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습니다. 국장기간에 보도되는 그분에 대한 평가를 듣다보니 문득 영조·정조 시대에 소수파로, 진보적 사고와 정의로운 정치적 신념 때문에 고난받으면서도 대업을 성취했던 번암 채제공(1720-1799)의 업적이 생각납니다. 1762년 영조 38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목숨을 끊은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그 4년 전 세자를 폐하려는 영조의 명령이 있었을 때에는 도승지로 있던 채제공이 몸을 사리지 않고 막아서 겨우 사태를 수습했으나, 세자의 참변이 있던 당시는 하필이면 채제공이 모친상으로 조정을 비운 때라 그런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임오사건’(1762) 이후 시파와 벽파사이의 당파싸움이 거세져 조정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다수의 집권세력인 벽파, 소수이자 소외계층인 시파, 채제공은 시파의 영도자로서 집권세력인 벽파에게는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채제공은 학식이 높고 인격이 뛰어나 임금의 돈독한 신임을 얻었고 벽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 고관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영조 때 병조·형조·호조판서를 역임했고 정조 등극 뒤에는 더욱 신임받는 신하로 고관을 역임합니다. 하지만 벽파의 드센 공격에 끝내는 긴긴 추방생활을 하게 됩니다. 부처(付處)되어 8년을 산속에서 숨어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채제공의 뛰어난 학식과 인격을 잊지 않고 8년 후 특별명령을 내려 추방당한 그를 정승인 우의정 자리에 등용하여 임금을 보필하게 합니다. 이어서 채제공은 좌의정에 올라 영의정이 없는 독상(獨相)으로 3년 동안 권력을 잡고 온갖 제도를 개혁하며 문물제도를 정비해 정조의 치세를 이룩합니다. 그런 시절에 진보적인 다산일파들도 하급관료로서 제 역할을 했습니다. 채제공은 곧 영의정 자리에 올랐지만 보수세력인 벽파의 극성스러운 반대 때문에 영의정 시절에는 화성축조의 공을 이룩하는 일 말고는 큰 개혁을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채제공은 1799년 80세로 세상을 떠났고, 정조는 국민장에 가까운 최대의 예우로 그를 장사지냈습니다. 친히 묘비문을 지어 비를 세워주고 문집을 간행하도록 친히 서문까지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어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체제공은 사후이지만 중죄인으로 처벌받게 되고 모든 관직을 박탈당합니다. 심지어 아들까지 귀양살이하는 처절한 처지에 이르고 맙니다. 보수세력의 반격은 그렇게 혹독하였습니다. 1823년에야 영남에서 만인소가 올라와 마침내 채제공은 모든 지위와 관직을 되찾고 복권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선후기 최고의 명재상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정조는 생전에 채제공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명하여 그 초상화가 지금도 전해지는데, 그 초상화에 찬양의 글로 바친 다산의 화상찬이 기록으로 전합니다.
바라보면 근엄하여 두렵게 보이지만 가까이 뵈어보면 유순하여 뜻이 통하는 분 점잖게 계실 때야 쌓아둔 옥이나 물에 잠긴 구슬 같지만 움직였다면 산이 울리고 바다가 진동하네 거센 파도 휘몰아쳐도 부서지지 않고 돌무더기가 짓눌러도 작아지지 않았네 아무리 길고 짧은, 크고 작은 창날이 겨누어도 그분 정승에 오르는 일 막지를 못했네 그의 웅위하고도 걸특한 기개는 천길 높이 깎아지른 절벽같은 기상이었지만 사람이나 물건에 상해끼칠 생각은 전혀 마음속에 없었으니 군자답도다 그분이여! 그분이 아니고서야 백성이 그 누구를 믿을 것인가 <번옹화상찬>
채제공과 김대중, 그들이 처한 시대와 세상이 다르고, 그들의 신분과 처지가 달랐지만 극보수의 노론 및 수구독재세력의 벽파계열과 맞서 싸우느라 모진 고난을 당하면서도 높은 지위에 올라 큰 치세를 이룬 채제공은 인동초 김대중과 비교될 만한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산이 채제공에게 바친 인물평을 저는 미흡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영전에 바치고 싶습니다. 후광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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