특히 대통령과 밀접히 관련된 인물들이 부패문제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것은 비록 직접적인 개입이 없더라도 대통령이 작금의 여러 부패문제에 대하여 심각한 도덕적 책임을 부담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윤태범 충남대 교수의 ‘끊이지 않는 게이트의 망령’, <김대중 정부 5년 평가와 노무현  정부 개혁과제>, 경향신문사·참여연대 엮음, 2003년 2월, 한울, 17~18쪽)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 역시 정치부패의 척결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한국정치사에 있어 최초로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하에 부패방지법, 돈세탁방지법 등을 제정하는 등 정치자금과 관련된 정치부패를 근절하기 위한 다각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오히려 각종 게이트와 대통령의 아들까지 부정에 연루,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 부패한 정부로 국민적 비판을 받고 있다. (김영래 아주대 교수의 ‘정치개혁의 무덤 음성정치자금’, 위의 책, 32쪽)


김영삼과 김대중은 모두 개혁에 역점을 두었으나 각 부문에서 구체적 계획을 강력하고도 끈질기게 추진하지 못하고 ‘부패’라는 불명예를 안은 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특히 ‘6·15 선언’을 계기로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김대중으로서는 그런 업적이 도덕성 확보로 이어지지 못한 사실이 아쉬울 것이다.


노무현도 결국은 비슷한 길로


1946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노무현은 흔히 ‘자수성가’한 정치지도자라는 평을 받았다. 그는 1966년에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2년 뒤 육군에 입대해서 사병으로 복무하고 1971년에 제대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야말로 평범한 한국 남성의 전형이다. (2009년 현재 우리나라 고등학교 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평균율’과는 크게 다르지만).


민간사회로 돌아온 뒤 곧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그는 결혼해서 1남1녀의 아버지가 된 상태에서 세 번 실패한 뒤 1975년 제17회 때 합격해서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된다. 그는 짧은 법관생활을 떠나서 1978년 변호사 개업을 하고는 주로 조세와 회계에 관한 사건 등을 맡아 상당히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1년에 ‘부림사건’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 2년 뒤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항쟁에 참여한다.


노무현은 42세 때인 1988년 4월 총선 때 김영삼이 총재이던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해서 당선함으로써 직업정치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이해찬, 이상수와 함께 ‘노동위 삼총사’로 불리면서 활발한 의정활동을 하는데,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5공 청문회’ 때 ‘광주학살’과 관련해서 전두환을 날카롭게 추궁한다.


그는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민주공화당이 합치는 이른바 ‘삼당합당’ 때 정치적 ‘보스’인 김영삼을 따라 가지 않아 박정희 군사독재의 후계자들과 전통적 야당 지도자가 ‘야합’하는 데 동참하지 않았다는 평가와 함께 민주화운동 진영에 신선한 인상을 준다.


그는 그 뒤 정치의 세계에서 가시밭길을 걷는다. 1992년 ‘작은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서 출마해서 낙선하고, 1995년에는 부산광역시장 선거에서 36.7%라는 높은 득표율을 올리고도  2위에 그친다. 1996년 15대 총선 때는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나가서 다시 고배를 마신다. 1998년 그는 서울 종로구의 보궐선거에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을 받아 출마해서 당선되고, 2000년 4월에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를 떠나서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부산 북·강서을에 나갔다가 허태열에게 패배한다.


정치적 계산을 하지 않고 대의를 따라가는 그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조직한 것이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약칭 노사모)이다. 노사모는 한국 대통령선거 사상, 대대적으로 부정이 저질러진 때를 제외하고 대체로 공정하게 치러진 선거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크게 작용한 민간조직임이 분명하다.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을 가진 그가 2002년 12월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을 누르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대다수 국민들은 ‘바보 온달’처럼 우직한 정부가 정직한 행정을 펼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2003년 2월 25일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오래지 않아 도덕성을 크게 의심받게 하는 암초에 부닥친다. 그해 10월에 그의 측근 중의 측근인 대통령 총무비서관 최도술이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최도술은 노무현보다 한 살 아래로, 부산상고 동문인데다 노무현이 변호사를 하던 시절 사무장을 맡은 바 있다. 게다가 그는 1995년 부산시장 선거 때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회계책임을 맡을 정도로 신뢰를 받고 인간관계도 끈끈한 인물이었다. 노무현이 그렇게 믿은 최도술이, 대통령 당선자 시절인 2002년 12월 말에 SK그룹  회장 손길승한테서 ‘당선 축하금’ 명목으로 10억 원이 넘는 양도성 예금증서를 받은 사실이 드러난다. 최도술과 손길승 모두 구속되어 실형을 사는데, 그 사건은 노무현에게 치명타에 가까운 것으로, 2004년 3월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때 야당인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정당을 위한 불법 선거운동을 계속 해왔고, 본인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초래했으며, 국민경제를 파탄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소추안을 내고, 국회의장 박관용이 경호권을 발동해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강경한 저항을 ‘제압’하면서 탄핵안을 헌법재판소로 넘긴다. 노무현은 한 동안 대통령 공무 수행을 정지당했다가 5월 14일 헌재가 국회의 소추안을 기각함으로써 업무를 재개한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사건이 아니라 2009년 봄에서 따지면 다섯 해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노무현은 대통령 임기 내내 크고 작은 추문들로 시달린다. 노무현이 탄핵 파문으로 고역을 치르던 무렵 형인 노건평이 자신이 경영하는 정원토건이라는 회사에서 10억 원을 빼내 차명으로 주식투자를 한 사실이 드러난다.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실이 친인척과 측근을 ‘밀착 감시’하는데도 그런 대형사고들이 잇따라 터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노무현의 직계존비속 중에서 노건평을 빼면 이렇다 할 혈육이 부정이나 부패에 관련된 것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과 김대중의 세 아들이 구속된 전례와 비교하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평을 들을 만했다. 그러나 노무현이 임기를 마치고 김해 봉하마을로 돌아간 지 열 달도 안 된 2008년 12월 초에 노건평이 검찰에 구속됨으로써 그 우월성은 빛이 바랜다. 동생의 대통령 재임 중에 그가 농협의 세종증권 매입에 개입해서 ‘중개인’과 함께 30억 원을 받았다는 혐의가 인정되어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이다.


노무현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일이 2009년 4월 8일 그 자신의 ‘고백’을 통해 밝혀진다. 노무현은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이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한테 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데 대해 ‘홈페이지’에 이렇게 ‘사과문’을 발표한다. “저의 집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이라고. ‘저의 집’은 경상도 말로 아내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노무현은 부인 권양숙이 얼마나 되는 돈을 언제 받았는지 밝히지 않은 채 상세한 내용은 검찰에 나가서 진술하겠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은 검찰 정보를 인용해서 권양숙이 남편의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5~6년에 두 차례에 걸쳐 박연차한테서 10억 원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노무현의 이런 고백이 나오기 여러 날 전부터 그의 조카사위 연철호가 박연차의 돈 500만 달러를 받아 ‘유령회사’ 비슷한 기업을 세웠다는 보도가 요란하게 나오던 터라 노무현과 함께 집권세력을 이루었던 민주당과 그의 지지자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나게 컸을 것이다. 아래의 기사는 노무현이 받은 상처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 도덕성 하나로 정권을 만들었고, 그것이 권력을 지탱한 뼈대였지만, 결국 ‘검은 돈’이란 한국 정치의 비극적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 한 마디로 도덕성은 ‘노무현 정치’의 자양분이었고, 위기를 돌파하는 무기였다.

 (···)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 “이권 개입이나 인사 청탁을 하다 걸리면 패가망신시키겠다”고 다짐했고, 친형인 건평씨의 청탁 의혹에는 “시골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머리 조아리지 말라”고 일갈했다. (···) 임기 말 ‘참여정부 실패론’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괜찮은 대통령인데, 국민이 영 눈이 높아 안 쳐준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4월 8일자, 김광호 기자의 기사에서)


검찰이 전직 대통령인 노무현을 조사한 뒤 재임중의 ‘위법행위’로 기소할는지는 지켜 볼 일이지만, 어쨌든 그는 지금까지 밝혀진 친인척과 측근의 비리만으로도 한국 역대 대통령들의 ‘부도덕성 계보’에 두드러지게 덧칠을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도덕성’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정직한 정부’라는 이정표를 거울삼아 한국 역대 대통령들의 도덕성을 짚어보고 나서, 이제 이명박 정부에 이르고 보니 머릿속이 산란해진다. 이 쟁점이 하도 오래 국민들을 어지럽게 했기 때문이다. 2007년 12월에 제17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기 전,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박근혜 후보가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기에 박 캠프가 특히 집요하게 이 후보의 도덕성을 문제 삼아서 그의 ‘도덕성 이력서’는 윤곽이 대체로 드러났다. 다만 가장 뜨거운 쟁점이던 ‘BBK’는 그의 대통령 취임 나흘 전인 2008년 2월 21일 특별검사가 ‘무혐의’라고 밝힘으로써 없던 일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정작 그의 도덕성은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잠잠해지기는커녕 더욱 거센 논란에 휩싸인다.


1942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명박은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을 고생스럽게 보낸다. 8·15 해방 직후에 부모의 고향인 경북 포항으로 온 그는 집안 형편이 너무나 어려워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려 하지만 장학금을 약속받고 동지상고에 입학한다.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가서 한 해 동안 노동을 하다가 고려대 경영학과에 들어간다. 그는 3학년 때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뽑히고, 1964년에는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서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는데, 옥살이 기간은 6개월이다.


‘전과자’라는 경력 때문에 취업을 못 하다가 1965년에 어렵사리 현대건설에 입사한 그는 경영주 정주영과 긴밀한 상하관계를 맺으면서 승진을 거듭한다. 29세에 이사가 되고, 입사 12 년만인 1977년에 현대건설 사장의 자리에 오른다. 1988년에는 회장이 된다. ‘탁월한 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받던 그는 1990년대 초의 ‘걸프전’ 때문에 미수 채권을 회수하지 못해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빌미를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는 ‘현대’를 떠나서 1992년 제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리고 15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구에 출마해서 이종찬과 노무현을 누르고 지역구 국회의원이 된다. 그러나 그는 선거기획을 맡았던 참모가 “이 후보가 거액의 선거비용을 누락시키고 7천만 원 가량만 신고했다”고 폭로하는 바람에 기소되자 재판 과정에서 의원직을 사퇴한다. 나중에 그는 서울 고등법원에서 벌금 4백만 원을 선고받는다. 이 사건은 이명박의 정치생활에서 처음으로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그가 Lke라는 금융투자회사를 설립했다가 실패하고 김경준과 공동으로 세운 BBK의 ‘주가조작’ 사건에 연관된 혐의로  고통을 겪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대통령이 된 뒤 그의 도덕성은 자신은 물론이고 그가 정부 요직에 임명하기로 내정하거나 임명된 사람들 대다수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다시피 한다. 그는 국무회의를 구성하려고 15명의 후보를 지명하는데, 그 중 3명이 부동산 투기, 논문 표절, 자녀의 이중국적 문제 등으로 자진사퇴한다. 그리고 임명된 사람들 대부분도 ‘고소영’(고려대 출신, 소망교회 신자, 영남이 고향인 사람), ‘강부자’(강남의 부동산 부자)라는 여론의 비난을 받는다. 앞에서 예로 들었듯이, 오바마 행정부의 ‘성과 담당 최고책임자’로 내정된 낸시 킬퍼가 14년 전인 1995년에 ‘단돈’ 298달러(환율을 1,500대 1로 계산하면 45만원)의 세금을 내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자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깨끗이 물러난 데 비하면 참으로 엄청난 부도덕이 드러난 인물들이 이명박 정부 한 해 동안 계속 중요한 직책에 기용되는 것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도덕성 논란은 그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반대세력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함께 가야 할 국민으로 여기지 않고 무자비하게 대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2008년 여름에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무렵과 그 얼마 뒤에 그가 한 말과 행동이다. 그는 청와대 뒷산에 앉아서 <아침이슬>노래를 들으면서 거대한 촛불의 일렁임을 보고나서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다시 국민들에게 다가가겠다”고 말했는데, 시간이 많이 흐르지도 않은 시점에 공권력이 강경하게 ‘촛불’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에 못지않은 ‘공약 위반’은 대운하 공사이다. 그는 대통령 취임 뒤 여론이 거세게 반대하자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대운하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4대 강 정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된 대운하 공사’라는 비판을 받을만한 일을 하고 있다.


그의 도덕성이 균형감각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결정적으로 일으킨 것은 2009년 1월 20일 서울 용산 재개발구역에서 일어난 ‘용산참사’ 때이다. 대통령이 경찰청장으로 내정한 당시 서울청장이 농성하는 철거민들을 무리하게 진압한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그는 희생자들의 유족을 인간적으로 위로하기보다는 내정자를 끝까지 비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1974년 12월에 결성한 이래 민주화와 인권 회복을 위해 애써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거룩한 분노로 맞서 저항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2009년 2월 2일에  발표한 선언문은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용산 참사는 과연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파국의 종점은 어디인지 국가구성원 모두에게 질문과 충격을 던진 무서운 사건이었습니다.

  먼저 국가와 공권력의 존재이유를 따져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 국민의 생명과 행복을 위하는 바른 정치가 공화국 탄생의 근본 동기입니다. 그런데 오로지 몇몇 부자들을 위해 대다수 국민의 생존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용산 참극에서 나타났듯이 국민을 국민으로 대하지 않고 서슴없이 폭력을 저지르는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은 정당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반성하지 않는 경찰과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검찰을 두둔하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은 더욱 우리를 슬프고 울분에 떨게 만듭니다. 유감스럽지만 1987년 어느 대학생의 죽음의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했던 일 하나로 철옹성 같던 군사독재정권이 붕괴되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려야겠습니다.

 



7.4. 벼랑 끝에선 한국의 교육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청소년과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무엇일까? 가난, 나쁜 건강, 환경오염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겠지만, 나이차에 관계없이 공통으로 지닌 고민은 교육이다.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왜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늘 안고 살아야 하고, 자녀를 둔 부모들은 ‘어떻게 하면 내 아이를 남보다 뛰어나게 가르쳐서 좋은 대학에 보낼 것인지’가 가장 큰 걱정거리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좋든 그르든 단연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네 살 배기 코흘리개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생에게 쉴 틈도 거의 주지 않고 피아노, 미술, 태권도 학원으로 보내는 나라가 어디에 또 있을까? 고등학교로 올라가기 전에 중학교 때부터 대학입시에 대비해서 사설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적지 않은 나라가 한국 말고 달리 있을까? 고등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이 2008년도에 83%로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는데, 그렇게 대학에 들어간 학생 대다수가 제 나라 말로 편지도 제대로 못쓰고, 10년 가까이 영어를 배웠는데도 외국인을 만나면 의사 소통이 어려워서 쩔쩔매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


어디 그뿐인가.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대기가 벅찬 자녀의 사교육비를 벌충하려고 남편이나 아내가 낮에 일을 마치고 밤에 다시 부업을 나가야 하는 가정이 적지 않다. 서민들은 ‘교육’ 때문에 이렇게 고달프지만 부자들이 많이 사는 서울 강남 지역에서는 한 달에 보통 수백만 원이 들어가는 고액과외가 ‘성업중’이다.


2008년 여름엔가, 텔레비전에서 본 뉴스가 있다. 서울 노원구의 고등학생들이 자정까지 사설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수십명씩 버스를 타고 인접한 의정부로 넘어가는 장면이었다. 무슨 법인가 때문에 서울에서는 학원이 자정까지만 ‘영업’을 할 수 있는데, 경기도는 그렇지가 않아서 그쪽으로 가서 또 공부를 하고 2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간단히 세수라도 하고 나면 2시 반이 될 텐데 얼마나 잠을 자고 몇 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간단 말인가? 서울의 모든 고등학생이 그러지는 않겠지만,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요즈음 나라 안팎으로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성장률은 떨어지고 물가는 오르고 실업자는 늘고 환율은 자고 나면 널뛰기를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공무원을 줄인다고 나서고, 대기업들은 신입사원들의 봉급을 깎아서 경영난을 헤쳐 나가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모두가 줄이고 깎는 마당에 ‘절대로 못 줄이겠다’는 것이 있다. 바로 사교육비이다. 교육과학기술부와 통계청이 2009년 2월 27일에 발표한 ‘2008년 사교육비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2008년 초·중·고등학생의 전체 사교육비는 20조9,000억 원으로 전년도의 20조400억 원보다 4.3%가 늘어났다. 같은 기간에 물가가 오른 것과 엇비슷하게 사교육비가 올랐으니 가계의 부담은 그만큼 커졌을 것이다. 학생 1인당 사교육비는 월평균 23만3,000원으로 전년 대비 5%나 늘었다. 과목별로 보면 사교육비 중 영어가 11.8%, 수학이 8.8% 늘어나서 다른 과목들을 압도했다.


2008 회계연도의 정부 예산은 256조 원 남짓이었는데, 사교육비는 21조 원에 가까웠으므로 예산의 8%쯤 되는 액수이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사교육비 전액을 다른 생산적 부문들에 지출했다면 국민경제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사교육비 통계수자들은 전국 273개 초·중·고 학부모 3만4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나온 것이다. 물론 정부기관이 지역과 계층을 고려해서 표본을 뽑았겠지만, 언론이 자주 보도하는 사교육 현실과 거리가 먼 수치들이 눈에 많이 띤다.


부모들이 사교육에 큰 돈을 들이는 주된 목적은 자녀의 인성을 함양하고 전문기술을 익혀주기보다는 학교에서 시험을 더 잘 치면서 궁극적으로는 수능점수를 높이 받게 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해야 이른바 ‘SKY 대학’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서울시내나 수도권에 있는 ‘괜찮은’ 대학에 입학해서 좋은 직장에 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SKY(하늘)라는 작명을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한국사회의 학벌 광풍을 이 말보다 더 극명하게 표현하는 어휘는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아이비 리그(Ivy League: 동부의 뉴잉글랜드 지방에 있는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 8개 사립대학)가 가장 유명한데, 그 나라의 우수한 고등학생들이 그 8개 대학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국보다 나라가 몇 십 배 크고, 50개 주를 중심으로 독특한 교육제도와 재정이 뒷받침을 하는 특성이 있기는 하지만, 예를 들어 캔저스주 전체에서 1등을 한 학생이 하버드대 아니면 안 가겠다고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주립이라서 학비가 싼 캔저스대에 진학해 열심히 공부를 해서 지역에서 지도자로 일하거나 중앙 정치무대나 전문분야로 진출하겠다는 학생이 오히려 정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첫째 S대, 다음에는 K대나 Y대에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다른 일반적 경향을 보면, S대 자연계열보다는 Y대 의대에 들어가야  더 잘 살 수 있다고 보면서 수능점수가 더 높은 학생들이 후자로 쏠리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단순히 의사가 되어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삶의 보람을 찾겠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요즈음 대기업에 취업한 공대 졸업생들 중 상당수가 ‘사오정’이 되기 싫어서 의대 입시 준비를 고려한다는 추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기득권 유지, 신분 상승의 무기가 된 교육


한창 꿈과 낭만에 부풀어서 이웃과 더불어 가치 있게 사는 삶을 설계해야 할 젊은이들이 왜 이렇게 되어가는 것일까?  그들이 어릴 적부터 부모들이 ‘너는 공부를 잘 해서 남보다 좋은 대학, 그것도 제일 좋은 대학에 꼭 들어가야 해. 그래야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주입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학교의 평가라는 것이 성적 우선이라서 처지는 학생들은 사람대접을 못 받기 때문에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감이 굳어져서 청년기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21세기가 되기 전부터 그랬지만 이제 한국사회에서 학벌은 상위계층의 기득권 유지와 확대, 중하위 계층의 신분 상승을 위해 가장 필요한 발판이자 사다리가 되었다. <한겨레>가 연재하는 기획기사 ‘살림살이 나아졌나’(2009년 2월 24일자)를 보면 서울 금천구에 사는 한 주부(38세)는 1남2녀(초등학생 2명과 중학생 1명)를 위해 넉넉지 않은 살림인데도 한 달에 100만원 가까운 돈을 들이지만 다른 집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다고 여기고 있다. 모두 가려고 애쓰는 특목고에 보내려면 중학생한테 한 달에 학원비로 60만 원이나 들기 때문에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한 달에 100만원을 내고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수두룩한 상황이라서 국제중학교는 꿈도 꿀 수 없다고 한다.


위의 기사를 보면, ‘표준 강남 엄마’라고 자처하는 49세 여성은 2008년에 고3이던 딸과 고1이던 아들을 위해 한 달 평균 480만원을 썼다고 한다. 그 엄마는 이렇게 했다.


  “둘 다 수학이 약하니까 수학 과외는 기본이고, 언어영역도 전문 과외선생을 붙였어요. 과목당 한 명에 60만원씩이었으니 과외비만 240만원이 든 셈이죠.” 여기에 학원 종합반 수강료가 각각 100만원씩 200만원이고, 입시가 코앞인 고3 딸에게는 불안한 마음에 사회탐구 인터넷 강의(40만원)도 끊어줬다. 남편 한 달 수입의 60~70%를 쏟아부어도 사교육비는 늘 모자랐다. “제가 부동산에서 아르바이트 해서 모은 1천만원도 전부 쏟아부었죠. 거기다가 1천만원짜리 마이너스 통장까지 만들었어요.”

  “그래도 대치동이 아닌 방배동이라 그 정도”라는 것이었다. “아침도 못 먹먹고 늘 시험에 찌들어 있는 아이들을 보는 건 더더욱 견딜 수 없었단다.” “중간·기말고사 2번씩에 3·6·9·11월에 보는 학력평가, 여름·겨울 방학 끝나고 개학과 동시에 치르는 학교 자체 시험이 2번, 간간이 보는 사설 모의고사까지, 모두 합하면 1년 내내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시험을 치릅니다. 애들 잡는 거죠.”


여기까지 인용하고 보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숨이 턱 막힌다. 도대체 제정신 가진 사람들이 ‘교육정책’을 펼치고 있는 나라인가? 이명박 정부 들어 청소년들과 학부모들의 고통은 훨씬 더 심해졌다. 대통령은 ‘공교육 만족도를 두 배로 높이고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낮추겠다’고 공언했는데, 정작 일선의 교육행정은 학교에서 점수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강화하는 현상을 빚어냈다.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초·중등학교에까지 ‘우열반’이 생겨서 학생들을 성적을 기준으로 ‘인종차별’하고 있다. 일제식민지시대의 잔재라는 ‘일제고사’가 되살아나서 일부 학교 교사들이 성적을 조작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점수 위주 교육으로 창의력과 사고력을?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2월 하순 ‘라디오 주례연설’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는 창의력과 폭넓은 사고력, 예술적인 감수성을 갖춘 사람입니다 (···) 대학입시에서 현재와 같은 점수 위주 선발 방식은 벗어나야 합니다 (···) 대학의 자율성은 사교육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쪽으로 맞춰져야 합니다.


어린 학생들을 일제고사 성적에 따라 줄을 세우고, 공교육이 암기 위주의 시험을 뼈대로 하고 있고, 입시 강박증이 아이들을 짓누르고 있는데 어떻게 ‘창의력과 폭넓은 사고력, 예술적인 감수성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실제로 나는 2008년 3월부터 두 학기 동안 수도권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보았다. 그들은 대학에 갓 입학한 젊은이들로서 수능 점수를 따진다면 보통 수준일 것이다. 내가 놀란 것은 100명쯤 되는 학생 중에 중·고등학교 시절에 편지를 써본 사람이 대여섯 명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대학에 들어와서 보고서(리포트)를 작성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학생들을 한 학기 15주(30시간) 동안 가르치고 나니 열 명 중 아홉 명 이상이 일기, 짧은 수필, 편지 같은 것을 제대로 쓰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한 마디로 중·고등학교에서 글쓰기는 물론이고 말하기도 전혀 가르치지 않은 셈이다.


근래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는 영어 열풍은 어린이들을 ‘문화적 미아’로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 나라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나이에 교사가 ‘쇼핑’이라고 하면 ‘아니에요, 샤핑이 맞아요’라면서 깔깔 웃어대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엄마가 ‘너 오렌지 줄까?’ 하고 물으면 ‘아니, 아륀쥐 줘요’라고 고쳐 말하는 아이들 머릿속에서는 어떤 생각이 자랄까? 우리말보다 영어를 훨씬 많이 공부하다 보면 어린 시절부터 ‘미국이 최고’라는 생각이 굳어질 것이다. 그야말로 문화적 사대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길러내는 일 아닌가.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면 영어를 포함해서 미국의 문화를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판단력이 제대로 서지 않은 어린이들에게 그 나라 말만을 가르치는 것은 문화적 주체성을 뿌리부터 잘라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교육에서 배워야 할 것들


그렇다면 미국의 문화, 특히 교육과 관련해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미국의 의무교육은 12년으로, 초등교육 6년, 중고등고육 6년이다. 공립학교는 1만6,000여 개의 학군이 있고 사립은 그보다 훨씬 적은 1,000여 개다. 사립학교는 국가의 보조 없이 자체적으로  운영한다. ‘명문 사립고등학교’에 다니려면 한 해 3만~4만 달러가 들어가니 우리나라 돈으로는 한 달에 375만 원(환율을 1,500 대 1로 계산)에서 500만원 가량이 되는 셈이다.


미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려면 SAT(Scholastic Aptitude Test), ACT(American College Testing), AP(Advanced Placement) 중 하나를 선택해서 치러야 한다. SAT는 한국의 수학능력시험과 비슷하지만 영어와 수학 시험만을 치른다. ACT는 한 해에 대여섯 번 응시할 수 있는데, 여러 과목별로 시험을 보아야 한다. AP는 대학과정을 가목별로 고등학교 때 미리 공부하는 것으로서 일정한 점수를 넘으면 대학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AP와 비슷한 제도가 한국에는 없다.

 

  이 나라 공교육에서 인문계와 실업계 구분이 없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반드시 대학에 가지 않아도 자기만 열심히 하면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나라,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이미지다. 2007년 8월 우리나라에서 학벌위조가 문제 되었을 때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 학벌 위조 파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왠지 낯 뜨거워지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학벌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는 사회 분위기, 또 하나는 거짓이 너무 쉽게 통용되는 우리의 허술함 때문이다. (<미국, 명백한 운명인가, 독선과 착각인가>, 231쪽)


미국에도 일부 학부모와 학생들 사이에 ‘아이비 리그 열풍’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처럼 고위 공직자나 대학 교수가 되려는 사람들이 ‘아이비리그 학교’를 나왔다고 졸업장을 위조한 사실이 드러나면 그의 인생과 전문직 경력은 그날로 끝나고 만다.


그런데 학벌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에서 정작 심각한 것은 졸업률이 60퍼센트 미만인 고등학교가 10퍼센트를 넘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다수 학생이 적어도 고등학교만은 졸업하는 현상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는 특정의 소수 대학들을 빼면, 다수 대학은 2년제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를 포함해서 입학하기가 수월한 편이지만 졸업하기가 쉽지 않다. 고등학교 때보다 공부의 강도가 높고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2008년 10월 국내 언론매체들에 보도된 재미동포 김승기씨의 컬럼비아대 박사학위논문 ‘한인 명문대생 연구’에 그런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하버드, 예일, 코넬, 컬럼비아 등 미국 14 개 명문대에 입학한 한인 학생 1,400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중퇴율이 44퍼센트나 되었다고 한다. 유태인(12.5퍼센트), 인도인(21.5퍼센트), 중국인(25퍼센트)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 왜 그럴까?


이 논문은 “학부모들의 지나친 입시 위주 교육방식이 한인 학생들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게 하는 주된 이유이며, 이것이 학교생활과 미국사회 진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학생들은 “중학생만 돼도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나 학원에서 보낸다. 그런 환경 탓에 한국 학생들은 자율이 보장되는 대학생활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인물로 성장하기보다 남보다 뛰어난 학생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어렵사리 미국 명문대에 들어간  한국 고등학교 졸업생들은 군대처럼 일상생활을 통제 당하던 버릇 때문에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곳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고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뒤쳐져서 학업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보고 아이비리그 중 한 대학의 입학처장은 “학문적으로 성공한 학생보다는 늘 행복한 학생을 뽑았을 때 커뮤니티 자체가 행복한 캠퍼스로 바뀐다”고 말했다. 요즈음 우리나라 고등학생들 중 진실로 ‘행복한 학생’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교육 부문에서 미국에서 배울 점들은 많다. 가난한 학생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정부가 최대한으로 지원을 한다든지, 중고등학교에 가족지원부서가 있어 과외 지도가 어려운 학생들에게 방과 후 수업이나 특기 교육 학습비를 보태주는 것이 그렇다. 특히 교사들이 어린이들을 자상하게 보살피는 태도는 우리나라가 배워야 할 점이다. 방과 후 학교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 귀가할 때까지 교사가 지켜보거나 조금만 아파도 부모가 데려가도록 연락해서 다 나아야 등교하게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제 나라 글쓰기’부터 바로 해야


앞에 썼듯이 대학에서 1학년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한국이 미국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제 나라 글을 제대로 쓰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어서 실행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미국의 대다수 대학은 입학시험에서 ‘에세이’를 요구한다.  단순한 논문이나 수필이 아니라 응시생이 살아온 과정, 특히 어려움을 극복해내던 때의 의지와 정신적 성장, 지역사회에서 또는 국제적으로 봉사한 경험, 창의력을 개발하려고 노력한 사실 등을 스스로 써내는 것이다. 우선 글을 논리적으로 써야 하지만 내용도 중요하다. 요즈음 우리나라 주요 대학들이 그나마 치르던 논술조차 줄여나가고 있는 현상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미국의 대학들은 에세이를 잘 쓸 능력이 없으면 수학능력이 모자라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남이 써준 에세이로 합격한 학생은 대학 수업과정에서 그 사실이 드러나서 자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요즈음 고등학교를  서열화하고  특목고 출신을 우대했다는 의심을 받는 대학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교육계 전체가 아래와 같은 사실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대학 입시는 우리와 많이 다르다. 성적 자체만으로 평가하자면 내신과 SAT가 중요하다. 그중 내신은 ‘성장세’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 1학년에 D를 받았지만 2학년에 B를 받고 3학년에 A를 받을 수 있는 학생, 그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이 말은 곧 아이의 성적 자체보다 얼마나 발전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노력하고 공부했는지,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본다는 뜻이다. (앞의 책, 273쪽)


버락 오바마는 미국 교육제도의 장점을 잘 활용해서 공부한 사람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흑인의 정체성’ 에 관해 고민하면서 술, 담배, 마리화나에 빠졌던 오바마는 어머니의 자상한 배려 덕분에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옥시덴털 칼리지로 진학한다.


  LA 남부에 불규칙하게 퍼져 있는 흑인 빈민가에서는 멀리 떨어진 전원풍의, 나무가 무성한 캠퍼스다. 오바마는 흑인 학생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그들 중 많은 학생은 빈민가 출신이이었는데 자신들이 자란 모래투성이의 위험한 거리에서 벗어난 것을 즐거워했다. (<버락 오바마의 삶>, 119쪽)


  그는 옥시덴탈이 만들어 준 틀과, 자신이 영향 받기 쉽다고 생각한 나쁜 습관과 방종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하고 컬럼비아로 옮겼다. 동시에 그는 LA교외의 불규칙한 확장 지구에서 벗어나 ‘진정한 도시의 중심부’에서 흑인 이웃들과 살아보고 싶었다.

  (·····)

  오바마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바와 여자를 좋아하는 명랑한 룸메이트의 밤거리 진출을 거절한 채 공부에 집중했다. “지겨운 녀석이 돼 가고 있구나”라고 룸메이트가 말했다. 오바마는 하루에 약 4.5 킬로를 달리고, 일요일에는 금식을 했으며 성실히 기록을 남겼다. 그가 말하기에는 ‘매일의 성찰과 아주 형편없는 시’였지만, 또한 10년 후 그가 회고록을 쓸 때 자료로 쓰게 될 글들을 쓰기 시작했으므로, 그 말이 사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같은 책, 131쪽)


우리는 여기서 오바마가 정신적 방황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날마다 자신을 성찰하는 글을 쓰고 건강을 위해 운동과 식생활에 정신을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수업이 없거나 공부를 하지 않을 때는 걸어서 도시 여기저기를 탐색했다. 그리고 실직자와 버림받은 자들의 무리, 노숙자들이 피난처로 사용하는 쥐와 강도가 들끓는 주택, 마약 거래상들이 구걸하는, 눈부신 도시의 ‘콧노래’ 밑에 숨겨진 것을 보았다.”


창의력과 사고력을 기른 오바마의 ‘자기 학습’


오바마는 컬럼비아대에 다니면서 단순히 지식 위주로 공부를 하지 않고 사고력과 창의력을 높이면서, 뉴욕 맨해튼의 ‘막장 인생’을 보고 듣는 산 교육을 스스로 한 것이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로 가서 ‘친구들이 비웃을 만한’ 연봉 1만 달러, 자동차 구입 보조금 2,000 달러의 인권운동단체에 취업한 것은 바로 그런 자기 교육의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연방 상원의원 시절 오바마는 교육에 관한 정부의 정책과 조치들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개혁의 방향을 제시했다.


  (···) 정부는 지난 20년 가까이 쇄신과 개혁 언저리에서 맴돌며 어설픈 시도를 벌이다 평범한 성과에 만족하고 말았다. 이런 결과는 부분적으로 새로운 발상을 하지 못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이념 대립에서 비롯된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펼친다. 학업 성취도를 끌어 올리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고, 공립학교의 여러 문제점은 불운한 관료 조직과 비타협적인 노동조합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더 많은 재정을 투입해야만 교육성과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가능하지도 않은 현상 고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학업 성취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혁이 어떤 것인지 찾아내 필요한 자금을 투입하되, 성과가 없는 개혁은 폐기하는 것이다. (<담대한 희망>, 235~6쪽)


이런 교육관을 가진 오바마 대통령은 낙제 학생 방지법, 영유아 조기교육, 모든 아동들을 위한 유아원 신설, 자녀 및 부양가족 경비에 대한 세제 혜택, 교사 채용과 양성 제도의 개선 같은 정책들을 실행에 옮기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7.5. 권력-재벌-언론의 ‘합중국’으로 가려는 한국

2009년 봄기운이 돌기도 전에 우리나라 국회는 한나라당이 언론 관련법을 기습적으로 상정하려는 ‘작전’을 시작함으로써 태풍에 휩싸인 듯했다. 2월 25일 오후 한나라당 소속인 고흥길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문방위) 위원장이 전체회의에서 방송 관련 법안 22건을 ‘일괄 상정한다’고 소리치자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법 위반’이라고 거세게 항의하면서 그를 향해 몸을 던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민주당은 문방위 위원장이 “국회법에 정한 의사일정 변경 절차를 밟지 않았고, 의안이 사전이 아니라 사후에 배포됐으며, 상정된 의안에 미디어법이라는 법안이 없으므로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상정 무효’를 선언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해가 되던 날이었다.
 

방송법 개정, 왜 그토록 집착할까?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은 “정권이 언론악법을 상정한 만큼 전면 제작거부를 포함해 지난 연말보다 더욱 강도 높은 파업 투쟁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26일 MBC를 시작으로 SBS와 YTN을 비롯한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사의 노동조합들이 파업을 벌임으로써 2008년 12월 하순에 한나라당의 ‘일시 후퇴’로 멈춘 언론계의 총력투쟁이 재개되었다.


언론노조 최상재 위원장은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언론 장악 7대 악법’의 핵심적인 내용은 재벌과 조선, 중앙, 동아일보(조중동) 족벌신문들에게 모든 방송을 넘겨주겠다는 것”이자 “신문 지원기관들을 통폐합해서 군소 신문과 지역신문의 생사여탈권을 정부의 손아귀에 틀어쥐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인터넷에서 자신들을 비판하는 네티즌들을 가혹하게 처벌해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뜻”이라면서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주인인 국민들에게는 단 한 번 의견도 묻지 않고 재벌과 조중동 족벌신문에 넘길 수는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언론계와 야당, 시민단체들의 ‘반미디어법’ 투쟁이 격렬해지자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3월 2일 민주당 정세균 대표를 만나서 방송법과 신문법, 인터넷티브이(IPTV)법, 정보통신망법 등 언론 관련 4개 법안들을 6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100일 휴전’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석 달 열흘 뒤에, 한나라당이 만든 언론법안들을 두고 야당이 아무리 부분적인 손질을 하려고 해도 정부·여당과 재벌, 조중동이 신문과 방송 겸영을 바탕으로 ‘권력-자본-언론의 공생체제’를 구축하려고 하는 기도를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약 그들의 뜻대로 법안들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한국의 언론은 교육보다 한 발짝 더 빨리 벼랑에 다가설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일간지 시장에서 강력한 주도권을 잡고 있는 조중동은 왜 언론법 체계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는 일에 그렇게도 집착할까? 앞에 인용한 언론노조 위원장의 말에 그들의 의도가 요약되어 있지만, 더 상세하게 알아보기로 하자.


이명박 정부는 방송 관련 법들을 개정하면 2조9,000억원의 생산유발 효과가 나오고  2만1,000개의 일자리 창출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작 자본을 투자해야 할 기업들은 ‘현재 방송산업 자체가 포화상태여서 쉽게 수익을 낼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방송채널사용 사업자(PP)들에 대한 투자를 허용하고 있지만 아직 수준이 높거나 상품성이 강한 콘텐츠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자본을 가진 기업들이 유선 또는 위성 방송에 투자할 리는 없으므로 그런 데서 생산유발 효과와 고용 창출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설령 그들이 언론사업에 진출할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소수 재벌이나 조중동 같은 족벌언론처럼 지상파 또는 종합편성이 가능한 케이블 텔레비전 쪽에 뛰어들어 경쟁을 할 수가 없다. 그 기업들이 가진 자본과 힘이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MBC 같은 회사를 완전히 민영화 해서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한다 해도 가뜩이나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 그 방송사가 전문직을 다수 고용해서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함으로써 일시에 수익성을 높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방송 관련 법안들은 다른 데 목적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나라당 언론법 ‘밀어붙이기’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정병국 의원은 2009년 2월 3일 한국방송학회가 주최한 ‘방송법 개정안 대토론회’에서 “방송법 개정안을 경제 살리기 법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론 다양성이 첫 번째이고 일자리 창출 등 산업적 효과는 부수적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여론 다양성’이라 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2009년 3월 한국사회의 여론이 다양하지 않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여론은 다양함을 넘어 ‘백가쟁명’의 수준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급속히 ‘체제 옹호’ 성향을 보이고 있는 KBS, 본래 보수 일변도로 달려온 조중동, 그리고 일부 보수적 군소매체들을 빼면 일간지와 지상파부터 인터넷 매체들에서까지 다양한 정보와 의견들이 펼쳐지고 있다. 검찰이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구속한 뒤 네티즌들 중 일부가 움츠러들기는 했지만 여론의 다양성과 치열함은 예전 그대로이다. 이것은 1987년 6월항쟁 이래 나날이 커져온 언론자유의 열매이다. 그리고 보수세력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탄식하던 시기에 그 자유는 더욱 신장되었다. 그들에게는 이 언론자유가 불편할 것이다.


조중동은 여러 해 전부터 일간지 시장의 70퍼센트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세 신문이 지상파를 하나씩 갖거나 뉴스와 일반 콘텐츠를 종합편성할 수 있는 케이블 텔레비전을 거느리게 된다면 신문과 방송 겸영을 통해 한국사회의 여론을 더 다양하게 만들 수 있을까?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오히려 훨씬 강화된 복합매체의 위력으로 여론을 정권과 보수세력에 유리하게 이끄는 쪽으로 나가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론의 다양화가 아니라 단일화를 기도하리라는 뜻이다.


베를루스코니와 이탈리아의 정치적 후진성


정치권력이 언론을 장악하면 국정 운영과 사회 풍토가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나라는 이탈리아이다. 그 나라의 현직 총리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  )는 정치인이면서 이탈리아 최대의 재벌을 거느린 기업인으로서 은행과 언론매체들, 그리고 프로축구단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1978년에 피니베스트라는 미디어 그룹을 설립했는데, 이 업체는 현재 미디어와 금융을 함께 경영하고 있다. 3개의 전국 아날로그 텔레비전 채널, 다양한 디지털 텔레비전 채널들과 여러 개의 시사잡지들을 포함하면 그가 거느린 매체들은 이탈리아 미디어시장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그 나라의 실질적 통치자가 언론재벌의 총수라는 사실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프로축구단인 AC 밀란의 구단주인 동시에 이탈리아의 대은행과 보험회사 그룹의 공동소유주이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강하게 추진하고 있는 금산분리 완화를 일찌감치 몸소 보여준 ‘선구자’이다. 금융과 산업의 분리를 완화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금산통합을 이루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2008년에 선정한 ‘이탈리아의 제3위 부자’가 되었다. 개인 자산은 무려 94억 달러나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패한 정치인이자 기업인이라는 평을 듣던 그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막강한 권력과 거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을까?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그 권력과 부의 최대 원천은 언론이었다. 그는 1994년에 전진이탈리아당을 창당한 뒤 다른 정당들과 연합해서 제2차 대전 뒤 이탈리아 최초의 우파 정권을 세웠으나 연정의  붕괴로 7개월만에 물러난다. 그는 1998년에 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마피아 지원’ 혐의로 불구속기소 되지만, 2001년 5월의 총선거에서 우파연합이 승리함으로써 다시 총리직에 오른다. 그러나 그가 소유한 AC 밀란이 연루된 승부 조작 사건이 여론을 악화시키는 바람에 2006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다시 총리 자리를 떠난다. ‘놀랍게도’ 그는 2008년 4월 총선에서 우파연합의 압승으로 세 번째로 총리직을 차지한다.


그는 정치권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리고 그 뒤에도 위증, 뇌물 공여, 불법 정치자금 제공, 분식 회계, 공무원 매수, 세금 포탈, 횡령 등 온갖 위법행위로 사법처리 대상이 되곤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파탄에 빠졌어야 마땅한 ‘이력’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텔레비전 시청자의 절반 가까이를 잡고 있는 3개의 전국 채널과 그 나라 1위의 광고·홍보회사, 최대의 출판사를 거느리고 있는 그는 여론 재판을 유유히 벗어나서 재기를 거듭할 수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국영방송인 RAI가 자신을 강하게 비판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내면 ‘총리로서’ 방송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는 경제선진국이라는 이탈리아의 언론자유를 세계 77위라고 평가한 바 있다.


총리이자 기업인이자 언론재벌인 베를루스코니의 행태가 빚어낸 이탈리아의 정치적 후진성은 2009년 한국사회에서 권력과 재벌과 보수언론의 노골적인 결합이 이루어지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는지 걱정하게 하는 교훈이 되기에 충분하다.


‘미디어의 황제’ 루퍼트 머독의 언론 독과점


‘세계 미디어의 황제’라고 불리는 루퍼트 머독(Keith Rupert Murdoch, 1931~   )은 베를루스코니와는 다른 면에서, 언론을 돈벌이 수단으로 최대한 이용하고 때에 따라 정치권력과 유착한 인물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아델라이드라는 도시에서 신문을 창간하면서 언론사업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회사인 ‘뉴스 코포레이션’을 영국, 미국, 아시아의 미디어시장으로 진출시키면서 ‘미디어 제국’ 건설의 기초를 닦는다. 2008년 <포브스>의 ‘세계 400대 부자’에 따르면 머독은 83억 달러의 재산을 가진 세계 109위의 자산가이다. 베를루스코니보다 재산은 조금 적지만 언론재벌로서의 영향력은 세계적으로 더 강력하다.


머독은 1981년에 영국의 <더 타임스>와 자매지인 <선데이 타임스>를 인수하면서 세계의 언론인들을 놀라게 한다. 영국에서 역사와 귄위를 자랑하던  신문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머독의 매체들은 영국의 보수당 소속 총리인 마가렛 대처를 지지하다가 나중에는 노동당 당수인 토니 블레어 쪽으로 돌아선다. 머독과 블레어의 유착과 비밀 회합들은 영국에서 정치적 쟁점이 된다. 머독이 계산에 따라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오갔기 때문이다.


머독은 1973년에 미국의 미디어 업계에 진출한 뒤, 미국 시민만이 텔레비전 방송국을 소유하도록 규정한 그 나라 법에 따라 미국으로 귀화한다. 1996년에 머독은 24시간 케이블 뉴스 방송인 <폭스 뉴스 채널>을 설립하고, 당시 최대이던 CNN의 점유율을 꾸준히 잠식해서 마침내 ‘케이블 뉴스 채널 1위’라고 선언한다.


머독이 전세계에서 소유한 175 개 신문들은 2003년에 미국이 이란을 침공했을 때 전쟁을 지지하는 사설들을 쓴다. 그런 까닭 때문인지 부시 1세 대통령은 폭스 뉴스만을 본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머독 소유의 일간지 <뉴욕 포스트>는 2000년에 힐러리 클린턴의 뉴욕주 상원의원 출마에 반대했는데, 머독 자신은 2006년 5월 힐러리 상원의원의 정치자금 모으기를 주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2007년 8월 그는 미국 최대의 경제신문 <월스트리트 저널>을 소유하고 있는 ‘다우 존스’를 인수한다. 영국의 <더 타임스>부터 <월스트리트 저널>까지 세계 유수의 신문들과 주요 방송사들이 그의 손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언론을 돈벌이와 재산 불리기에 철저히 이용하면서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유착관계를 맺는 머독의 행각은 오직 ‘자유언론’의 대의에 봉사하려는 세계의 언론인들에게는 매우 혐오스러울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2009년 3월 초 이명박 대통령이 오스트레일리아를 국빈방문하고 있던 때 <오마이뉴스> 6일자에 이색적인 기사가 실렸다. ‘MB연설 수십 분간 박수가 안 나온 이유’라는 제목의 그 기사는 한국 교민들이 벌인 ‘이명박 규탄 시위’에서 나온 이슈를 이렇게 소개한다.


  첫째, 미디어법 개정을 반대한다. 호주에서도 미디어재벌 루퍼트 머독에 의해서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만 국민 여론으로 막아냈다. 한국의 미디어법 개정은 규제 완화와 미디어산업 활성화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됐지만 결국 수구족벌신문의 방송 참여를 허용하는 방안일 뿐이다.


가시밭길 헤쳐 온 한국 언론의 앞길


우리나라 현대 언론사는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 민족공동체에 대한 봉사와 배신,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저항, 부도덕한 지배체제에 대한 굴종과 야합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1883년 9월 <한성순보>가 최초의 근대신문으로 창간된 이래 1898년 9월 <황성신문>이 첫 일간지로 선을 보임으로써 우리 겨레는 서구식 언론을 접하게 되었다. 그 뒤 한 세기 하고도 10여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에 얼마나 많은 언론인들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떨쳐버리려고 붓과 몸으로 싸웠고, 얼마나 많은 언론사 경영자들과 기자들이 외세에 아부하면서 영화를 누렸는지는 통계를 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920년 3월과 4월에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90년 가까이 언론의 그런 양면성을 대표해 왔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친일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를 배경으로 조진태, 민영기, 예종석 등이 주동이 되어 1919년 1월에 조선일보 조합을 결성하고 창간 준비를 서두르다가 1920년 3월 5일 ‘신문명 진보주의’를 사시로 내세우고 합병 후 첫 한국인 민간신문으로 제일 먼저 창간되었는데 총독부로서는 민족지를 자처하는 동아일보와 노골적으로 친일을 표방한 친일지의 발행을 허가할 필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하 민족언론사론>, 최민지 지음. 1978년 5월, 일월서각, 47~8쪽)

 *위의 책은 1970년대 초반에 <이대학보> 편집국장을 지낸 최옥자가 ‘최민지’라는 필명으로, 일제식민지시대의 ‘문화정치’와 언론기업,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의 보도 행태와 친일 행적을 당시 지면들을 상세히 검토하고 분석해서 쓴 것이다. 출간 당시부터 한국언론사 연구에 획기적으로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런데 동아, 조선과 또 하나의 일간지인 <시사신문>의 창간을 일제가 허용한 배경에는 1919년 3·1 독립운동의 기폭제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인들의 ‘지하언론’을 지상으로 노출시켜서 통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일견 조선일보와 시사신문은 일제의 식민정책을 지지하고 호응하고 있는 친일 매국세력에서 출원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발행허가는 당연하다 치더라도 민족지임을 자임하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제창하며 일제에서의 해방, 독립, 주권을 염원하는 민족의 대변지를 하겠다는 동아일보를 허가한 것은문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를 민족 독립운동의 기수로 독립운동을 하라고 허가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적어도 일제가 제창하는 식민정책에 부응하거나 일제의 조종에 놀아날 수 있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진 무리라고 판단하였거나 기업 이윤의 확보나 출세주의 때문에 일제에 저항하기보다는 타협할 것으로 판단되었거나, 충분히 일제의 한반도 경략에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 나머지 허가했음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사시가 대동소이함이 우연이 아님은 분명하다. (위의 책, 49쪽)


이런 판단은 동아가 창간된 뒤 몇 해 지나지도 않아서 드러낸 친일논조에서 그 정확함이 여실히 입증된다. 동아일보는 1924년 1월 2일부터 ‘민족적 경륜’이라는 사설을 연속으로 실었는데, ‘일본을 부인하는 무장항일 노선의 무모함을 지적하면서 일본의 주권 아래 법률이 허하는 범위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자치운동으로서의 전향을 제시한’ 부분이 독립운동가들은 물론이고 청년지식인들의 격분을 일으켰다. 그 대목은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 연속사설의 집필자는 춘원 이광수였다).


동아와 조선의 ‘친일 경쟁’


애초에 친일신문으로 출발한 조선일보는 1933년, 평북 정주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다가 금광에서 노다지를 캐내 일약 백만장자가 된 방응모의 손으로 넘어간다.


호남의 대지주로서 일찍이 방직업에 진출해서 성공한 산업자본가 집안의 맏형 격이자 보성전문(고려대학교의 전신) 교주인 김성수의 동아일보와 역시 대자본가인 방응모의 조선일보는 ‘민족지’라는 간판을 내던진 채 끝없이 상업적 경쟁을 하면서 전라도와 평안도의 갈등을 부추긴다.


그런데 두 신문이 일치하는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일제의 ‘조선통치’와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선동을 하고, 미영귀축(米英鬼畜)을 저주하는 점에서는 완전히 ‘하나의 신문’이 되었던 것이다.


1937년 7월 7일, 일제가 ‘지나사변’이라고 부른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쯤 지난 뒤 동아와 조선의 지면에는 일제의 침략군을 ‘아군’ 또는 ‘황군’이라고 부르는 기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일제가 압도적 승세를 굳혀가자 두 신문에는 일본의 죽은 천황과 산 천황에 대한 아부의 글이 넘쳐나고, ‘조선 청년들이 거룩한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사설들이 실린다.


  명치천황의 어성덕을 흠앙하는 3일의 명치절!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인 한울은 하늘까지도 이날을 축복하는 것 가탓다. (동아일보 1937년 11월 4일자 사설)


  지원병 제도의 실시는 조선민중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담시키는 제일보이다. (···) 남(南) 총독의 영단은 역대 총독이 상상도 하지 않던 병역의 의무를 조선민중에게 부담시키는 제일보···(동아일보 1938년 4월 3일자 사설)


  요컨대 금번 지원병 제도의 실시는 위정당국에서 상(上)으로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려(聖慮)를 봉체(奉體)하고 하(下)로 반도민중의 애국열성을 보아서 내선일체의 대정신으로 종래 조선민중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잇던 병역의무의 실현을 제일단계를 실현케 하는 것이다.(조선일보 1938년 6월 15일자 사설)


조선일보가 ‘성전 1년’을 맞이해서 1938년 7월 8일자 1면에 실은 기사에는 감격과 흥분이 넘친다. “국민감격의 긔념일 7월 7일을 마지하는 전반도는 도시와 농산어촌을 물론하고 (···) 물적 심적 총동원의 구든 각오를 가지고 호국의 영령에 밧치는 조의와 출정장병의 로고를 생각하는 의의 깁흔 온갖 행사를 거행하얏다.”


위의 사설과 기사를 보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다를 바가 거의 없다. 신문을 일제에 대한 아첨과 충성 서약으로 도배하던 동아와 조선이었지만, 조선총독부는 ‘대동아공영권 확립을 위한’ 언론통폐합 방침에 따라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킨다. 두 신문사는 강제폐간을 당하면서도 이렇게 읊조린다.


  이제 당국의 언론통제에 대한 대방침에 순응함에 따라 본보는 뒤를 보아 한됨이 없고 또 앞을 보아 미련됨이 없는 오늘을 마지하게 되엇으니···(동아일보 ‘폐간사’)


  지나사변 발발 이래 본보는 보도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엿고 더욱이 동아(시아) 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저···(조선일보 ‘폐간사’)


김성수와 방응모의 친일행위


그렇게 치욕스럽게 신문사 문을 닫은 뒤에도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는 조선 청년들에게  징병에 응하라는 글을 쓰거나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등 전쟁협력단체 임원으로 참여하고 ‘명사들의 각도 순회강연 강사’로 나간다.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는 조선이 폐간되자 잡지 <조광>을 독립시켜 친일논조를 펼치는가 하면, 일제 군대에 고사포를 기증하고 전쟁협력업체인 조선항공공업회사의 중역으로 일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사실들이 70년 가까이나 지난 요즈음에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극구 부인하는 창업주들의 ‘친일행위’이다.


2009년의 한국 언론을 이야기하면서 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식민지시대 행적을 자세히 되돌아보는가? 바로 그런 신문 제작과 사주들의 행태가 지금도 방식을 달리하면서 국민과 독자들을 기만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신문에서는 이승만 정권시절에 젊은 기자들이 독재를 비판하다가 고난을 당하기도 했고, 박정희의 5·16 쿠데타 뒤에는 한 동안 사주와 사원들이 군사정권의 불법성과 반민주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의 앞부분에 썼듯이, 1975년 3월 12일부터 동아일보사가 유신독재와 야합해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들을 대량 해직하고, 조선일보사 역시 같은 운동을 하던 기자 33명을 해임한 이래, 두 신문은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철저히 권력에 편에 서 있었다. 조선·동아보다 역사는 훨씬 짧지만 중앙일보도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조중동의 공통점들


이제는 대중에게 하도 많이 알려져서 익숙한 복합명사가 된 ‘조중동’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사주나 경영책임자가 아무리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일을 저질러도 자기 신문을 통해 국민과 독자들에게 진상을 제대로 알리거나 사과하는 일이 결코 없다는 점이다.


김대중 정부의 국세청은 1999년 6월 말 보광그룹에 대한 세무조사를 시작한 뒤 홍석현 중앙일보사 사장을 특가법상 조세 포탈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다. 그는 2000년 5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벌금 30억 원을 선고 받는다. 이어 2005년 6월에는 동아일보사의 김병관 명예회장이 법인세와 증여세 등 43억6,000만원을 포탈하고 회사자금 16억 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30억 원을 확정 판결 받는다. 그 다음으로 2006년 6월에는 조선일보사의 방상훈 전 사장이 조세 포탈과 횡령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과 벌금 25억 원이라는 2심 선고에 대해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는다.


이들의 형량과 벌금은 대체로 비슷한데, 사회적 통념으로 따지면 ‘죄질’이 아주 ‘불량’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길지 않은 옥살이를 마치고 보석으로 풀려난다. 사건 당시 조중동은 각기 ‘정권 차원의 언론 탄압’이라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의 판결을 받고 나서도 그렇게 우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1·2심과 최종심에서 탈세 또는 횡령이 명백하게 드러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기 회사의 실질적 사주가 파렴치한 행위로 법의 심판을 받아도 지면에 보도를 하지 않거나 못하던 언론인들이 정작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에 대해서는 세세한 부분까지 들추어내면서 비판했으니 국민들이 ‘형평성을 잃은 보도와 논평’이라고 꾸짖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창업주에서 세습되는 부도덕성


조중동의 문제는 실질적 사주들의 부도덕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선대’인 창업자와 그 후계자들이 저지른 공개적 친일행위, 고위관리로서 지은 중죄 같은 것을 아예 없는 일로 만들려고 하거나 감싸 안으려고 하는 것이 조중동의 일관적인 태도이다. 이것은 민족의 역사를 바로 기록해서 후손들에게 알리는 데 아주 크고 높은 장애물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신문 자체의 종사자들을 ‘공동의 사실 왜곡자’로 만들어버린다. 앞에 말한 동아일보 김성수와 조선일보 방응모의 친일행위를 끝없이 덮거나 부인하는 행태가 바로 그것이다. 중앙일보의 경우, 창업자인 이병철이 삼성 회장이던 1966년에 터진 ‘한국비료 밀수사건’ 때 그 회사 기자들은 물론이고 외부의 ‘전문가들’까지 동원해서 ‘재벌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변호하려고 들었던 사실이 언론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008년 봄에 김용철 변호사가 천주교 사제단과 함께 ‘삼성그룹의 비리’를 폭로했을 때 중앙일보는 물론이고 조선과 동아도 ‘삼성을 감싸는’ 보도와 논평을 주로 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우리는 조중동에서 선대의 부도덕하거나 위법적인 공적 행위가 후대로 ‘상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을  아들이나 손자가 시인하고 ‘우리 대에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될텐데 후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문의 체면이나 언론사의 상업적 목적 때문에 선대의 잘못을 감추거나 변명하는 것은 길게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1960년의 4월혁명 때 내무부장관으로서 ‘발포명령’에 책임이 있다고 해서 법원에서 극형을 선고 받은 중앙일보 초기 경영자 홍진기와 삼성의 이병철이 사돈으로서 그 신문을 키워오면서 권력과 재벌의 유착을 꾀했다는 사실은  ‘금기’처럼 되어 있다고 알려졌다.


동아일보사의 창업자가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면, 그의 아들과 손자와 증손자는 그것을 당당히 인정하고 ‘우리는 그 아픈 역사를 교훈 삼아 공정하고 자유로운 신문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면 그것으로 끝이 될 것이다. 조선일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조중동이 신문과 방송을 겸영하게 되면


창업자들이 기본적으로 그런 역사를 지닌 조중동이 지금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위해 한나라당의 언론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하는 일에  ‘올인’하다시피 하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가뜩이나 여론시장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세 언론사의 영향력은 공룡처럼 커질 것이다.


미국의 주류 언론에도 문제는 많지만, 그 악영향이 조중동처럼 심각하지는 않다.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보스턴 글로브, 월스트리트 저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같은 대신문들의 사주나 최고경영자가 한국 돈으로 30억 원이나 되는 탈세 또는 횡령을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을 독자들이 너그럽게 보아준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려고 했다면 신문사가 문을 닫을 정도로 강력한 비판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 글의 앞에서 보기로 든 부시 2세 정부 때의 ‘엔론 회계부정’ 사건을 주류 언론이 모른 척했다면 여론이 그 회사들에 대해  ‘자격 정지’를 선고하지 않았겠는가.

정치와 관련해서 한국의 신문들이 미국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특히 조중동은 대통령선거 철만 되면 자기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기사와 논평으로 강력하게 지원하면서도 공론화 하려는 노력은 아예 하지 않았다. 미국의 신문들과 정기간행물들은 선거일이 다가오면 어느 후보를 지지한다는 공식 견해를 사설이나 사고를 통해 밝힌다. 2008년 11월 대선에서 오바마를 지지한 일간신문은 뉴욕 타임스, 보스턴 글로브, 워싱턴 포스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시카고 트리뷴을 포함해서 296개, 주간지는 111개였다. 일간지들의 발행부수를 합치면 3,000만 부가 넘었다. 이에 비해 매케인을 지지한 일간신문은 뉴욕 포스트, 보스턴 헤럴드를 비롯한 180개, 주간지는 32개였고, 일간지 발행부수 총계는 1,200만 부에 가까웠다.


언론이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와 근거를 당당히 밝히면 독자들의 선택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은 물론이다.


                                                      

글쓴이 / 김종철
· 전 동아일보사 기자
·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 전 연합뉴스 대표이사 사장
· 현 재능대학교 초빙교수
· 평론으로 <상업주의소설론> 등, 저서로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1922)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1995), 역서로 <말콤 엑스>(공역,1978) <산업혁명사><프랑스혁명사>(1982) <인도의 발견> 등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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