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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말 도로찾기 / 심경호

문근영 2018. 11. 29. 03:58

제147호 (2009.8.12)


우리말 도로찾기


심 경 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1.


1948년에 대한민국 문교부는 『우리말 도로찾기』(조선교학도서주식회사, 단기4981년=서기 1948년 6월 2일 발행)라는 본문 36쪽의 소책자를 발행했다. 머리말 5쪽, 방침 1쪽, 일러두기 1쪽이 있고, 한 면을 비워두고 본문이 시작된다. 가로 12.7센티, 세로 18.4센티의 작은 판형으로, 표지는 본문이나 마찬가지로 약간 두터운 누런 색 마분지 같다. 잉크가 제대로 먹지 않아 납활자로 찍은 글자는 획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겉표지에는 책 중간을 묶은 철사가 드러나 있는데, 녹이 슬어 곧 삭아 끊어질 것만 같다.


외관은 볼품없지만, 이 책이 지닌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펼쳐 읽으면서 그 당당한 태도에 놀랐다.     


권두의 머리말(저자 미상, 그해 2월 15일 작성)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가 지난 삼십 육 년 동안, 포악한 왜정 밑에서, 얄궂은 민족 동화 정책에 엎눌리어, 우리가 지녔던, 오천 년 쌓아 온 문화의 빛난 자취는 점점 벗어지고 까다롭고 지저분한 왜국 풍속에 물들인 바 많아, 거의,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으니, 더욱 말과 글에 있어 심하였다. 우리의 뜻을 나타냄에, 들어맞는, 우리말이 있는데도, 구태여, 일본 말을 쓰는 일이 많았고, 또 우리에게 없던 말을, 일어로 씀에도, 한자로 쓴 말은, 참다운 한자어가 아니오, 왜식의 한자어로서, 그 말의 가진바 뜻이, 한자의 본뜻과는, 아주 달라진 것이 많다. 이제 우리는, 왜정에 더럽힌 자취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우리 겨레의 특색을 다시 살리어, 천만년에 빛나는 새 나라를 세우려 하는, 이때에, 우선 우리의 정신을 나타내는, 우리 말에서부터, 씻어 내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이 머리말에 따르면, 1946년 6월, 문교부장의 지휘를 받아 편수국은 ‘방금 우리가 흔히 쓰는, 일본 말을 조사하여 모으며, 그 말 대신으로 쓸만한, 우리말을 찾아’ 초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차의 회의 끝에 1948년 1월 12일에 위원회 총회에 붙여 통과하여 발포 시행하게 된 내용을 이 책자로 만들었다. 


이 소책자의 표제항 가운데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일본발음 윗첨자는 생략한다.


【曖昧(デアル)】모호(-하다)

(풀이) 曖昧 : 우리말 「애매」와 뜻이 다르다. 曖昧는 모호하다는 말이요, 우리말「애매」는, 죄가 없다는 말이 되므로, 이 말을, 우리말의 「애매」로, 번역해서는 아니 된다.
 

한국어 속의 한자어는 현재도 ‘왜색’이 범람한다. 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근본 원인은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동화정책을 표방한 학교교육을 통해 근세 이후 수입되거나 강제된 왜색 한자어들을 저들의 ‘국어’(일본어)로서 온존시키고 보급시킨 점에 있다고 본다.


조선총독부는 아동들에게 ‘국어’(일본어)를 교육하고 부수적으로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및 한문 교육은 ‘국어’ 교육의 활성화를 위한 방편이었지, 조선어 자체의 발전이나 한문 지식의 확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국어’, 조선어, 한문 교육은 식민지 아동을 ‘충량(忠良)한 국민(國民)’으로 만들어나가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2.


1948년 대한민국 문교부가 발행한 『우리말 도로찾기』는 오늘날 읽어도 흥미롭다. 그런데 이 책에서 지적된 ‘왜색’ 한자어가 현재도 활자화되고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은 정말 과거를 잘 잊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속이 뒤틀린다.


이 책은 표제어를 일본어순으로 정리하고, 각 표제어에 대해 대응하는 우리말을 들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 한해 앞서의 【曖昧】와 같이 (풀이)를 붙였다.

이 책의 앞 쪽에 나오는 몇몇 ‘왜색’ 한자어를 예로 들어 본다.


적자(赤字) : 결손, 부족.

안내(案內) : (1) 인도, (-하다), (모시다). (2) 알림. (알리다).

일생(一生) : 평생, 한 평생, 한 뉘

   (풀이) 한뉘 : “뉘”는 세대(世代)나 향수(享受)의 뜻으로, 예부터 써 내려오는 말이니, 이승을 이 뉘. 저승을 저 뉘, 혹은 뒷 뉘라고 하는데, 한 뉘는 곧 한평생이란 말로서, 어감과 품격이 좋게 된 말이다.

일석이조(一石二鳥) : 일거양득.

입구(入口) : (1)들목, 들어가는 데 (2)어구. 黃金町入口=을지로 어구.

내역(內譯) : 속가름. (풀이) 속가름 : “가름”은 분석(分析) 또는 해석(解釋)이란 듯의 말이니, 속 가름은 속 곧 내용을 해석한다는 말로써, 내역(內譯)과 서로 맞는 말이다.

이서(裏書) : 뒷 다짐, 뒷 도장, 뒷 보증.

매절(賣切レタ) : 다 팔렸다, 다 나갔다, 떨어졌다.

매도(賣渡シ) : 팔아 넘김.

매도증서(賣渡證書) : 팔아넘긴 표.

운(運) : 수, 운수. 


안내(案內)가 ‘왜색’ 한자어임을 지적한 것을 보고, 불현 듯 26년 전에 일본 교수에게 망신당한 생각이 났다. 조선시대 사역원에서 간행한 『첩해신어』에 ‘안내’라는 말이 나오는데, 거기에 주석이 붙어 있다. 일본 교수는 내게 어째서 여기에 주석이 붙어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당시 나는, 일본의 한자어는 모두 우리 땅에서 건너갔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뒤 나는 『한학입문』을 집필하면서 그 어원을 찾아 박스 기사로 실어두었다.


원래 안(案)은 문안(文案), 안건(案件)과 같이, 문서나 관례, 최종판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현대 중국에서는 ‘사건’이란 뜻이다. 일본에서는 관청의 선례를 안(案)이라 했다. 『속일본기』에 ‘검안내(檢案內)’라는 말이 나온다. ‘안(案) 속을 살핀다’는 뜻이다. 여기서부터 ‘안내’라고 하면 지침, 일의 속내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고 안내한다는 말이 파생되었다.  


『우리말 도로찾기』는 호칭과 관련해서 일본말의 ‘상[樣]’ 대신 ‘선, 씨, 님’이란 말을 쓰자고 제안했다. 씨는 여성에게, 님은 남녀 가리지 않고 쓰고, 선은 남자에게 존비 가리지 말고 쓰자고 했다. 중국 문헌이나 옛 문헌에 나오는 先, 仙, 善은 우리 조상들이 남을 높이는 말로 쓰던 ‘선’을 한자로 옮긴 것이며, 조선이나 선비의 선도 그 기원이 같으리라 생각한다고 풀이했다.


3.


『우리말 도로찾기』의 머리말에서 지적했듯이 누구는 말하기를 “‘말’이란 것은 뜻을 통하자는 것이 목적이니, 아무런 말을 쓰든지, 우리의 뜻만 통하면 그만이 아니냐, 구미 여러 나라의 말에도 끄릭(그리스)이나 라틴의 말이, 많이 섞여 있지 아니하냐.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의 독립사상이, 박약하다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 아니냐. 이제 갑자기 일본 말을 없애 버리자 함은, 한갖, 우리 문화 발전에, 장애가 있게 되지 않겠느냐” 한다. “이를 어찌 생각하면 이치가 있는 듯도 하다.”


더구나 『우리말 도로찾기』에 열거된 ‘왜색’ 한자어들 가운데는 우리말로 고치기 어려울 정도로 익숙하게 사용되는 것들이 많다. 간판(看板), 견본(見本), 만조(滿潮), 배급(配給), 배우(俳優), 비용(費用), 상호(相互), 수당(手當), 신고(申告), 신원(身元), 신청(申請), 주문(主文), 자본(資本), 장면(場面), 지불(支拂), 차별(差別), 출구(出口), 출원(出願), 출산(出産), 출하(出荷), 취급(取扱), 취소(取消), 친절(親切), 탄원(歎願) 등등이 그렇다.


누가 간판을 ‘보람판’이니 ‘보람패’로 고치겠으며, 누가 배우를 ‘노릇바치’라고 고치겠는가. 실제로 이 책은 대응어를 제시하지 않거나 우리말 대응어와 함께 아예 왜색 한자어의 우리 발음을 병기한 예도 많다. 배우(하이유)에 대해 노릇바치라는 우리말과 함께 배우라는 우리 한자음을 병기한 것은 그 한 예다. 


하지만 우리가 왜색 한자어를 쓰는 것은 구미 여러 나라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쓰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구미 여러 나라는 자기네 말이 없는 것을 옛 말에서 끌어 쓰고 이를 삭혀서 자기네 말에 보탠 것이어서 자주적 발전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말 도로찾기』의 머리말은 이렇게 논했다. 


“우리는 왜국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말과 문화가 말살을 당하여, 악착한 동화 정책 밑에서, 우리 어미말을 버려 가면서, 일본말을 국어로 쓰게, 강제 당한 것이니, 이는 패한 자의, 굴복적 퇴보이었던 것이다. 이 어찌 같이 말할 것이랴. 이 어찌 같이 말할 것이랴.”


한자와 한문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게 되자, 젊은 층의 일본식 한자어 남용과 수입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이 어찌 멀거니 있어야 하랴, 이 어찌 멀거니 있어야 하랴.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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