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가을은 유독 비가 자주와 맑은 하늘을 보기 어려웠는데 지난 주말에는 모처럼만에 하늘이 맑았습니다. 이렇게 맑은 날 집에만 가만히 있으면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아 얼마 전부터 계획했던 나들이를 떠났습니다.
오랜만에 어머니까지 모시고 아이들과 찾아간 곳은 경기도 남양주였습니다. 남양주로 행선지를 선택한 이유는 아름다운 강과 산세가 아름답게 조화로워 예부터 풍광 좋기로 소문난 곳이기도 하거니와 그곳에서 아주 뜻있는 지역 행사가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나라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서둘러 아침을 먹고 시원하게 내부순환도로와 북부간선도로를 달려 맨 처음 간 곳은 남양주와 다리 하나 사이로 떨어져있는 양평의 두물머리 입니다. 몇 달 전 양평지역 답사 때 한번 가보았는데 나중에 어머니를 모시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던 곳이라 먼저 이곳을 들렀습니다.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인 두물머리
두물머리에서 나와 다시 남양주로 넘어가 남양주의 대표 고찰인 수종사에 올랐습니다. 수종사는 조선 초 문신인 서거정이 ‘동방사찰 중 제일의 전망’ 이라고 칭찬했던 곳으로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수종사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자세히 소개해보겠습니다.
수종사를 나와 점심을 먹으니 어느덧
지방자치제 이후 지역 문화행사가 상당히 많이 늘어났고 그 내용도 매년 풍성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행사는 기대했던 수준과 차이가 많이 나서 실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행사 내용은 부실하고 간이 식당만 즐비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행사장은 지저분하고 안내 팜플렛은 조잡하며 화장실이나 안내센터 운영도 형식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남양주의 다산문화제는 무늬만 문화제인 여느 곳과는 달리 여러 가지 유익한 행사와 더불어 다산유적지 곳곳을 돌아보며 다산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2만 5천수가 넘는 시를 지은 시인이기도 하지만 한강의 주교도 와 화성축조를 설계한 건축설계 공학자이기도 했으며 수레와 거중기를 개발한 기계공학자이기도 했던 다산
그에 대해서는 너무 유명한 분이라 굳이 설명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다음 기회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그림에 대해 소개해보기로 하고 오늘은 그의 유적지에 대해서만 소개하겠습니다.
다산기념관. 다산
경기도 남양주 마현마을의 다산유적지는 기념관과 다산이 살았던 여유당, 사당인 문도사, 그리고 다산과 부인인 풍산 홍씨 합장 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산이 개발한 거중기. 2명의 힘으로 10톤 이상의 돌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 거중기가 없었으면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은 건축될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가 사랑채에 여유당이란 당 호가 걸려있다. 현판 글씨는 다산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 호는 익히 알려진 대로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 는 노자의 말에서 따온 것인데 그를 죽이고자 미쳐 날뛰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의 의미로 지은 이름입니다.
다산 생가는 ‘ㄱ’자를 맞물려 놓은 형태로 배산임수(背山臨水·뒤에는 산이 받쳐 있고 앞에는 물이 있는 형국)되고 전저후고(前低後高)·앞은 낮고 뒤는 높은 지형)으로 좋은 터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안채에서는 전통다도 체험회가 열렸다. 한잔 마실까 하다가 사람이 많아 포기했다.
다산 부부의 묘는 생가 바로 뒷동산에 있습니다. 다산은 죽기 직전 “지사(地師)들에게 물어보지 말고 집 뒷동산에 매장하라”고 유언했다고 합니다. [주역]에 통달했던 다산이 스스로 선택한 곳이라 좋은 음 택지임은 틀림 없을 텐데 현대 풍수학자들의 의견도 묏자리로는 거의 완벽한 위치라고 합니다.
다산은 17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후 유람과 저작에 힘쓰며 말년을 보내다가 1836년(헌종2년) 그의 회혼일 4월7일(음 2월 22일)에 여유당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후 2년 후 부인 홍씨도 같은자리에 합장되었습니다.
다산
묘에서 바라본 생가. 다산은 어려서는 저곳에서 형제들과 실학의 꿈을 키워갔으며 말년에는 죽어간 형제들을 생각하며 쓸쓸하게 지냈을 것이다.
묘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면 그를 추모하는 사당이 있는데 문도사라 합니다.
문도사(文度祠)의 이름은 다산이 죽은 지 74년이 지난 후
1910년 순종4년 조정에서 내려준 다산의 시호인 문도공(文度公)에서 따온 이름이다.
가끔 고전을 읽지만 보통 한번 읽으면 다시 읽는 경우는 없는데 유일하게 세 번을 반복해서 읽어본 책이 다산의 [목민심서] 입니다. 아마 읽어 보신 분들은 느끼었겠지만 누구나 읽으면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이 글썽여지게 됩니다.
말도 안 되는 천주교도란 누명으로 1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는 사람이 썼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백성에 대한 그 한없고 넓은 책임감과 나라에 대한 간절한 충성심으로 쓰여진 [목민심서].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던 시기. 정조와 함께 조선의 개혁을 진두지휘 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려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다산
“너희 시대는 안녕하신가? “
“너희들은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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