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영 신(국어문화운동본부 이사장)
나는 올해도 우리가 건성으로 한글날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한글이 세계 최고 글자라는 자랑을 되뇌면서 스스로 도취되어 이 날을 보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올해 한글날이 예년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광화문 광장에 세종의 동상을 앉히고, 그 밑에 ‘세종 이야기’라는 공간을 만들어 세종과 한글에 관한 볼거리를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 밖에도 한글박물관을 짓자는 논의가 민간과 정부 양측에서 나온 것도 하나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진전이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올해 우리가 한글날을 건성으로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로, 많은 언론이 올해 한글날을 ‘563돌 한글날’이라고 표현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한겨레를 비롯한 신문 매체, 문화방송과 서울방송 같은 텔레비전 매체, 노컷뉴스와 뉴시스 같은 인터넷매체 등 헤아릴 수 없는 언론 매체들이 그렇게 표현했다. 한나라당도 “한글날 563돌에 즈음해” 라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했다. 이는 한글날이 563년 전부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엉터리가 되는 것이다. 또 많은 매체는 ‘한글 창제 563돌 한글날’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한글날이 한글 창제(1443년)를 기념하는 날인지 반포(1446년)를 기념하는 날인지 모르고 한 말이다. 한글날을 제정하여 기념한 것이 무려 80년 가까이 되었는데 언론과 국민은 한글날을 표현하는 방법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건성으로 한글날을 지냈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지난 10월 9일에 기념한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훈민정음 반포 8회갑(480년)이 되는 1926년에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기 위해서 ‘가갸날’을 정한 것이 오늘의 한글날의 효시이므로 이때부터 시작한다면 올해는 83돌 한글날이 되는 셈이다(중간에 8년 동안 기념식을 열지 못했으므로 이 기간을 빼면 더 줄어들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 일부 매체는 ‘훈민정음 반포 제563돌, 한글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그냥 ‘2009년 한글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글과 우리말(국어)을 구별해야
둘째로, 많은 언론과 국민이 ‘한글’과 우리말을 구별하지 못하고 한글날을 기념했다. 민주노동당은 한글날에 “겨레의 얼과 민중의 넋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한글은 세계적인 언어이며,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문화의 꽃이다.”라는 논평을 냈다. 어떻게 한글이 세계적인 언어인가? 또 한글과 우리말을 구별하지 못한 사설 한 구절을 소개한다. “한글의 우수성은 외국인들도 인정하는 바다. (중략) 그럼에도 정작 모국에서는 한글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특히 인터넷과 휴대전화 사용이 일상화한 젊은 세대들은 생경하고 저급한 신조어를 남발하고 있어 한글 파괴가 위험 수준에 달한 지 오래다.(매일경제 사설, 한글날 부끄럽게 하는 한글 파괴)” 젊은 세대들이 생경하고 저급한 신조어를 남발하는 것이 어떻게 ‘한글 파괴’가 된다는 말인지. 또 어떤 기자는 “순수 한글 기업명을 고집해오며 남다른 한글 사랑을 실천하는 식품 업체들이 최근 불황기에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려 주목된다.(헤럴드경제, 한글 이름 식품업체 소비자 사랑에 실적 ‘쑥~쑥’)”라고 했다. ‘순수 한글 기업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글 이름 식품 업체’는 어떤 이름인지 궁금하다. 이 기자는 우리말로 만든 상호를 ‘한글 이름 상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식품 업체들은 한글 상호를 쓴 것이 아니라 우리말(토박이말인지 한자어인지는 모르겠으나)로 된 상호를 쓴 것일 뿐이다.
한글날만 되면 신문과 방송이 외국어, 비속어, 외계어 등의 남용을 고발하는데 이들도 대체로 한글과 우리말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전국의 만 15세 이상~60세 미만 국민 총 1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42%가 ‘한글’과 ‘국어’가 같은 말이라고 답한 반면에 다른 말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26%, 잘 모르겠다는 응답자가 32%였다니 우리에게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글날을 기념하기 전에 한글과 우리말(국어)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춰야 건성 한글날을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한글의 우수성을 더욱 높이려는 노력을!
셋째로, 한글날이면 으레 한글 예찬을 침이 마르도록 해 왔다. 외국인의 입을 빌려서도 하고,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한글 예찬으로 신이 난다. 물론 우리는 한글에 자부심을 느끼고 세계에 얼마든지 자랑해도 된다. 그러나 언제나 자랑에 그치고 마는 것이 불만이다. 만일 한글이 세종의 창작품이 아니고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써 오던 글자라면 우리는 한글의 어떤 점을 자랑하게 될까. 만일 한글의 제자 원리를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다면? 내가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은 그렇게 과학적이고 훌륭한 글자를 가진 한국인이 글자 생활을 하는 데 몹시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92%가 맞춤법을 제대로 몰라서 한글을 정확하게 쓰기 어렵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한글이 가장 우수한 글자라고 자랑하면서도 정작 그 한글로 정확하게 글을 쓸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 애써 눈감고 정부나 학자들이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팔을 걷어붙이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올해도 우리가 한글날을 건성으로 기념하고 지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식을 자랑만 하면 자식의 단점이 보이지 않는다. 자식의 단점을 보지 못하면 자식을 훌륭한 사람으로 기르기 어렵다. 만일 지금처럼 해마다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하면서 정작 우리가 한글을 사용하면서 느끼는 불편을 해소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한글의 기능에 대한 불만이 차츰 쌓여서 한글을 기피하는 현상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영문 알파벳을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도 이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발 건성으로 한글날을 지내지 말고 한글의 우수성을 더욱 높이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는 소중한 날로 활용하게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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