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다산과 황상

문근영 2018. 12. 9. 00:22

다산과 황상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만남을 갖는다.

한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만남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강진 유배 시절 제자인 황상(黃裳, 1788-1863?)이다.


63세 나던 1851년 3월 30 밤,

황상은 이미 15년 전에 돌아가신 스승 다산을 꿈에서 만난다.

스승의 앞에는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절을 올려 애도하며 곡성이 진동하였다.

옆 사람이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으나,

눈물이 얼굴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잠에서 깬 뒤 그는 그 일을 시로 적었다.

제목은 〈몽곡(夢哭)〉이다.


간밤에 선생님 꿈꾸었는데

나비되어 예전 모습 모시었다네.

마음이 기쁜 줄은 알지 못했고

보통 때 모시던 것 다름없었지.


수염 터럭 어느새 하얗게 쇠고

얼굴도 꽃다운 모습 시들어.

눈썹은 눈 덮인 봉우리인 양

천길 높은 소나무가 기울어진 듯.

천행으로 이런 날 은혜롭구나

백년에 다시 만날 기약 어렵다.

(중략)

옆 사람 흔들어 깨우는 통에

품은 정 다하지 못하였어라.

애도함 이보다 더는 못하리

아마도 세상이 끝난 듯 했지.


목이 메어 말조차 떼지 못하고

헛된 눈물 주룩주룩 흘러내렸네.

꿈에 곡함 아침에 누가 알리오

모습은 내 눈에 여태 선한데.

시 지어도 누구에게 평을 청하며

의심나도 여쭙던 일 생각만 나리.


추모함에 한가한 날 적기만 했고

영전에선 내 충성됨 환하였었지.

지난 날 향 사르던 자리에서는

백척의 오동처럼 우러렀다네.

못나고 둔한지라 얻은 게 없어

못 이룸이 삼대 속의 쑥대 같았네.

선생의 문도라기 이름 부끄러

소와 양에 뿔조차 없는 격일세.

한 마음 순수하긴 처음과 같아

잠자리서 전날 공부 펼쳐본 것을.


스승을 그리워하는 제자의 붉은 마음이 생생히 느껴지는 글이다.

그가 처음 다산을 만난 것은 그의 나이 15세 나던 1802년 10월이었다.

당시 다산은 천주학쟁이로 몰려, 강진으로 귀양 와 있었다.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겁이 나서 문을 꽁꽁 닫아걸고 그를 받아 주려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어 그는 동네 주막집의 방 한 칸을 빌려 기식하고 있었다.


황상은 서울에서 온 훌륭한 선생님이 아전의 아이들 몇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서 주막집을 찾았다. 그렇게 며칠을 내쳐 찾아가 쭈빗쭈빗 엉거주춤 글을 배웠다.

7일 째 되던 날 다산은 황상에게 글 한편을 써 주었다.

이 글은 다산의 문집에는 없고, 황상의 문집에만 실려 있다.


내가 황상에게 문사(文史)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는 쭈빗쭈빗 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가 있다.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한 것이 문제다.

둘째로 글 짓는 것이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게 병통이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친 것이 폐단이다.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하게 된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찌 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당시 나는 동천여사(東泉旅舍)에 머물고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지만 선생님! 저는 머리도 나쁘고, 앞뒤가 꼭 막혔고, 분별력도 모자랍니다.

저도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잔뜩 주눅이 든 소년에게 선생은 기를 북돋워준다.


“그럼 할 수 있고말고.

항상 문제는 제가 민첩하다고 생각하고, 총명하다고 생각하는데서 생긴단다.

한번만 보면 척척 외우는 아이들은 그 뜻을 깊이 음미할 줄 모르니 금세 잊고 말지. 제목만 주면 글을 지어내는 사람들은 똑똑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저도 모르게 경박하고 들뜨게 되는 것이 문제다.

한마디만 던져주면 금세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곱씹지 않으므로 깊이가 없지.

너처럼 둔한 아이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얼마나 대단하겠니?

둔한 끝으로 구멍을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서는 막히지 않는 큰 구멍이 뚫릴게다. 꼭 막혔다가 뻥 뚫리면 아무런 거칠 것이 없겠지.

미욱한 것을 닦고 또 닦으면 마침내 그 광채가 눈부시게 될 것이야.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되겠니?

첫째도 부지런함이요, 둘째도 부지런함이며, 셋째도 부지런함이 있을 뿐이다.

너는 평생 ‘부지런함’이란 글자를 결코 잊지 않도록 해라.

어떻게 하면 부지런할 수 있을까?

네 마음을 다잡아서 딴 데로 달아나지 않도록 꼭 붙들어 매야지.

그렇게 할 수 있겠니?”


황상은 스승의 이 가르침을 평생을 두고 잊지 않았다.

스승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그리고 스승을 처음 만난 지 61년이 지난 임술년에 그 떨리던 첫 만남을 기억하며

〈임술기(壬戌記)〉란 한 편의 글을 지었다.

다산의 윗글도 이 글 속에 들어 있다.


윗글에 이어지는 황상의 술회다.


내가 이때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당시는 어려서 관례도 치르지 않았었다.

스승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감히 잃을까 염려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1년 동안 독서를 폐하고 쟁기를 잡고 있을 때에도

마음에 늘 품고 있었다.

지금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글 속에서 노닐고 있다.

비록 이룩한 것은 없다 하나,

구멍을 뚫고 막힌 것을 툭 터지게 함을 삼가 지켰다고 말할만 하니,

또한 능히 마음을 확고히 다잡으라는 세 글자를 받들어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나이가 일흔 다섯이 넘었으니 주어진 날이 많지 않다.

어찌 제멋대로 내달려 도를 어지럽힐 수 있으랴.

지금 이후로도 스승께서 주신 가르침을 잃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고,

자식들에게도 져버림이 없이 행하게 할 것이다. 이에 임술기를 적는다.


스승의 가르침을 들은 소년은 그로부터 61년의 세월이 지난 76세의 나이가 되도록 스승이 남겨주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자나깨나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노라고 지금 눈물겹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따뜻한 가르침은 이렇듯 깊고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한번은 황상이 다산에게 숨어사는 이의 거처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때도 다산은 제자를 위해 긴 글을 써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은자(隱者)의 공간을 그려보여 주었다.

〈제황상유인첩(題黃裳幽人帖)〉이 그 글이다.

워낙 길어, 부분만 여기에 옮긴다.


땅을 고를 때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강과 산이 어우러진 곳은 시내와 산이 어우러진 곳만은 못하다.

골짜기 입구에는 깎아지른 절벽에 기우뚱한 바위가 있어야겠지.

조금 들어가면 시계가 환하게 열리면서 눈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이런 곳이라야 복지(福地)다.

중앙에 지세가 맺힌 곳에 띠집 서너 칸을 나침반이 정남향을 가리키도록 해서 짓는다.

치장은 지극히 정교하게 해야 한다.

순창에서 나는 설화지로 벽을 바르고,

문설주 위에는 엷은 먹으로 옆으로 길게 뻗은 산수화를 붙이도록 해라.

문설주에는 고목이나 대나무 또는 바위를 그리고, 중간에 짧은 시를 써넣기도 해야지.

방안에는 서가 두 개를 설치하고, 서가에는 천 삼사백 권의 책을 꽂도록 한다. (중략)


책상 아래에는 오동(烏銅) 향로를 하나 놓아두고,

아침저녁으로 옥유향(玉ꤒ香)을 하나씩 피운다.

뜰 앞엔 울림벽을 한 줄 두르는데, 높이는 몇 자 남짓이면 된다.

담장 안에는 석류와 치자, 목련 등 갖가지 화분을 각기 품격을 갖추어 놓아둔다.

국화는 가장 많이 갖추어서 48종정도는 되어야 잘 갖추었다 할만하다.


마당 오른편엔 작은 연못을 파야겠지. 사방 수십 걸음 정도면 된다.

연못 속에는 연꽃 수십 포기를 심고, 붕어를 길러야지.

대나무를 따로 쪼개 물받이 홈통을 만들어 산의 샘물을 끌어다가 못에다 댄다.

물이 넘치면 담장 틈새를 따라 채마밭으로 흐르게 한다.(중략)


소나무 북쪽으로 작은 사립문이 나 있는데,

이리로 들어가면 누에치는 잠실 세 칸이 나온다.

잠박을 7층으로 안쳐놓고 매일 낮 차를 마시고 난 뒤 잠실 속으로 들어간다.

아내에게 송엽주 몇 잔을 내오게 해서 마신 뒤,

양잠에 관한 책을 가지고 가서 누에를 목욕시키고 실 잣는 법을 아내에게 가르쳐 주면

상긋이 서로 보며 웃는다.

문밖에 임금이 부른다는 글이 이르더라도 씩 웃으며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귀양지에서 다산이 매일 밤마다 꿈꾸었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황상은 스승이 내려주신 이 말씀을 또 잊지 않고 간직하다가

강진 대구면의 천개산(天蓋山) 아래 백적동(白磧洞)에 은자의 거처를 마련한다.

만년에 스승의 말씀을 따라 일속산방(一粟山房)을 지은 뒤엔

또 스승 생각이 나서 시를 지었다.


몇 해 전 두릉(斗陵)에서 밤비 오던 때

집 짓겠단 내 생각 알고 놀라셨었지.

구름 노을 가려도 즐거움 그지없고

여린 대와 짙은 꽃들 기이함을 잊게 하네.

그 옛날〈장취원기(將就園記)〉받자옵고는

일속산방 제목으로 시 지었었네.

아아! 도의 싹이 난만하게 터나왔건만

거두어서 전해 드릴 길이 없구나.


〈장취원기〉는 명말의 황주성(黃周星)이란 이가 지은 글로

자신이 꿈꾸던 상상 속의 정원을 그려 보인 유명한 문장이다.

옛날 다산이 황상에게 황주성의〈장취원기〉를 읽어주자,

그는 자신도 이렇게 살고 싶다고 스승께 아뢰었던 것이고,

그 꿈을 시로 지어 올리자 다산은 앞서 본〈제황상유인첩〉을 지어주며

숨어사는 선비의 바른 마음가짐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일속산방(一粟山房)이란 말 그대로 좁쌀 한 톨만한 작은 집이란 뜻이다.

시에서는 두릉, 즉 양수리 초천으로 스승을 찾아뵙던 일을 먼저 말했다.

시의 둘째 구절 아래 황상은 “내가 일속산방을 짓겠다는 뜻을 아뢰자,

선생은 놀라시며 ‘자네가 어찌 내 마음을 말하는가?’라고 하셨다”고

작은 글씨로 주를 달아 놓았다.

구름과 안개 노을이 포근히 덮어 가려주고,

가는 대나무 숲과 향기 짙은 꽃들이 푸르름과 향기를 실어주는 곳.

그 옛날 스승께서 일깨워주신 그 가르침에 따라 이곳에 은자의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 속에서 책 읽고 글 쓰며 얻은 깨달음을 여쭙고 싶지만

들어주실 스승은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니 그것을 안타까워했다.


다산은 강진에서 19년에 걸친 긴 귀양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1818년 8월 그믐날, 다산은 강진을 떠나면서 제자들과의 작별이 못내 아쉬워

다신계(茶信契)를 결성했다.

그후로도 제자들은 해마다 힘을 합쳐 차를 따서 서울에 계신 스승에게 부쳐드리곤 했다. 하지만 스승을 잃은 다산초당은 점차 황폐해져 갔던 듯 하다.


황상은 스승의 체취가 못 견디게 그리우면 문득 다산초당을 찾아 한참을 머물다 가곤했다. 이미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초당의 옛터를 서성이며 쓴 시를 보면

스승이 손수 파서 새긴 정석(丁石)이란 두 글자를 어루만지다가,

스승이 일군 대숲과 연못을 보며 지난 날의 맑은 풍정을 그리워했다.

그러면서 스승이 계시던 옛터를 백년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서글퍼 했다.


그러던 그가 다산이 강진을 떠난 지 18년 되던 1836년 2월에 무슨 느낌이 있었던 지

스승이 계시던 두릉 땅으로 다산을 찾아뵈었다.

스승 내외의 회혼례(回婚禮)를 축하드리고,

살아 계실 때 한번만이라도 얼굴을 뵙자는 생각이었다.

이때 다산은 병세가 위중해서 잔치를 치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15세에 처음 만났던 제자는 50을 눈 앞에 둔 중늙은이가 되어

죽음을 눈 앞에 둔 스승 앞에 절을 올렸다.

곁에서 며칠을 머물며 옛날이야기를 나누다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아뢰었을 때,

다산은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그의 마디 굵은 손을 붙들고서 작별을 아쉬워했다.

그냥 보내기 안타깝다며 접부채와 운서(韻書), 피리와 먹을 또 선물로 주었다.

스승과 제자가 헤어지는 장면은 그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그렇게 헤어진 뒤 며칠이 안 되어 다산은 세상을 떴다.

황상은 도중에 스승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그길로 되돌아와 스승의 영전에 곡을 하고, 상복을 입은 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45년 3월 15일에 황상은 다시 스승의 10주기를 맞아 두릉을 찾았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丁學淵)은 10년만에 기별도 없이 불쑥 나타난 황상을 보고

신을 거꾸로 신고 마당으로 뛰어내려왔다.

이제 그는 60을 눈 앞에 둔 늙은이였다.

꼬박 18일을 걸어서 스승의 묘 앞에 섰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부르튼 발을 보고

아들은 아버지 제자의 손을 붙들고 감격해 울었다.

그의 손에는 그 옛날 스승이 주었던 부채가 들려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그립고, 제자의 두터운 뜻이 고마워서,

늙어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부채 위에 시를 써 주었다.

그리고는 정씨와 황씨 두 집안 간에 계를 맺어,

이제로터 자손대대로 오늘의 이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할 것을 다짐했다.

〈정황계안(丁黃契案)〉황상의 문집에 실려 있다.

황상과 정학연, 정학유 형제의 아들과 손자의 이름과 자, 생년월일을 차례로 적은 뒤에

끝에다 이렇게 썼다.


이것은 우리 두 집안 노인의 성명과 자손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정학연은 침침한 눈으로 천리 먼 길에 써서 보낸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대대로 신의를 맺고 우의를 다져갈진저.

계를 맺은 문서를 제군들에게 돌리노니 삼가 잃어버리지 말라.


이 해가 1848년이니 정학연은 66세, 황상은 61세였다.

그 옛날 더벅머리 소년에게 던져준, 오로지 부지런하면 된다던

스승의 따스한 가르침은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 정민, 〈삶을 바꾼 만남-정약용과 강진시절 제자 황상〉,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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