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다산 정약용과 강진유배시절의 제자, 황상

문근영 2018. 12. 5. 07:42
  

 

 

 

 다산과 황상  

 

 

 
                                                                                               - 정민(한양대 교수, 국문학)
 

 


인생에 귀한 것은 마음을 알아주는 일

  

 

다산과 강진 시절 제자 황상(黃裳, 1788-1863?)의 가슴 뭉클한 만남에 대해서는 앞서 다른 글에서 한번 소개한 바 있다.1) 지난 해 강진에서 열린 〈다산정약용선생유묵특별전〉에 다산이 강진에 있던 제자 황상에게 보낸 편지가 처음 공개되었다. 전시회에는 강진 시절 보은산방에서 공부하고 있던 황상에게 다산이 친필로 써준 시와 메모도 나왔다. 또 이전에 공개된 흑산도의 정약전이 다산에게 보낸 편지도 온통 황상과 관계된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이 세 통 편지와 추사 김정희의 글, 그리고 다산의 아들들이 남긴 황상에 대한 언급 등을 중심으로 앞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이들 사제간의 아름다운 인연을 다시 되짚어 보기로 한다.
 
황상은 강진 시절 여러 제자 중에서도 다산이 마음으로 가장 아끼고 사랑한 제자였다. 이 둘의 관계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따뜻한 사연을 많이 남겼다. 다산이 유배 이듬해 주막집 골방에 머물고 있을 때인 1802년에 당시 15세 소년이었던 황상은 스승에게 처음으로 절을 올렸다. 다산은 소년의 심지와 총명을 대번에 간파했다. 이에 수줍어 머뭇대는 그를 위해 앞의 글에서도 읽은 바 있는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을 내린다. 스승의 이 따뜻한 가르침이 시골 소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는 평생 스승의 이 가르침을 뼈에 새기며 살았다. 스승을 처음 뵌 그 날이 10월 10일이었다고 황상은 날짜까지 또렷이 기억했다.
 
몇 년 전 공개된 정약전의 편지는 유일하게 남은 그의 필적이다. 흑산도에서 강진으로 보낸 편지였다. 반가워서 살펴보니 놀랍게도 이 편지에는 온통 황상 이야기뿐이었다.

황상은 나이가 지금 몇이던가? 월출산 아래서 이 같은 문장이 나리라곤 생각지 못했네. 어진 이의 이로움이 어찌 넓다 하지 않겠는가? 그가 내게로 오려는 마음은 내 마음을 상쾌하게 하네만, 뭍사람은 섬사람과 달라 크게 긴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경솔하게 큰 바다를 건널 수가 없을 걸세. 인생에서 귀하기는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일세. 어찌 꼭 얼굴을 맞대면해야만 하겠는가? 옛 어진이 같은 경우도 어찌 반드시 얼굴을 본 뒤에야 이를 아끼겠는가? 이 말을 전해주어 뜻을 가라앉혀 주는 것이 좋겠네. 모름지기 더욱 이를 부지런히 가르쳐서 그로 하여금 재주를 이루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인재가 드물어 지금 세상에서는 이 같은 사람을 기다리기가 어려우니, 결단코 마땅히 천번 만번 아끼고 보살펴 주어야 할 것일세. 애석하게도 그 신분이 미천하니 이름이 난 뒤에 세도 있는 집안에 곤핍 당하는 바가 될까 염려되는군. 사람됨은 어떤가? 재주 많은 자는 반드시 삼가고 두터움이 없는데, 그 문사를 살펴보니 조금의 경박하고 안일한 태도가 없어 그 사람됨 또한 알 수 있을 것 같네. 부디 스스로를 감추고 스스로를 무겁게 하여 대인군자가 될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권면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 섬에도 몇 명의 부족한 아이들이 있는데, 간혹 마음과 생각이 조금 지혜로운 자도 있다네. 하지만 눈으로 본 것이라곤 《사략》과 《통감》을 벗어나지 않고, 마음으로 바라는 바는 병교(兵校)나 풍헌(風憲)이 되는 것을 넘지 않는다네. 게다가 사람들이 모두 가난해서 온 섬 가운데 편히 앉아 밥 먹는 사람이 없고 보니 이러고서야 오히려 무엇을 바라겠는가?
 
편지 보내는 사람과 같이 잠을 자면 내 근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것이네. 반드시 십분 환대해 주면 고맙겠네. 어떤 물건으로 정을 표하는 것도 좋겠네만, 어쩔 수 없을 듯 하이. 노자 외에는 반드시 사양하고 받지 않으려 들 터이니, 다만 서너 전쯤 쥐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다 적지 못하네. 병인년(1806) 3월 초 10일 둘째 형 씀. 
(黃裳年今幾何? 不意月出山下, 出此文章. 仁人之利, 豈不博哉. 欲來之意, 令人?然, 然陸人異於島人, 非大關係, 不可輕涉大海. 人生貴相知心, 何必面也? 如古人之賢者, 何必見面然後, 愛之耶? 傳此言而安之如何? 更須誨之無倦, 令之成才如何? 人才?然, 今世難俟此等人, 斷當千萬愛護耳. 惜其地微也, 恐名發之後, 爲勢家所困也. 爲人何如? 多才者, 未必謹厚, 而翫其文詞, 少無輕逸之態, 爲人亦可知也. 勸其自晦自重, 期成大人君子, 如何如何. 此中有數三頑劣者, 間或有心思小慧者, 而眼中所見, 不出史略通鑑, 心上所望, 不出兵校風憲, 且人皆貧薄, 全一島中無坐食之人. 如此而尙何望也. 此人與之同宿, 則可得吾之細節耳, 必十分款待如何? 若以某物表情則好, 而似無柰何耳, 路資外必辭而不受, 第給四五?如何. 姑不宣. 丙寅三月初十日 舍仲書.)
 
편지를 보낸 날짜는 1806년 3월이다. 황상이 다산을 처음 만난 지 고작 3년 반 뒤에 쓴 것이다. “선생님! 저 같이 머리 나쁜 아이도 공부 할 수 있나요?”하고 묻던 그 소년이 불과 3년 반 만에 정약전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문장가로 훌쩍 성장해 버린 것이다. 
 
소년은 스승을 늘 곁에서 모시면서 자주 흑산도에 유배된 형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예 흑산도로 건너가 곁에서 모시고 공부를 했으면 하는 속내를 비추었던 듯하다. 정약전은 그의 결심을 다산을 통해 듣고서 깊이 감격했지만 황상의 흑산도 행만은 굳이 만류했다. 대신 다산에게 그가 성취를 이루도록 곁에서 끝까지 도와줄 것을 당부했다.
편지 위쪽에 적힌 작은 글씨가 황상의 친필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이것은 선생님의 둘째 형님께서 나주 흑산도에 귀양 가 계실 적에 쓰신 편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편지의 내용이 온통 네 이야기로 가득하고, 또한 둘째 형님의 친필이니 네 거처에 보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여기에 합첩한다.
(此夫子仲氏在謫羅州玆山時書也. 夫子曰: “書意滿紙汝說, 亦仲氏親筆, 留汝處可也.” 故玆合帖焉.)

정약전이 편지에서 황상의 신분이 미천해서 이름이 나면 세도 있는 집안에 곤핍을 당하게 될까 염려하고 있는 데서 보듯, 황상은 양반의 자식이 아니라 아전의 자식이었다. 하지만 한번 불붙은 향학의 열정은 잠재울 수가 없었다. 스승의 엄격하고도 따뜻한 훈도와 그의 성실한 성품과 열정적인 노력은 짧은 기간에 그의 공부를 단번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놓았다.


다산이 인가한 시 제자

황상은 신분의 제약으로 과거를 볼 수도 없었다. 다산은 그래서 그를 학문의 길로 인도하는 대신 문학으로 이끌었다. 시에 대한 황상의 재주는 특별히 남달랐다.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나자 〈설부(雪賦)〉를 지어 다산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다산은 1805년 4월에는 그에게 날마다 한편씩 부를 짓게 했다. 일종의 정과실천(定課實踐)의 학습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4월 1일에 지은 〈제부(霽賦)〉를 시작으로 날마다 한 수씩 지어, 4월 30일 〈주중선부(酒中仙賦)〉까지 30수를 지었다.
 
이 시기는 다산이 동문 밖 주막의 뒷방을 얻어 머물 때였다. 다산은 황상을 몹시 아껴, 이따금 나들이 갈 때도 늘 그를 데리고 다녔다. 서울서 내려온 아들 학연을 데리고 다산이 보은산의 고성암(高聲菴)에서 한 겨울을 나면서 《주역》을 가르칠 때도 황상은 곁을 떠나지 않고 수발을 들었다. 학연과 함께 두륜산 정상까지 올라갔던 것도 황상이었다. 이때의 여행기를 정학연은 〈유두륜산기(游頭崙山記)〉로 남겼다.
 
학연이 서울로 돌아가고 다산이 암자를 내려온 뒤에도 황상은 그곳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했던 모양이다. 다산은 어느 날 고성암의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보낸 황상의 시를 받고 그 시에 차운해서 답시를 보냈다. 이 시는 문집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지난 번에 공개된 친필 원본은 다음과 같다.

찌는 더위 절집으로 가고픈 생각              炎敲思走寺
늙고 지쳐 산 오르기 겁이 나누나.            衰疲畏陟嶺
모기 벼룩 마음 놓고 덤벼드노니              蚊蚤恣侵虐
여름밤은 괴롭고 길기도 하다.                  夏夜覺苦永
밤 깊으면 번번이 발광이 나서                  更深每發狂
옷을 벗고 우물로 가 목욕을 한다.             解衣浴村井
바람은 시원히 내 얼굴 불                      長風吹我面
성근 숲 바자울을 들추는도다.                   疏林?藩屛
너는 지금 구름처럼 높이 누워               憶汝雲臥高
뼈와 살이 서늘토록 쉬고 있겠지.              偃息肌骨冷
-〈보은산방에 제하다[題寶恩山房]>

찌는 무더위 속에 모기와 벼룩에 물려가며 끔찍한 여름밤을 나다가 산속 암자에서 공부하는 제자를 그리며 보낸 시다. 시 옆에 친필로 쓴 다산의 메모가 남아 있다. 그 내용이 이렇다.

보내온 시가 돈좌기굴(頓挫奇?)해서 내 기호와 꼭 맞는다. 기쁨을 형용할 수가 없구나. 이에 축하하는 말을 적으며 아울러 혼자 기뻐한다. 제자 중에 너를 얻은 것이 참 다행이다. (來詩頓坐奇?, 深契我好. 欣喜不可狀. 玆有賀語. 兼之自賀. 弟子中得有汝幸矣.)

황상에 대한 다산의 애정이 이러했다. 그를 자신의 적전(嫡傳)을 이은 시제자로 인정한 것이다. 이후 다산은 주막집을 떠나 한동안 이청의 집에 머물다가 초당으로 옮겨와 외가인 해남 윤씨 자제들이 주축이 된 양반가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신분의 차이도 있었고, 황상의 아버지 황인담(黃仁?)이 술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시묘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놓였던 황상은 초당의 강학에는 합류하지 못했다. 농사를 짓는 와중에도 그는 오직 스승의 말씀을 따라 모범이 되는 옛 시와 성현의 글을 부지런히 읽고 초서를 하며 지냈다.
 
황상은 진솔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겉으로 꾸밀 줄 몰랐다. 깊은 속내를 표현하지도 못했다. 스승이 뒤에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간 뒤에도 달리 연락을 취하거나 다른 제자들처럼 서울까지 찾아가지도 않았다. 강진 시절 초기에 함께 배웠던 자신의 동생 황지초(黃之楚)가 마재로 스승을 찾아갔다. 다산은 그가 돌아가는 편에 소식이 끊긴 제자 황상에게 편지를 전했다. 이 편지 또한 지난 번 전시 때 공개되었다.

서로 헤어진 지도 십년이 지났구나. 네 편지를 기다리지만 편지는 이승에서는 없을 것 만 같다. 마침 연암(硯菴) 황지초(黃之楚)가 돌아간다기에 마음이 더욱 서글퍼져서 따로 몇 자 적어 보낸다. 금년 들어 기력도 전만 같지 않아, 그 괴로운 품이 앞서와 한 가지이다. 밭 갈아도 주림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신 성인의 가르침이 꼭 맞는 말이로구나. 너는 분명 학래(鶴來) 이청(李청)과 석종(石宗) 등의 행동거지에 대해 듣고 웃었겠지? 하지만 사람이 세상에서 혹 한 길로 몸을 마치도록 힘을 쏟으면서 즐겨 사슴과 멧돼지와 더불어 노닐더라도, 또한 도를 마음에 품고 세상을 경영하는 온축이 없다면 어찌 족히 스스로를 변화시키겠느냐? 내 지내는 모습은 연암이 잘 알 테니, 이제 가거든 자세히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자년(1828) 12월 12일 열수 씀.
(相別已過十年. 待君之書, 而書則此生無否. 適還硯菴, 心懷益愴?, 別作數字. 年來力非猶前, 其?辛猶前, ?也?在其中, 聖訓其不驗耶. 君必聞鶴來石宗等行止而?之. 然人生世間, 是或一道終身力作, 甘與鹿豕游, 亦無懷道經世之蘊, 亦何足自變耶. 吾狀硯菴詳知, 今去詳問可得之也. 戊子至月十二日 洌?書.) 
 
겉봉에 “치원 농은의 처소에 부침. 열상노인은 쓰다.(寄?園農隱之所 洌上老人書)”라고 적혀 있다. 다산은 이때 67세였다. 스승은 무심한 제자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 틀어 박혀 한 길로 매진하는 것도 좋지만 도를 품고 세상을 경영하는 온축도 필요한 게라고 넌지시 나무랐다.
 
편지 속에 제자 이청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석종에 대한 언급이 있다. 분명치는 않지만 당시 이들은 스승을 따라 마재로 가서 계속 스승 곁에 머물러 있었던 듯하다. 《치원유고》에는 서울 걸음에서 이청과 만나 스승의 유저(遺著)가 그저 방치된 채로 남아있음을 나무라는 시가 남아 있다. 다산의 언급과 황상의 시, 그리고 70이 넘어서도 과거에 급제 못하고 끝내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이청의 만년을 생각해 볼 때, 편지 속의 다산의 말은 좀더 음미해 볼 구석이 있다. 


은거의 계기와 영결의 장면

황상은 요령이 없었을 뿐 스승에 대한 진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훗날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丁學游)가 황상에게 써준 글을 보면 저간의 사정이 잘 드러난다.

무릇 이용후생과 명물도수에 한번 마음을 쏟으면 문득 깨달아 이해하곤 했다. 일찍이 《주역》의 ‘리(履)’괘 구이(九二)의 효사를 읽다가 마음에 와닿는 듯 읊조려 탄식해 마지않았다. 선군(先君)께서 그 절개를 기특히 여기시고 그 뜻을 칭찬하시며, 《주역》의 뜻을 부연하여 글을 지어서 그에게 주었다. 이로부터 개연히 뜻이 있었으나, 돌아보매 힘이 능히 미치지 못했다. 선군께서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시자 더욱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의지할 바가 없는 듯하였다. 이에 집과 전포를 아우에게 맡겨 생활하게 하고, 홀로 처자를 이끌고 천개산(天盖山)으로 들어가 띠를 얽어 집을 짓고, 땅을 갈아 텃밭을 만들어 뽕나무를 심고 대나무를 심으며, 샘물을 끌어와 바위로 꾸미고 자취를 감추고 산 지 10년에 대략 작은 포치를 이룰 수 있었다. 병신년(1836) 봄에 갑자기 느낌이 있는 듯하여 뜻을 결단하여 북쪽으로 왔다. 이는 선군께서 고향에 돌아오신 이후에 처음 뵙는 것이었다. -〈증치원삼십육운서(贈?園三十六韻序)〉, 《치원유고》 
(凡利用厚生名物度數, 一留心便有悟解焉. 嘗讀易, 至履九二之詞, 歆歆然詠歎之不二. 先君子奇其節而賞其志, 演易旨爲設言以贈之. 自此慨然有志, 顧力未能也. ?先君宥還, 益??無所倚. 乃以屋宅田圃, 付與一弟爲活. 獨携妻子入天盖山, 縛?爲屋, ?地爲?, 栽桑種竹, 疏泉藝石, 屛迹十年, 略可謂小布置. 丙申之春, 忽若有感, 斷意北行, 此先君還鄕後初覲也.)

황상은 보은산방에서 정학연과 함께 스승을 모시고 《주역》을 배울 당시 〈리(履)〉괘 구이(九二)의 효사에 특별히 눈이 멎었다. 그 효사는 “길을 밟는 것이 탄탄하다. 유인(幽人)이라야 곧고 길할 것이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황상이 이 구절을 기뻐하자, 다산은 그 뜻을 칭찬하면서 그를 위해 괘사의 의미를 부연해서 한편의 글을 지어 주었다. 그 글이 바로 숨어사는 선비의 이상적인 거처에 대해 논한 〈제황상유인첩(題黃裳幽人帖)〉이었다. 이 글에서 다산은 선비가 거처를 정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들과 각종 공간배치에 대해 상세히 적어 놓았다.
 
황상은 스승에게서 이 글을 받고 나서 또 스승의 말씀과 똑같이 자신의 거처를 꾸밀 결심을 세웠다. 그는 스승이 주신 말씀은 무조건 곧이곧대로 따라하고 어김없이 실천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스승은 해배가 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집안의 생계는 동생에게 맡기고 천개산 골짝으로 들어가 맨땅을 일구고 띠집을 지어 하나하나 스승이 말씀해주신 내용을 실현시켜 나갔다. 그렇게 10년을 세상에 발길을 끊고 지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추어졌다. 
 
황상이 마침내 마재로 다산을 찾아온 것은 다산이 강진을 떠난 지 18년 뒤인 1836년 2월이었다. 위 편지를 받고도 황상은 8년을 더 뜸을 들이다가, 이승에서 마지막 한번 얼굴을 뵙고 하직인사를 올릴 작정으로 스승의 회혼례(回婚禮)에 맞추어 상경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다산은 잔치를 치를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위중했다.
 
15살 소년으로 처음 만난 스승을 쉰을 눈 앞에 둔 중늙은이가 되어 다시 만났다. 삭정이처럼 여윈 채 목숨이 사위어가는 스승에게 절을 올리는데 굵은 회한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스승도 반가워서 그 투박한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 며칠간 지난 이야기를 나누다 작별을 고했을 때 스승은 혼미한 와중에도 그의 손에 접부채와 피리와 먹을 선물로 들려주었다. 새로 구한 운서(韻書)도 주었다. 시 공부에 참고하라는 뜻에서였다. 사제가 서로를 애타게 그리다가 만나고 영결하는 이 장면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결국 다산은 사흘 뒤에 세상을 떴다. 도중에 부고를 들은 황상은 걸음을 돌려 스승의 장례를 끝까지 지켰다. 그리고는 상복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또 소식이 끊겼다. 10년 뒤인 1845년 3월 15일, 스승의 기일에 맞춰 황상은 스승의 무덤 앞에 다시 섰다. 18일을 꼬박 걸어 검게 탄 얼굴에 퉁퉁 부르튼 발로 기별도 없이 문간에 들어선 그를 정학연은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도 이제 환갑을 앞둔 늙은이였다. 손에는 그 옛날 스승이 작별 선물로 준 부채가 들려 있었다.
 
아들과 제자는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그 두터운 뜻이 느꺼워 다 늙어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부채 위에 아들은 감사의 시를 써주었다. 그리고는 이제부터 정씨와 황씨 두 집안이 자손 대대로 서로 잊지 말고 왕래하며 오늘의 이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하자고 문서를 써서 맹세했다. 이것이 바로 정황계첩(丁黃契帖)이다. 현재 정학연이 친필로 쓴 정황계첩의 원본이 남아 있다.
 
황상은 75세 때 60년 전 스승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며 〈임술기(壬戌記)〉를 썼다. 스승을 처음 만난 해가 임술년이었는데, 어느새 한 갑자를 돌아 다시 임술년을 맞았으므로 깊은 감회가 일었던 것이다. 이 글은 앞서 따로 소개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삶의 끝자리에서 비록 이룩한 것은 없지만 스승께서 내려주신 마음을 다잡아 부지런히 노력하라 하신 삼근(三勤)의 가르침만은 평생 부끄러움 없이 힘써 지켰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산방에 처박혀 하는 일이라곤 책 읽고 초서하는 것뿐입니다. 이를 본 사람은 모두 말리면서 비웃습니다. 하지만 그 비웃음을 그치게 하는 것은 나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귀양살이 20년 동안에 날마다 저술만 일삼아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 났습니다. 제게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려주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것을 얻었다.” 몸으로 가르쳐주시고 직접 말씀을 내려주신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합니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럽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황상, 〈회주 삼로에게 드림[與?州三老]>, 《치원유고》
(沒身山房, 所事者惟?讀耳. 人之見之者, 皆沮而嘲笑之, 止其笑之者, 非知我者也. 丁夫子謫中卄年, 日事筆硯, ?骨三穿, 授予以三勤字之戒, 常曰: “我勤而得之.” 身敎口授, 近如昨日, 留目在耳, 蓋棺之前, 安可負其至誠逼切之敎也哉.) 

이것이 다산의 전설적인 ‘과골삼천(?骨三穿)’의 고사다. 다산은 늘 돌부처처럼 앉아 저술에만 힘쓰다 보니, 방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렸다. 나중에는 통증 때문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아예 벽에 시렁을 매달아 서서 작업을 계속했다는 전문도 있다.
 
황상은 나이 70이 넘어서도 독서와 초서(?書)를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지금도 그렇게 부지런히 책을 읽고 베끼느냐고 비웃었다. 그러자 황상은 스승의 과골삼천으로 대답했다. 삼근계의 가르침이 귀에 쟁쟁한데 죽기 전에야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황상은 더도 덜도 말고 꼭 이런 사람이었다.


추사 형제의 인정과 뒤늦은 시명(詩名)

황상의 문집인 《치원유고(?園遺稿)》에는 10대 후반 다산 품안에 있을 때 지은 수십 수의 시가 있고, 중간의 20여년 간 지은 작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는 49세 때 스승을 뵈러 두릉을 찾은 이후의 시문이 남아 있다. 황상의 진실한 인간미에 감복한 정학연 형제를 통해 황상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당시에 꽤 널리 회자되었던 듯 하다. 정학연의 소개로 추사는 황상과 만나게 되는데, 이후로 시골서 수십 년 동안 농투성이 농사꾼으로 살아온 황상은 중앙 문단에 혜성처럼 화려하게 등장했다. 아래 편지는 정학연이 황상에게 보낸 편지의 별지인데, 추사가 황상의 시를 처음 접하게 되는 장면을 인상 깊게 묘사하고 있다.

시편과 관련된 일에 대해 말씀 드리지요. 추사가 말했습니다. “제주도에 있을 때 한 사람이 시 한 수를 보여주는데, 묻지 않고도 다산의 고제(高弟)인 줄을 알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그 이름을 물었더니, 황 아무개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를 음미해보니 두보를 골수로 하고 한유를 근골로 한 것이었습니다. 다산의 제자를 두루 꼽아 보더라도, 이청 이하로 모두 이 사람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또 들으니 황모는 시문이 한당(漢唐)에 가까울 뿐 아니라, 그 사람됨도 당세의 높은 선비라 할 만 하여 비록 옛날 은일의 인사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육지로 나서는 대로 그를 찾아갔더니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므로, 구슬피 바라보며 돌아왔습니다. 이제 내가 서울로 왔더니 벌써 고향으로 돌아갔다더군요. 제비와 기러기가 서로 어긋남과 같아서 혀를 차며 안타까워 할 뿐입니다.” 그 사이에 추사와는 두 차례 서로 만났는데 번번이 칭찬해 마지않았습니다. -〈유산서별지(酉山書別紙)〉, 《치원유고》 중.
(詩篇事, 秋史曰: “在耽時, 有一人示一詩, 不問可知爲茶山高弟. 故問其名, 曰黃某. 味其詩, 卽杜髓而韓骨. 歷數茶山弟子, 自鶴也以下皆無以敵此人. 而且聞黃某, 非但詩文直逼漢唐, 其爲人可謂當世高士. 雖古之隱逸, 無以加此. 故出陸訪之, 則曰上京云. 故?望而歸. 今此入京, 已返鄕云. 燕鴻相違, ??難堪.”云. 其間二次相逢, 番番稱道不遺耳.)

추사가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것이 63세 나던 1848년 12월 6일의 일이니, 추사는 이때 육지로 나오는 길로 해남 대흥사를 들렀다가 바로 황상의 일속산방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이때 황상이 서울에 볼 일을 보러 가는 바람에 두 사람의 만남은 더 훗날로 미루어졌다. 어쨌거나 이 일이 있은 뒤로 황상은 몇 차례 두릉과 과천을 오가며 추사 형제가 자청해서 써준 시집의 서문을 받고, 시를 쓸 때마다 작품 끝에 추사 형제가 평어를 남기는 영광을 한 몸에 입었다.
 
신분이 미천하여 세도가의 곤핍을 당할까 염려했던 정약전의 우려는 기우였던 셈이다. 이에 얽힌 전후의 이야기는 이 짧은 글에서 다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별고에 미룬다. 
 
지난 해 강진의 다산유묵전에는 추사가 다산과 함께 황상의 집을 찾아가 하루 밤 함께 묵으면서 추사가 써주었다는 ‘노규황량사(露葵黃粱社)’ 현판 글씨도 나왔다. 글씨 옆에 ‘서부금계(書付琴谿)’란 네 글자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직접 황상에게 써준 것이 아니라 금계(琴季) 윤종진(尹鍾軫) 편에 부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추사가 황상을 처음 만난 것은 위 편지에서도 보듯 다산이 세상을 뜬 지 12년 이후의 일이다. 그러니 두 사람이 황상의 집을 찾아가서 하루 밤 자고 글씨를 써주는 일은 애초에 가능치가 않다.
 
유묵전에서 공개된 《치원진완(?園珍玩)》에는 추사 형제가 황상에게 써준 시집의 친필 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전체도록 간행 등 관련 자료의 전면적인 공개를 통해 좀 더 진전된 논의가 가능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 후 추사 형제와 정학연 형제가 잇달아 세상을 뜨자 그는 또 서울 쪽의 발길을 끊고 야인의 삶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정확한 몰년은 확인되지 않는다.





1) 정민, 〈삶을 바꾼 만남-정약용과 강진시절 제자 황상〉, 《문헌과해석》 2003년 겨울호, 9-18면. 《미쳐야미친다》(푸른역사, 2004)에 재수록.
 

 

 

 

 

출처 : 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글쓴이 : Gijuzzang Dream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