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에 10대 소년으로 만났던 우리, 40년을 살다가 1999년에 조태일 시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금년으로 그가 타계한 지 10년이 되어, 지난주에 우리는 그의 고향이자 그의 「시문학기념관」이 있는 전남 곡성의 태안사에서 문학제를 열어 그를 추모하고 그의 시를 낭송하면서 그를 만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같은 반에서 만나면서 시작된 우리의 만남, 그야말로 죽마고우이자 막역한 친구사이였습니다.
「국토」라는 제목의 연작시를 발표하여 독재타도의 유장한 저항시를 읊조리던 그, 「국토」가 시집으로 묶어 나오자 곧바로 판금의 딱지를 받아 공개적으로 팔지도 못했던 시집, 그 책의 저자 조태일 시인은 두 차례나 감옥에 갇히는 불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60년대 말에는 「시인」이라는 시 전문지를 발행하며 김지하·김준태 등의 저명 시인들을 발굴해냈지만, 오래지 않아 폐간의 운명을 맞았고, 70년대 후반에는 「시인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저의 역서인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서간 모음)와 『애절양』(다산시선집)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시인사는 독재시대에 문인들이 모이던 사랑방이었습니다. 「不愛君憂國非詩也」(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라는 여덟자의 액자가 시인사의 벽에는 언제나 걸려 있었습니다. 조시인 자신이 서툴게나마 쓴 친필글씨였지만, 그 의미가 너무나 깊어서 모두가 읽으면서 외우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구절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한 구절로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시에 관한 내용입니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며, 잘함은 미화해주고 잘못은 비판해주며 착함은 권장하고 악함은 징계해주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不傷時憤俗 非詩也 非有美刺勸懲之義非詩也).”라는 말이 곧바로 이어지는 편지여서 모두가 즐겨 읽던 구절입니다.
죽형 조태일시인의 『식칼론』·『국토』·『가거도』 등의 시집에 실린 저항시의 대부분은 다산의 시론을 전적으로 수용한 내용임에 분명합니다. 민중시이자 저항시이던 시만 읊은 것이 아니라 몸으로 독재에 항거하던 강골의 시인이었기에, 그는 비록 59세의 나이로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시는 살아서 10주년의 기일을 맞는 때에 시집 2권과 문집 2권으로 된 4권의 문학전집까지 간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민족문학사에 영원히 살아남을 시인으로 자리매김 되었음에 분명합니다.
다산의 시를 그렇게 좋아했고, 다산의 글을 탐독했던 조태일, 그는 갔지만 그가 옳게 살았기 때문에 다산의 실학사상과 함께 그의 시는 영원히 살아서 노래로 불러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운 친구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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