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세계문화유산(59)/ 베트남/ 후에(順化) 기념물 집중 지대

문근영 2015. 3. 31. 02:19

세계문화유산(59)/ 베트남

 

후에(順化) 기념물 집중 지대(Complex of Hué Monuments; 1993)

 

 

<후에 성>

 

 

 

 

 

 

 

 

 

 

<민망 황제릉>

 

 

 

 

 

 

 

 

<티에우찌 황제릉>

 

 

 

 

 

 

 

 

<뜨득 황제릉>

 

 

 

 

 

 

 

 

<카이딘 황제릉>

 

 

 

 

 

 

 

 

<티엔무 사원>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도시 후에(順化) 시는 투아티엔후에 성[Thua Thien–Hue Province]의 성도(省都)이다. 1802년 통일된 베트남의 수도로 건설된 지역으로 정치적 중심지 역할 뿐 아니라 종교, 문화적 중심지의 역할도 하였다. 뛰어난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흐엉 강(香江)이 남북을 가르는 베트남 중부의 도시 후에는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阮王朝)의 수도였다. 후에는 1802년부터 1945년까지 140여 년간 응우옌 왕조의 정치, 문화적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199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후에는 문화유산으로 가득 찬 차분한 분위기의 역사적인 도시이며, 한편으로는 베트남 전쟁의 참화가 깊이 새겨진 곳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이 지역은 미군의 집중적인 폭격으로 1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적극적인 복구 작업이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폐허인 곳이 많다.

  후에에 남겨진 응우옌 왕조의 문화유산에는 프랑스 식민 지배의 아픔도 서려 있다. 1802년 응우옌푹아인(阮福映; 가륭제)은 프랑스의 협력을 얻어 응우옌 왕조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외세를 이용해 세운 왕조이기 때문에 이후 여러 나라의 국정 간섭에 시달렸고, 결국 1883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병원, 역, 학교 등 도시 곳곳에 유럽 양식의 근대적인 건물들은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다. 후에의 가장 큰 볼거리는 응우옌 왕조의 13대에 걸친 황제들이 잠든 황릉과 사원이다.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은 궁정을 능가하는 화려한 능을 제작했고, 민망 황제(明命皇帝)처럼 생전에 황제가 직접 설계에 참여한 것도 있다. 이런 경향은 내세를 중시하는 힌두교 문화권 참파 왕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건축 양식은 중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통일된 양식보다는 각 능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각 황제의 성격과 취향, 생전의 권력을 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름다운 무덤; 규모나 아름다움에 있어 가장 유명한 곳은 2대 민망 황제와 4대 뜨득 황제의 능이다. 민망 황제릉은 1841년부터 3년에 걸쳐 완공한 것으로 중국식 건축 양식을 사용했다. 뜨득 황제릉은 황제 재위 기간인 1864년부터 3년간 건축되었는데 황제 생전에는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뜨득 황제의 통치 기간은 농민 봉기와 프랑스 식민지화로 어려움이 많은 시기였으나 황제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다. 능에는 1백 여 명의 후궁을 거느린 뜨득 황제가 유흥을 벌였다는 연못과 정자가 남아 있다. 그 밖에 소박한 3대 티에우찌 황제릉(紹治皇帝陵)과 다소 규모가 작은 9대 동카인 황제릉(同慶皇帝陵), 서양 고딕 양식의 성당과 비슷한 카이딘 황제릉(啓定皇帝陵) 등이 주요 볼거리이다. 황제릉 외에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사원이 있다. 흐엉 강 언덕에 있는 티엔무 사원[Thien Mu pagoda]은 21m 높이의 7층 8각탑과 시내까지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범종이 유명하다. 흐엉 강 절벽에 있는 사원 혼쩬전[Dien Hon Chen]은 참족의 신, 포나가르를 모셨던 절로 알려져 있다. 황릉과 사원은 도시 남쪽에 집중되어 있으며 관광객들은 보트나 오토바이, 택시 등을 이용해 관람할 수 있다. 도심에는 후에 성, 깃발 탑, 정오의 문 등 구엔 왕조가 남긴 다양한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응우옌 왕조[阮王朝, Nguyen dynasty]; 베트남 최후의 왕조(1802∼1945). 창건자는 응우옌푹아인(阮福映)으로 여왕조(黎王朝)를 멸망시킨 떠이선당(西山黨)의 내분을 틈타 국내를 통일하고 황제가 되었다. 재위 중의 연호를 따서 가륭제(嘉隆帝)라고도 부르며, 세조(世祖)라는 시호를 사용하였다. 세조 가륭제는 국호를 베트남(越南)이라 정하고, 여왕조의 구제(舊制)를 존중하면서 새 질서의 건설에 힘썼으나 2대 임금 성조 명명제(聖祖 明命帝; 1820∼41)는 이를 일소하고 청(淸)나라 제도를 채택함과 동시에 유교사상에 입각한 중앙 집권적 관료제(官僚制)를 확립,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갖는 전제 군주국가를 이룩하고, 국호도 다이남(大南)으로 고쳤다. 그 뒤를 이은 헌조 소치제(憲祖 紹治帝)·익종 사덕제(翼宗 嗣德帝)도 성조의 정치를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그리스도교의 탄압과 양이 정책(攘夷政策) 때문에 프랑스의 침략이 노골화되었다. 1858년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1862년 체결한 제1차 사이공 조약으로 프랑스령 식민지가 되는 단서가 되었다. 그 후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에 따라 남부 6개 성(省)을 프랑스에 식민지로 할양하였고, 1883년 및 1884년 후에(順化) 조약으로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宗主權) 문제로 청-프랑스 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베트남은 청나라의 보호를 벗어나 1887년 성립된 '프랑스령(領) 인도차이나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령 시대의 베트남은 3개의 지역으로 분할되어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는데 응우옌 왕조는 그 중 안남(安南)의 왕조 정부(王朝政府)로서 존속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 1945년 베트남 독립 동맹[베트민]의 8월 혁명 때 제13대 바오다이제(保大帝)의 퇴위 선언으로 완전히 몰락하였다.

  민망 황제릉[明命皇帝陵, Tomb of Minh Mang]; 후에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대략 12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1820년에서 1840년까지 통치한 민망 황제의 무덤으로 가장 웅장한 흙무덤으로도 알려져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아름다운 인공 호수가 눈에 들어오며, 황제의 공덕비가 세워진 정자 아래쪽에는 다양한 문무석 및 동물 모양의 석상들이 늘어서 있다. 무덤은 태양을 상징하는 원형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소나무 등 주변의 자연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다. 민망 황제의 퇴위 직후인 1841년부터 1843년까지 3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흐엉 강(香江)의 서쪽 기슭에 있기 때문에 예전에는 배를 타야만 갈 수 있었으나 현재는 다리가 완성되어서 육로로도 방문이 가능하다.

  뜨득 황제릉[嗣德皇帝陵, Tu Duc's tomb]; 후에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뜨득 황제는 응우옌 왕조 13명의 황제들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35년(1848~1883)을 통치하였다. 이 능은 민망 황제릉과 함께 후에에서 가장 아름답고 장대한 능으로 꼽힌다. 뜨득 황제는 자신의 능을 화려하고 정교하게 직접 설계했으며, 1864~1867년까지 만3년에 걸쳐 3,000여 명의 인원을 투입해 완성한 뒤, 이곳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50명의 요리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50종류의 요리를 50명의 하인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하였다는 이야기나 연못 위의 연꽃잎에 밤새 맺힌 이슬을 모아 차를 마셨다는 이야기, 100명이 넘는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내용 등으로 그의 화려했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영내에 들어서면 우선 연꽃이 가득한 연못에 작은 섬과 정자가 그림같이 위치한 모습이 인상적이며, 궁으로 쓰였던 겸궁(謙宮) 내부에서는 멋지게 건설된 여러 건물들과 함께 각종 유물들이 놓여 있어 흥미롭다. 황제의 무덤은 겸궁의 북쪽에 거대한 비석과 반달 모양의 연못을 지나서 위치해 있는데 뜨득 황제는 실제로 이곳에 묻히지는 않았으며 진짜 무덤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장소에 있다는 설이 유력하다.

  티엔무 사원[Thien Mu Pagoda]; 후에 시내에서 흐엉 강(香江)을 따라 남서쪽으로 4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1601년에 건립되었으며 7층 석탑으로 유명하다. 그 입구에는 19세기에 세워진 8각 7층 석탑이 있는데 높이가 21m가 넘는 이 탑은 후에에서 뿐만 아니라 베트남을 대표하는 건축물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탑의 각 단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탑의 양 옆으로는 두 개의 정자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는 큰 거북의 등 위에 세워진 비석이, 다른 하나에는 2톤이 넘는 거대한 종이 자리 잡고 있다. 본당인 다이훈 사(靈姥寺)에는 청동 불상이 있고, 인근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독재 정권에 항의하며 사이공에서 분신자살한 스님이 타고 갔던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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