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판 『일한전도(日韓全圖)』를 펼쳐보면서
심 경 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1.
내게 1906년판 『일한전도』가 있다. 정식 제명은 『최근답사 일한전도(最近踏査日韓全圖)』로, ‘부(附) 화태전도 요동조차지상세도(樺太全圖遼東租借地詳細圖)’라고 부분도를 덧붙인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가로 107㎝, 세로 76.5㎝의 크기로, 전도의 축척은 180만분의 1이다. 발행자는 나카무라 요시마츠(中村由松), 발행소는 오사카(大阪) 쇼미도(鍾美堂) 서점, 편찬자는 쇼미도 편찬부다.
이 지도는 일본이 1904년 2월 8일에 뤼순 군항을 공격하여 러일전쟁을 일으킨 후 1905년 9월 5일에 러시아와 강화를 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고 만주(중국 동북지방)로 진출하게 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부제의 ‘화태’는 일본어로 ‘가라후토’라고 읽으며 사할린을 말한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하기 전에 지니고 있던 강역 관념을 잘 반영하다고 여겨, 오래 전부터 찬찬히 살펴보려고 했지만 짬을 내지 못했다. 게다가 옆으로 다섯 번, 길이로 다섯 번 접혀 있는데, 접힌 부분이 갈라져 있어 손대는 것 자체가 주저되기도 했다. 이번에 다른 일로 지하 서고에 들어갔다가 돌연 생각나서 다시 한 번 펼쳐 보기로 한 것이다.
조심조심 펼치는데, 지도 제목 아래에 한국, 일본, 아세아로서아, 만주, 몽고, 청국의 경계를 제시한 축소도에 적혀 있는 ‘일본해’의 명칭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일본해라는 이름은 1815년의 러시아 해도와 1819년의 프랑스 들 라르마쉬 지도에도 나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일본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1909년 간도협약이 맺어진 다음 해인 1910년 1월에 중인 출신의 근대지식인 현공렴(玄公廉)이 제작해서 일한(日韓) 인쇄주식회사에서 발행한 『대한제국전도』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현공렴은 간도협약이 맺어지기 직전인 1908년에 제작한 『신정분도 대한제국지도』에서는 동해를 대한해라고 표기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에서도 오랫동안 조선해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이 1906년판 『일한전도에서 일본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대체 간도협약 이전의 어느 시점부터 일본이 일본해라는 이름을 지도에 표기했을까 궁금하다.
지도는 권력이다. 1906년판 『일한전도』에 반영되어 있는 일본의 국권, 중국의 국권, 그리고 러시아의 국권은 필경 우리의 국권과 모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2.
현재 중국의 관할 아래 있는 백두산 인근 지역과, 간도라 불리는 두만강 이북 지역, 러시아에 귀속되어 있는 녹둔도 등은 우리의 강역이면서도 영토권을 관련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
1909년의 『일한전도』는 백두산 천지를 ‘청국만주’에 넘겨주면서, 도문강(圖們江)을 포함한 장백산맥 이남의 간도 지역을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 조선과 청국은 간도 지역의 영속권 때문에 1885년과 1887년에 감계담판(勘界談判)을 가졌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하다가, 1895년의 청일 전쟁과 1904년의 러일 전쟁 이후 담판 자체를 중단했다.
그런데 현공렴이 1908년에 제작한 『신정분도 대한제국전도』는 조선과 청국의 국경이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토문강(도문강)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북간도 대부분을 한반도에 딸린 지역으로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 백두산 부근과 간도의 영속권에 관해서만 본다면 현공렴의 1908년 지도는 나카무라 요시마츠의 1906년 『일한전도』와 유사하다. 김영관 씨는 1908년의 『신정분도 대한제국전도』가 일본과 청국 사이에 남만주 일대에 대한 이권 다툼이 확정적이지 못한 때에 간행되어 강역을 그렇게 표시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가 간도 용정촌(龍井村)의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에 부임해서 1909년 11월 1일 폐쇄 때까지 간도 영유권 문제를 조사한 것을 보면, 간도 협약 이전의 일본은 간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했던 듯하다. 그러다가 간도 협약 때 만주 철도부설권과 탄광채굴권 등을 얻는 대가로 그 지역을 청나라에 양도한 셈이다.
한편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는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영유권을 지녀왔다. 이순신도 젊은 시절에 이곳에 파견된 적이 있다. 하지만 토사가 퇴적되면서 섬이 연해주에 붙고, 한국과 러시아가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으면서 섬의 영속 문제가 현안으로 되었다. 양태진 님의 글에 따르면, 일본 동아지리연구회가 1904년에 발행한 『최근답사(最近踏査) 만한서비리아지도(滿韓西比理亞地圖)에는 녹둔도를 육지에 이어진 지대로 보고 지명을 녹도(鹿島)라고 명시한 반면에, 러시아의 관련 지도에는 그 부근을 ‘크라스키노(Kraskino)’로 불렀다고 있다고 한다. 1906년판 『일한전도』에서는 녹둔도나 녹도, 혹은 크르스키노의 지명을 확인할 수가 없다. 이 무렵에 일본은 한국과 러시아의 국경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독도는 이 1906년판 『일한전도』에 어떻게 나와 있는가? 독도라는 명칭도, 일본이 주장하는 다케시마라는 명칭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지도의 한국 전도 부분을 보면, 울릉도 옆에 작은 섬이 그려져 있다. 분명히 독도를 표시한 것으로, 그것이 울릉도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울릉도의 딴 이름인 ‘송도(松島) 즉 ‘마쓰시마’도 부기되어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의 『우리 역사 독도』(성안당, 2009)에 따르면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의 이름을 마쓰시마와 다케시마로 구분해서 부르되, 독도를 마쓰시마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단, 지도 제목의 관련국 축소도에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가 표시되어 있지 않고, 독도는 물론 울릉도도 그려져 있지 않다.
독도 영유권 분쟁은 1905년에 일본의 시마네현이 그 점유를 고시하고 1906년에 울릉군수 심홍택에게 편입 사실을 일방으로 통고한 데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1906년판 『일한전도』에는 독도가 명칭 없이 울릉도에 속하는 섬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일본 정부가 시마네현 고시를 공식 확인하지 않은 사실을 거꾸로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3.
다산 정약용은 청나라 제소남(齊召南)이 지은 『수도제강(水道提綱)』에서 우리나라의 한강에 관한 기록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통박하고 한강의 수로지를 다시 작성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산은 중국 문헌에 우리나라 수로가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은 우리 사신 일행이 저쪽의 질문에 대해 불성실하게 대답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어쩌면 우리 사신들은 관방(關防) 정책과 관련이 있는 국토 지리의 사항을 저들에게 사실 그대로 알려주려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중국도 조선에게 지리지를 넘겨주려 하지 않았고, 사신 행로도 제한하였다. 조선 중종 때는 우리 사신 일행이 중국에서 『명일통지(明一統志)』를 구입하려다가 제지당하고, 한동안 일체의 서적 구입을 금지당한 일까지 있다.
하지만 근대화의 과정에서 동아시아 각국은 자국의 경역을 표시하는 전도를 당당하게 공식적으로 간행했다. 특히 ‘최근’의 ‘답사’나 ‘실측’을 표방했다. 근대의 지도에는 국권 행사의 의지와 점탈의 포고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1906년 『일한전도』를 발행한 나카무라 요시마츠는 1905년에 이미 『대일본전도』를 간행했다고 한다. 1908년(메이지 41)과 이듬해에는 『대일본관할분지도(大日本管轄分地圖)』를 간행했다. 후자는 고토 츠네타로(後藤常太?)가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쇼미도 서점은 오사카시 미나미구(南區) 시오쵸(鹽町)에 본점을, 도쿄시 니혼바시구(日本橋區) 혼시로가네쵸(本銀町)에 지점을 두었다. 그 출판사가 일본 정부의 어떤 훈령이나 지휘를 근거로 『일한전도』를 제작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일한전도』는 일본 동아지리연구회의 1904년판 『최근답사 만한서비리아지도』를 참고로 했을 것이다.
한편, 조선의 현공렴은 1908년에 『신정분도 대한제국전도』를, 1911년에 『최신조선분도지도』를 간행했다. 후자는 신구서림과 회동서림의 공동 발행인데, 발행자는 지송욱이다. 지도 10매 및 1911년 당시의 조선 지리사진을 수록해서, 학부 검정허가를 받았다. 이 지도에는 독도가 강원도지도 부분에 죽도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지역 분도를 제작하게 된 것은 『여지도서』나 방지, 『대동여지도』 등 고유한 지도제작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의 분도 제작, 일본 육군의 실측지도 제작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1910년 일제의 강제 합병 무렵은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과 러시아가 자국의 강역 관념을 실측 지도에 구현하기 위해 ‘지도 전쟁’을 벌인 시기이다. 근세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앞으로 이 시기의 지도에 관해 실증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근세사의 강역 문제를 논하면서 당시 동아시아와 러시아의 실측 지도나 실측을 표방한 지도들에 대한 비교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자기 책 몰래 고치는 사람』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 『지천 최명길 전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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