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영 신(국어문화운동본부 이사장)
이른바 ‘백두산 탐방단’에 끼어, 중국 단동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백두산까지, 그리고 백두산에서 두만강을 따라 두만강 철도가 보이는 훈춘의 방천까지 답사를 하고 돌아왔다. 기간이 무려 8박 9일이라 부담되었지만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무리를 좀 하자는 생각으로 참가했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이 탐방단의 중심이라는 점도 큰 유인이었다.
9월 4일에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단동으로 출발하여 15시간 만에 단동항에 도착하였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단동항과 신의주항이 마주 대하고 있으면서도 단동항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고 신의주는 적막이 감돌 정도로 침체되어 있다는 보도와 사진을 여행 전에 이미 본 터였다. 단동항에서 단동시로 가는 도중에 도로 옆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는데 그게 북한과 중국의 경계라는 것이다. 압록강을 건넌 지점까지 중국 땅과 맞닿아 있는 북한 땅이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단동시에서 10여 분정도 압록강을 거슬러 백두산 쪽으로 달려간 지점에 ‘호산산성’이라는 제법 높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상당히 드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북한 땅이 철조망 건너로 펼쳐져 있고, 들판 곳곳에 북한 초소와 군인인 듯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압록강의 물줄기가 바뀌어서 북한 땅과 중국 땅이 이처럼 중국 도로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게 되었다는데, 퍽 신기하고 놀라웠다.
국경 철조망과 압록강 뗏목 고구려 유적지인 집안(集安)에서 하루 묵으면서 두루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한 뒤에 다시 압록강을 거슬러 백두산을 향해 달려가는데, 중국의 임강 부근 압록강을 지나는 중에 뜻밖에도 압록강 하구를 향애 천천히 내려가는 북한의 뗏목을 발견했다. 뗏목의 길이가 50미터는 될 것 같고, 뗏목 맨 앞에는 앞사공이 가래를 열심히 저어 뗏목을 운전하고 있었고, 뗏사공 서너 명이 뗏목 위에서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과거에 남한강 정선에서 한강 뚝섬까지 뗏목을 운전하면서 숱한 고생을 했다는 송문옥 선생의 구술을 들었지만, 실제 압록강에서 뗏목을 운전하는 모습을 처음 보고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열심히 사진을 찍은 뒤에 저 뗏목은 어디서 벤 나무로 만든 것일까 궁금했다. 압록강 건너 산을 보니 모든 산이 산꼭대기까지 벗겨지고 밭으로 개간되어 있는 북한의 산 모습이 새삼스럽게 신기하고 이질적인 감정으로 내 눈에 비쳐 들어왔다. 김일성 교시에 따라서 저렇게 산꼭대기 땅까지 개간해서 결국 산사태로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는 이이화 선생의 해설을 들으면서, 뗏목, 민둥산, 김일성, 북한 경제 등등 결코 가볍지 않은 상념들로 머리가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북한의 혜산시와 마주 보고 있는 장백현에 들어서니 갑자기 한글 간판이 나타났다. 이곳이 조선족 자치현이라서 중국어와 한국어 간판을 반드시 병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이 한글을 그들의 글자로 쓰게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중국 땅에서 한글을 만나게 되니 한글은 이미 세계의 글자로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용자가 조선족이든 다른 종족이든 세계의 여러 국가에서 한글이 사용되고 있다면 이미 한글은 세계의 글자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조선족이 우리 문화를 간직하며 살고 있는 점을 너무 가볍게(세계적 관점이 아닌 우리만의 문제로) 인식한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백두산 국경선에 얽힌 이야기와 상념들 백두산은 장백현에서 불과 2시간 거리에 있었다. 처음 백두산을 오르는 길이어서 무척 흥분되었다. 소형 버스로 갈아타고 산을 오르는데 안내가 갑자기 오른편을 보라고 한다. 오른편에 길을 따라서 철조망이 쳐져 있고 그 옆으로 개울이 흐르는데 그 개울이 북한 땅이라는 것이다. 순간, ‘아 백두산이 북한 땅이지’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쳤다. 중국을 거쳐서 가고 있다보니 백두산이 우리 산이라는 사실을 깜박한 모양이다. 이윽고 백두산 봉우리에 닿아, 걸어서 천지를 향해 걸어가는데 길 오른쪽에 또 철도망이 나타났다. 그리고 거기에는 ‘월경 금지’ 또는 ‘엄금 월경’이라는 뜻의 중국어 표지판도 붙어 있다. 철조망은 천지 바로 앞까지 쳐져 있고, 맨 끝에 여기가 중국과 조선의 국경임을 나타내는 표지석이 서 있다. 철조망이 낮아서 누구나 넘어 다닐 수 있고 국경을 지키는 북한 군인도 없지만(중국 군인이 경계를 선 모습은 간혹 보인다) 선뜻 넘어가 보기가 내키지 않은 것은 최근 일어난 몇 건의 좋지 않은 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맑고 푸른 천지를 본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내 머리 속에서는 여전히 국경을 알리는 이 철조망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해설에 따르면, 1945년 일본이 패전해서 도망가자 중국이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해서 두만강 발원지와 압록강 발원지를 일직선으로 그어 국경선을 책정하고 국경 수비대를 이 경계선을 따라서 배치했다고 한다. 그 후로 중국의 모든 지도가 백두산을 중국 영토로 표기하고 이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가고 있었는데,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고 인도와 국경 분쟁을 일으키던 시점에 김일성이 국경 문제를 제기하여 주은래 당시 수상과 협상한 끝에 백두산의 천지를 양분하는 새로운 국경선을 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 협상이 없었다면 지금 백두산은 송두리째 중국의 영토가 되어 있을 것이고, 그랬다면 내가 백두산에서 국경선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니, 내 머리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 현실을 따라가기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협상을 뒤에서 적극적으로 주선한 사람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부주석이던 주덕해 선생이었는데 이분이 문화대혁명 때에 바로 이 협상의 주모자로서 중국 영토를 북한에 넘겨주었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했다는 점이다. 주덕해 선생께 뒤늦게나마 머리 숙여 감사드리면서, 기회가 온다면 그의 무덤에 모진 추위에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백두산솜다리 한 송이를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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