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실용을 강조한 실학자였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학문이나 철학을 연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큰 학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행해야 할 윤리적 책임을 먼저 완수하고 난 뒤에야 학문도 있고 철학도 있지, 현실에서 동떨어진 이론과 논리만으로의 학문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자주 말했습니다. 때문에 다산은 공자(孔子)이래의 유교에서 역점을 두는 효제(孝弟)에 대한 철저한 실천으로부터 학문은 시작되고, 학문의 바탕은 바로 효제에 있다는 것을 거듭 주장했습니다.
“근세의 학자들은 겨우 학문한다는 이름만 얻게 되면 곧바로 거만해지고 도도해진다. 천(天)이니, 이(理)니, 음(陰)이니, 양(陽)이라 지껄여대며, 벽에다가 태극팔괘(太極八卦)와 하도낙서(河圖洛書) 등을 그려 붙이고는 자칭 완미(玩味)하고 탐색(探索)한다고 하면서 어리석은 일반인들을 속여먹는다. 그렇지만 그의 부모는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며, 병들어 죽음에 이르러도 태연히 돌봐주지도 않으며, 아예 습관이 되어 애써서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완미하고 탐색하면 할수록 학문과는 더욱 멀어지는 꼴이 된다. 진실로 부모에게 효도만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비록 학문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나는 반드시 학문을 한 사람이라고 말하겠다.”(諭谷山鄕校勸孝文)
200년 전 다산의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경고해주는 말과 같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부모를 돌보지 않는 사람들, 권력을 쥐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부모를 잊고 사는 사람들, 출세를 위해서 부모나 형제도 돌아보지 않는 요즘 사람들, 다산의 이야기에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학문이 높고 철학이 깊어 일세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라도 부모형제를 팽개치고 혼자만 잘 되었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튼튼한 윤리의식을 지녀 인간의 기본적인 행동에 충실한 이후에 돈과 권력이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고는 실용적일 수 없다는 뜻이어서 우리들의 마음을 울려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다산은 부모형제에게 의리를 배반한 어떤 사람과도 친구로 사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제 부모형제에게도 잘하지 못한 사람이, 친구인 남에게 잘한다는 것은 반드시 위선이 개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말은 쉽지만 행하기 어려운 효제, 우선 필자 자신부터 되새겨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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