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와 황상(黃裳)
황상(黃裳, 1788-1863?)은 다산이 가장 아꼈던 강진 시절의 제자다. 두 사람은 유배 초기 동문 밖 주막집에서 열었던 서당의 강학에서 처음 만났다. 황상은 이때 15세의 소년이었다. 이후 다산이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그는 스승의 손과 발이 되어 부지런히 배우고 익혔다. 다산이 그에게 쏟았던 사랑과 그의 눈물겹도록 진솔한 성정은 이미 여러 차례 다른 지면을 통해 발표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황상이 초의에게 써준 차 관련 시문을 통해 두 사람의 교유와 차문화사의 알려지지 않은 한 부분을 정리하고자 한다.
추사와 황상
황상이 주막집 서당에 나온 지 며칠 지나 다산은 황상에게 이른바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을 글로 적어 주며 그를 분발시켰다. 1802년의 일이다. 황상은 다산의 글에 감격하여 죽을 때까지 스승의 가르침만 생각하며 이를 실천하며 살았다. 다산은 1804년 4월, 황상이 학질을 앓으면서도 끝내 눕지 않고 책을 초서(鈔書)하는 것을 보고, 그 강인한 의지와 향학열에 감동해서 “훗날의 성취는 말할 것이 없으리니, 이 일 보매 나보다 한층 더 높겠구나.他年成就且休說, 卽事視我高一層”라고 칭찬하며 「절학가(截瘧歌)」 즉 ‘학질 끊는 노래’를 지어주었으리만치 그를 아꼈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丁學淵)이 아버지를 찾아와 고성암(高聲菴)에 머물 때 함께 두륜산 유람을 따라나섰던 것도 황상이었다.
다산이 거처를 초당으로 옮기면서, 황상은 부친상을 당하고 이후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 등으로 인해 초당의 강학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백적산(白積山)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후 40년간 세상에 발을 들이지 않고 오로지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면서 땅을 일구며 살았다. 그러다가 1848년 제주의 유배지에서 황상의 시를 본 추사가 깜짝 놀라 그 시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의 존재는 다산이 세상을 뜬 지 십여 년 뒤인 60세 이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다음은 추사가 다산의 아들 정학연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제주에 있을 때 한 사람이 시 한 수를 보여주는데, 묻지 않고도 다산의 고제(高弟)임을 알겠더군요. 그래서 그 이름을 물었더니 황 아무개라고 합디다. 그 시를 음미해보니 두보를 골수로 삼고 한유(韓愈)를 골격으로 삼았더군요. 다산의 제자를 두루 꼽아 보더라도 이학래(李鶴來) 이하로 모두 이 사람에게 대적할 수 없습니다. 또 들으니 황 아무개는 비단 시문이 한당(漢唐)과 꼭 같을 뿐 아니라, 사람됨도 당세의 고사(高士)여서 비록 옛날 은일의 선비라 해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더군요. 뭍으로 나가 그를 찾았더니 상경했다고 하므로 구슬피 바라보며 돌아왔습니다.
在耽時, 有一人示一詩, 不問可知爲茶山高弟. 故問其名, 曰黃某. 味其詩, 卽杜髓而韓骨. 歷數茶山弟子, 自鶴也以下, 皆無以敵此人. 而且聞, 黃某非但詩文直逼漢唐, 其爲人可謂當世高士, 雖古之隱逸, 無以加此. 故出陸訪之, 則曰上京云. 故悵望而歸.
귀양에서 풀려 뭍에 오른 추사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바로 황상이었다. 이때 황상은 정학연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어긋나고 말았다. 이후 황상을 처음 만난 추사와 그의 동생 산천(山泉) 김명희(金命喜,1788-1857) 형제는 그의 시와 인간에 반해 다투어 황상의 시집에 서문을 써주었다. 또 아버지에 대한 독실한 마음에 감동한 정학연 형제가 그를 아껴 왕래하고 두 집안 사이에 정황계(丁黃契)까지 맺은 사연이 경향간에 알려지면서 황상은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다. 추사는 “장안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다만 우리 형제가 알아준다.(長安無知者, 惟吾兄弟知之)”고 하고, “지금 세상에 이런 작품은 없다.(今世無此作矣)”라 할 만큼 황상을 아꼈고, 그의 시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남기는 한편, 그를 위해 글씨도 여러 점을 써주었다.
초의와 황상의 만남
황상과 초의의 첫 만남은 언제 이루어졌을까? 초의가 다산을 처음 만난 것이 1809년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20대 초반에 다산초당에서 잠깐 한번 만났던 듯하다. 이후 황상이 초의를 다시 찾게 된 데는 추사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황상을 만난 추사는 그에게 초의에 대해 입이 마르게 칭찬했고, 차와 관련한 대화도 많이 오갔던 듯하다. 그 전후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최근 강진 쪽에서 나왔다. 「초의행(艸衣行) 병소서(幷小序)」이란 제목이 붙은 필사본 미정고(未定稿)로 황상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황상의 문집인 『치원유고(巵園遺稿)』에도 누락된 것으로, 두 사람의 만남과 이후의 경과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다.
이제 살펴 볼 「초의행」은 황상이 1849년 40여년 만에 대둔사 일지암으로 초의를 찾아가 재회한 후의 소감을 쓴 장시다. 조선 후기 차문화의 성지라 할 일지암에 대한 귀중한 정보가 담겨 있고, 추사의 대표작 「명선」과 관련된 언급도 있어 특히 주목을 요한다. 앞에 전후 사정을 적은 병서(幷序)가 있고, 이어 7언 26구 182자에 달하는 장시가 실려 있다. 전문을 싣는다.
내가 어려서 다산 선생께 학습하였다. 초의는 이때 옷을 잠시 □□(원문 1자결)하지 않았다. 참구하여 찾다가 선생님께 이르렀는데, 내가 한번 만나보고는 그만두고 돌아가 백적산 가야 들에서 밭을 갈며 자취를 감추고 빛을 숨긴지가 어언 40여 해가 된다. 혹 진주(陳州)에서 온 사람 중에 그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에 잊지 않았다. 금년 기유년(1849)에 열상(洌上)에서 돌아와 대둔사의 초암으로 초의를 찾아갔다. 눈처럼 흰 머리털과 주름진 살갗이었으나 처음 대하는 못 보던 사람 같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보니 과연 초의임에 틀림없었다. 추사 선생께서 주신 손수 쓴 글씨를 보기를 청했다. 「죽로지실(竹爐之室)」과 「명선(茗禪)」 같은 글씨의 필획은 양귀비나 조비연의 자태여서 자질이 둔한 부류가 감히 따져 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등불을 밝혀 놓고 새벽까지 얘기하다 뒷기약을 남기고서 돌아왔다. 「초의가」를 지어서 부쳐 보낸다.
余幼年學習於茶山夫子. 艸衣迺時衣姑未□也. 參尋而至夫子, 余一見而罷歸, 耕於白磧山伽倻野, 晦跡韜光, 已四十餘春秋矣. 或逢陳州來人, 得於髣髴者, 不忘于中. 今年己酉, 自洌上還, 訪艸衣於大屯之草菴. 雪髮皺皮, 乃無始來未覩之人也. 聽其言跡其行, 果艸衣無疑也. 丐見秋史先生所贈手墨, 竹爐茗禪之畵, 玉環飛燕之態, 非鈍根者流所敢規則也. 明燭至曙, 留期以歸. 作艸衣行而寄之.
一見草衣見所稀 초의를 한번 보곤 다시 보지 못했더니
不能棄置歌艸衣 버려 둘 수 없어서 「초의가」를 부르노라.
竹爐之室危如葉 죽로지실(竹爐之室) 위태롭기 나뭇잎과 한가지요
一片草戶不設扉 한 조각 얽은 문은 사립조차 안 달았네.
虎過庭心人去後 사람이 떠난 뒤에 범이 뜰을 지나가고
人度菴際虎亦歸 사람이 있을 때는 범 또한 돌아가네.
多蓄秋史先生筆 추사선생 글씨를 많이도 간직하니
蘭亭繭紙不敢輝 「난정서」 쓴 견지(繭紙)조차 감히 빛이 안 나누나.
陰陽體勢出字外 음양의 체세(體勢)가 글자 밖에 넘나거니
生走龍蛇動蛜蝛 용과 뱀이 꿈틀대고 벌레가 꾸물대듯.
若使東坡今在世 소동파가 만약에 지금 세상 살았다면
購之百金兼珠璣 백금과 보옥으로 이를 구입 하였으리.
十尋翠竹香滿戶 열길 되는 푸른 대가 문 가득 향기롭고
枝條入櫩故相依 처마에 든 가지는 서로 기대 의지하네.
處處多竹誰爲俗 여기저기 대밭이라 속되다 뉘 여기리
草衣之竹轉芳菲 초의의 대나무는 외려 향기로운 것을.
又有池畔花影亂 게다가 못가엔 꽃 그림자 어지러워
風微水紋紅欲肥 미풍에 물결 지면 붉은 꽃 피어날 듯.
魚不驚人自由在 고기는 겁이 없어 자유로이 노니나니
主人於此樂天機 주인은 이곳에서 천기(天機)를 즐기누나.
野客新到問所事 손님이 새로 와서 하는 일을 물어보면
但道看竹日無違 날마다 어김없이 대를 보며 지낸다고.
自疑著脚蓬萊洞 나도 몰래 봉래동에 들어왔나 의심하니
爛柯碁局想依俙 신선놀음 썩은 도끼 아득히 생각난다.
我有山房名一粟 내게도 일속(一粟)이란 이름의 산방 있어
唯有太古山長圍 태고 적 산 그늘이 길게 둘러 서있다네.
-일속산방에서 눈 오는 밤, 백적초부 치원 황상. 미정고.
一粟雪夜, 白磧樵夫 巵園 黃裳 未定稿.
이 작품은 황상이 1849년 겨울에 정학연 형제 및 추사 형제와 만나고 돌아와 지은 것이다. 이 시는 여러 면에서 뜻 깊은 정보들을 담고 있다.
첫째, 황상과 초의의 재회는 20대 초반 이후 40년 만이었다. 황상은 20대 초반에 다산초당으로 찾아온 초의를 한번 만난 적이 있고, 이후 무려 40여년 간 그를 보지 못했다. 1849년 황상은 서울 걸음을 한 길에 그곳에서 한동안 다산의 아들 정학연 형제와 추사 형제의 거처를 왕래하며 지냈다. 서울에서 초의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황상은 새삼 옛날 생각이 나서 고향에 내려온 후 40여년 만에 불쑥 대둔사 일지암으로 초의를 찾아갔던 것이다. 처음 마주 한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당시 초의가 64세, 황상은 62세였다.
둘째, 두 사람의 재회는 추사와의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 황상은 초의를 만난 후에 대뜸 추사의 글씨를 보여줄 것을 청한다. 초의가 추사의 글씨를 많이 소장하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상은 초의와 추사와의 왕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방문 목적 중의 하나가 추사의 글씨를 보기 위함이었다.
셋째, 황상의 요청에 초의가 꺼내 보여준 글씨는 「죽로지실(竹爐之室)」과 「명선(茗禪)」 외에 여러 점이었다. 황상은 그 글씨의 필획이 양귀비나 조비연의 자태인 듯 아름다워서 자신처럼 자질이 둔한 부류가 감히 따져 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어 시에서는, 선사가 추사의 글씨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데, 왕희지가 견지(繭紙)에 썼다는 「난정서(蘭亭序)」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했다. 음양의 체세가 글자 밖에 넘나서 용과 뱀이 꿈틀대고 벌레가 꾸물대는 듯하다고 적었다. 만약 소동파가 지금 세상에 살아 있었다면, 추사의 이 글씨를 백금과 보옥으로 맞바꾸었으리라고 칭찬했다. 이로써 여러 해 째 진안(眞贋) 시비에 휘말려 있는 「명선(茗禪)」이 추사가 초의에게 직접 써준 친필임을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넷째, 이 작품은 일지암의 뒷 시기 풍경을 상세하게 증언한다. 앞서 본 일지암 관련 글에서 1835년에 쓴 소치의 글이나 1839년에 쓴 진도 사람 속우당의 글보다 10년도 더 지난 뒤에 쓴 작품인 때문이다. 초의의 거처인 일지암이 추사가 지어준 이름인 죽로지실로 불렸고, 규모는 거의 허물어져 가기 직전의 초라한 띠집이었음이 확인된다. 풀잎을 얽어 만든 문은 시늉만 했을 뿐 사립의 형태를 갖춘 것도 아니었다. 문 앞에는 대숲이 향기롭고, 처마 밑에는 이런 저런 나뭇가지들이 얽혀 있었다. 못가엔 화단이 있어 꽃 그림자가 연못에 어리고, 못에는 물고기가 아무 걱정 없이 헤엄쳤다. 손님이 찾아와 온 종일 어찌 지내느냐고 물으면 초의는 대숲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낸다고 대답했다. 황상은 그런 모습을 보며 여기가 바로 봉래산 신선의 거처가 아니겠느냐고 선망했다.
교유와 걸명시(乞茗詩)
황상의 「초의행」을 받은 초의는 몹시 기뻐하며 답례로 위 시에 차운하여 「일속암가(一粟菴歌)」를 지어 주었다. 그 병서(幷序)의 뒷 부분에서 초의는 이렇게 적었다.
기유년(1849) 겨울에 나를 방문해서 옛날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 「초의행(艸衣行)」 한 수를 부쳐왔다. 그 운자를 써서 「일속산방가(一粟山房歌)」를 지어 사례한다. 己酉冬, 訪余敍舊, 旣歸以艸衣行一篇寄來. 用其韻, 作一粟山房歌以射.
이어 시에서는 일속산방의 태고연한 분위기를 상세히 묘사한 후, 끝에서 이렇게 시상을 맺었다.
雪窗閑題艸衣行 눈 오는 창 한가롭게 「초의행」을 지으니
雲情鶴態想依俙 구름 마음 학의 자태 어렴풋이 떠오르네.
新庄幽趣不言一 새 집의 깊은 운치 한 마디론 할 수 없어
只道太古山長圍 다만 겨우 태고적 산 집 둘러섬 말을 하네.
그러니까 본고에서 처음 공개하는 위 황상의 작품은 바로 초의가 자신의 시집에서 말한 그 「초의행」인 셈이다.
이렇게 서로의 거처를 두고 시를 나눈 이후, 두 사람의 왕래는 몹시 잦아졌던 듯하다. 다시 황상은 「초의사종죽(草衣師種竹) 병소서(幷小序)」란 장시를 지어 주었다. 예전 1833년에 초의가 지었던 「종죽(種竹)」시를 차운한 작품이었다. 앞서는 황상의 작품에 초의가 화답했다면, 이번에는 초의의 작품에 황상이 차운한 것이다. 워낙에 긴 작품이라 다 보일 수 없으므로, 끝의 몇 구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命兒進佳茗 아이 불러 좋은 차 내오게 하고
破戒開酒尊 파계하여 술동이를 열어 마셨지.
一分或醉醒 얼마간 취한 듯 술이 깨서는
赴感放小偈 느낌 따라 작은 게송 지어주었네.
賦得形與影 형상과 그림자를 그리어 내니
竹好人亦好 대도 좋고 사람도 너무 좋구나.
함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며 시를 주고 받는 두 사람의 정다운 모습이 이 대목만 보아도 눈에 그릴 듯 하다.
이후 황상은 초의에게 추사가 그랬던 것처럼 「걸명시(乞茗詩)」를 보내며 차를 청하고, 이런 저런 시문으로 자주 왕래하기에 이른다. 먼저 황상이 초의에게 보낸 「걸명시」를 살펴보자.
陸羽善茶但聞名 육우(陸羽)가 차 잘함은 이름만 들려오고
建安勝負獨傳聲 건안차(建安茶)의 승부는 소문만 전해지네.
乘雷拜水徒聒耳 승뢰(乘雷)니 배수(拜水)니 한갖 귀만 시끄러워
不如草師搴衆英 초의 스님 무리 중에 우뚝함만 못하도다.
竹葉同炒用新意 댓닢을 함께 볶아 새 방법을 사용하니
北苑以後集大成 북원(北院)의 이후로 집대성을 하였다네.
茗禪佳號學士贈 명선(茗禪)이란 좋은 이름 학사께서 주시었고
-추사가 명선(茗禪)이란 호를 주었다(秋史贈茗禪之號).
草衣茶名聽先生 초의차(草衣茶)란 그 이름을 선생에게 들었었지.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은 차를 잘하는 사람이다. 이를 일러 초의차라고 했다(酉山茶之善者, 謂之草衣茶).
我溪不及南零者 아계(我溪)가 남령(南零)에 미치진 못했어도
猶能可居箭泉下 오히려 전천(箭泉) 아래 능히 둘만 하였다네.
-석가여래가 태자였을 때, 백리고(百里鼓)를 세워놓고 살 한대를 쏘아 북 일곱 개를 꿰뚫었다. 살이 땅에 박히자 샘물이 솟아났다. 병든 사람이 마시면 모두 나았다. 전천이라고 이름했다(如來太子時, 竪百里鼓, 放一箭透七鼓, 箭入地, 泉水湧出, 病人飮則皆愈, 名箭泉.).
請君莫惜紫茸香魚眼松風 청하노니 자용향(紫茸香)과 어안송풍(魚眼松風) 아끼지 말고
塵肚俗腸三廻四廻瀉 티끌세상 찌든 속을 세 번 네 번 씻겨주소.
다성(茶聖) 육우(陸羽) 이래로 건안차(建安茶)에 얽힌 이야기와 승뢰(乘雷)와 배수(拜水) 등의 고사를 끌어와서, 초의차야 말로 역대 차의 온갖 우수한 점을 집대성한 최고의 차라고 높였다. 이 시 또한 우리 차문화사에서 여러 가지 주목할만한 중요한 언급을 남겼다.
첫째, 초의차의 제법에 관한 정보다. 5구에서 초의차가 댓잎을 찻잎과 함께 함께 덖는 새로운 방법을 쓰고 있다고 했다. 다른 어디서도 보지 못한 귀중한 언급으로, 초의가 댓잎과 찻잎을 함께 볶아 댓잎의 향이 찻잎에 스미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초의의 제다법 이해에 중요한 단서를 준다.
둘째, 7구의 주석에서 ‘명선(茗禪)’이 추사가 초의를 위해 지어준 호였음을 밝혔다. 앞서 「초의행」에서 황상은 추사가 초의에게 써준 「명선」을 직접 감상한 소감을 적었는데, 여기서는 이 명선(茗禪)이 다름 아닌 초의의 별호로 지어준 것임을 분명하게 언급했다. 이는 추사나 초의의 확인을 거쳐 나온 언급이다. 「명선」에 관한 황상의 두 차례에 걸친 언급은 이 작품이 추사의 진작일 수밖에 없는 분명한 증거다. 「명선」은 방제의 글씨에서 추사가 친절하게 밝힌 그대로 초의가 보내준 훌륭한 차를 받고 그 답례로 써준 것이다.
셋째, 초의가 만든 차는 다산의 아들 정학연이 아예 ‘초의차’란 명칭을 붙여줄 만큼 경향간에 이름이 높았다. 1830년 상경 당시 이미 초의는 자하에게 ‘전다박사(煎茶博士)’의 칭호를 받았고, 이후 추사의 걸명 편지 등으로 인해 초의차의 명성은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끝에 보이는 아계(我溪)와 남령(南零)은 모두 차 끓이기에 좋은 물로, 당나라 때 장우신(張又新)이 지은 『전다수기(煎茶水記)』등에 그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끝에 가서 황상은 자용향(紫茸香)과 어안송풍(魚眼松風), 즉 좋은 차를 아끼지 말고 베풀어 주어 티끌세상에서 찌든 속을 서너 번 깨끗하게 씻겨 달라고 부탁했다.
황상은 초의에게 보내는 여러 편의 시를 더 남겼는데, 다음에 볼 「기초의상인(寄艸衣上人)」또한 걸명시다.
比丘消息意 스님의 소식을 물어보는 뜻
劣疾所呻吟 힘없고 아파서 신음해서지.
何以能無此 어찌 해야 능히 이것 없게 해볼까
古稀却到今 고희가 문득 앞에 이르렀구려.
傳神茶倍力 차는 힘을 배가 시켜 정신 차리고
蘇病竹成陰 대나무 그늘 이뤄 병을 낫우리.
不遠由旬地 저승에 갈 날이 머지 않으니
自憐但送音 홀로 슬퍼 다만 소식 띄워본다네.
제 4구에서 고희가 가까웠다고 했으니, 이 작품은 아마도 1856년이나 1857년에 지은 작품인 듯하다. 두 사람의 교유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아파 힘이 없어 끙끙 앓다가 스님의 소식을 물어볼 생각을 했노라 했다. 어째서 스님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아픈 것을 낫게 해줄 사람이기 때문이다. 5구의 ‘차배력(茶倍力)’이 그 답이다. 차가 힘을 배가시켜주므로 차의 힘을 빌어야만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겠다는 말이다. 대나무 그늘이야 집 둘레에 있는 것이니 따로 청할 것이 못 된다.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말로 시를 맺었다. 요컨대는 아프고 힘들어 죽겠으니, 고희를 앞둔 늙은이가 힘을 낼 수 있도록 차를 좀 달라는 얘기인 셈이다.
「암중(菴中)」이란 작품에서 “한갓 능히 대나무를 심을 줄 알고, 차는 빠뜨릴 수가 없다네. 徒能栽得竹, 不可闕於茶”라 한 것을 보면 그 또한 만년에는 차에 인이 박여 하루도 차를 거르지 않는 차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두 사람의 문집에는 서로에게 지어준 시가 여러 수 있다. 『치원유고』에 수록된 초의가 황상에게 지어준 「차운봉간치원도인(次韻奉簡巵園道人)」등 같은 제목의 시 2수는 초의의 『일지암시고』에도 누락된 일시(逸詩)다.
이상 초의와 황상의 교유시와 걸명시를 통해 차문화사 상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새롭게 확인했다. 첫째, 댓잎을 함께 섞어 볶는 초의차의 새로운 제법을 알았다. 둘째 ‘명선’이 추사가 초의를 위해 지어준 별호임과, 적어도 1849년 당시까지 「명선」이 추사의 또 다른 대표작 「죽로지실」과 함께 일지암에 보관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셋째, 초의 만년의 일지암 주변 배치와 풍광을 새롭게 살폈다. 넷째, 황상 또한 차를 즐긴 안 알려진 차인이었음을 확인했다.
-정민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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