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00년의 학술사, 누가뭐라해도 퇴계와 율곡을 빼고는 논의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조선후기 당쟁이 격화되면서 남인 쪽에서는 퇴계의 학설만이 옳고 율곡의 학설에는 문제가 많다고 여겼고, 노론 쪽에서는 율곡의 학설은 옳지만 퇴계의 학설에는 문제가 많다고 여겼던 것이 대체적으로 평해지는 말입니다. 학문과 학설이 당쟁의 빌미가 되었던 매우 불행한 역사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남인의 가계를 이어받고 태어나 남인으로 정치적 활동을 했던 다산은 여러 곳에서 퇴계도 옳지만 율곡도 옳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 국왕 정조에게 올려 바치는 글에서는 퇴계의 성리학설보다는 율곡의 성리학설이 옳다는 주장을 펴서 평소에 율곡학설에 더 많은 흥미를 느꼈던 정조에게 큰 칭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남인계에서는 다산을 크게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는 기록을 다산이 남기기도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p.306)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라는 글은 다산이 젊은 시절 퇴계의 서간문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격적인 내용을 소개하고 자신의 견해를 곁들여 적어놓은 수준 높은 학술눈문입니다. 『퇴계선생문집』에 실린 율곡에게 답하는 편지를 읽은 다산은 편지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고 자신이 느낀 생각을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23세의 청년으로 58세의 노학자 퇴계를 도산으로 찾아가 도를 물었던 율곡은 그 후 몇 차례 편지로 퇴계와 학문적 토론을 벌렸습니다. 퇴계가 답한 편지에 “숙헌(叔獻: 율곡의자)이 지난번이나 이번에 논변한 글을 보니 언제나 선유(先儒)의 학설에서 반드시 먼저 옳지 못한 점을 찾아내 애써서 깎아내리고 배척하는데 힘을 기우린다.”라는 대목이 있다고 했습니다. 노숙한 학자 퇴계는 남의 잘못을 꼬집는 일에는 신중하라는 충고의 글을 썼겠지만, 다산은 이 부분에서 퇴계보다는 율곡편에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젊은 학자들이 경전의 해석에 대하여 선생이나 어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학문을 묻고 답하려면 반드시 그 학설에 착오가 있는 곳을 집어낸 뒤에야 비로소 의문을 제기하여 질정할 수 있는 것이다. 율곡이 당시에 퇴계선생에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어려운 곳을 묻고 답했으니, 그의 질문했던 것이 그와 같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해설하여, 다산은 선유들의 잘못된 학설을 비판하면서 학설을 바로잡고 자기 학설을 세워 학자로서의 대성을 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퇴계가 율곡에게 새로운 학설 세우기에는 신중하라고 경계했던 것처럼, 다산에게도 남의 비판에 신중했던 추사 김정희나 석천 신작등은 새로운 학설만 세우고 선유들의 학설을 너무 비판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보면 노론쪽에서 숭앙하던 율곡을 남인인 다산도 숭앙하여 당과 관계없이 학문만을 추구했던 다산의 공심(公心)이 그런데서도 보여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정당정치, 다른 당에서 옳은 일을 하면, 반대당에서도 칭찬하고 지지하는 그런 것을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박석무 드림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