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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민론 / 강명관

문근영 2018. 11. 25. 05:53

제146호 (2009.8.6)


서민론


강 명 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학생들에게 한문문법을 가르칠 때면 꼭 드는 문장이 여럿 있다. ‘庶民子來(서민자래)’라는 문장도 그 중 하나다. 이 문장에서 주어는 ‘庶民(서민)’이고, 술어는 ‘來’다. 그럼 ‘子’의 문장 성분은 무엇인가? 학생들에게 물어보지만, 이제 막 한문공부에 입문한 까닭에 답이 나오지 않는다. ‘子’는 부사어다. 그래서 전체 문장의 뜻은 ‘서민이 자식처럼 왔다’가 된다. 서민이 자식처럼 오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문장의 내용으로 옮겨가 보자.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데, ‘서민’이란 말은


‘庶民子來’란 문장의 원출전은 『시경』 대아(大雅) 「영대(靈臺)」다. 한데 이 구절은 『맹자』의 「양혜왕장」의 맨 앞부분에 인용되어 더 유명해졌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어떤 맥락에서 『맹자』에 인용된 것인가. 양나라 혜왕이 새와 사슴을 놓아기르는 자기 전용 동산(요즘으로 치면 사냥터까지 포함한 거대한 정원이다)의 연못가에 있다가 맹자를 접견하고는 묻는다. “어진 사람도 이런 동산에서 새와 사슴을 보고 즐거워합니까?” 맹자는 “어진 사람이라야 이런 것을 즐길 수 있고, 어질지 못한 인간은 이런 것이 있어도 즐기지 못한다.”고 답한다. 어진 사람 운운하는 말은, 전쟁을 벌일 생각일랑 하지 말고 백성들 살림살이를 생각하는, 인품이 거룩한 임금이 좀 되어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인용하는 『시경』의 한 구절이 문제의 「영대」다. 유가에서 성인으로 치는 주나라 문왕(文王)이 멋있는 동산을 하나 짓기로 한다. 높은 관망대, 곧 영대도 만들고, 넓은 연못도 파고, 새와 사슴도 기르고 싶다. 공사를 시작하자, 백성들이 자기 아버지 일을 돕는 자식들처럼 새까맣게 몰려와 비지땀을 쏟으며 땅을 파고 건물을 짓는다. 이 사람들아, 몸 다칠라, 쉬었다 좀 천천히 하소, 이렇게 문왕이 말려보지만, 웬걸 더욱 손을 재게 놀려 며칠 안 가 동산이 완성된다. 이게 「영대」의 내용이다. 한데 백성들이 왜 왕의 동산을 만드는 데 이토록 열심이었던가? 그 동산은 이름이야 왕의 것이었지만, 백성들도 마음대로 드나들며 이용하고 즐길 수 있는, 사실상 백성, 곧 ‘서민’의 동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정계에서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야단이다. 그런데 서민이란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서민은 ‘많은 백성’이란 뜻이다. 그 이상의 뜻을 찾기 어렵다. 즉 구체성이 없다는 말이다. 한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서민이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일 것 같지는 않다. 곧 몇 십, 몇 백 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거나, 연봉 몇 억 이상의 소득이 높고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 해서 사람들이 겁을 내는, 휘두를 만한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닐 터이다. 이런 전차로 서민은 분명 직장에서 잘린 실업자거나, 언제 잘릴지 몰라 안절부절 하는 직장인이거나, 불평등에 몸서리치는 비정규직이거나, 재개발로 살 곳을 잃고 쫓겨난 사람이거나, 자식들 교육비 때문에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부모들일 터이다.


‘노동자’나 ‘친노동자 정책’은 꺼리면서, ‘서민’이란 말만


이런 사람들을 한 마디로 줄여 표현한다면, ‘노동자’가 가장 가까울 것이다(물론 여기에 소상공인도 포함될 터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를 제외하고 서민이라 할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렇다면, 애매한, 그리고 중세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서민이란 말 대신 노동자라고 분명히 밝히고, ‘친서민 정책’ 대신 ‘친노동자 정책’을 펼치는 것이 훨씬 알아듣기 쉽고, 구체성이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노동자’ ‘노동운동’ 등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어휘가 된 것 같다. 이상도 하다. 구체성 있고 알아듣기 쉬운 말은 입에 올리기 싫어하고, 뜻도 애매한 어휘를 즐겨 사용하니 말이다.


어떤 높으신 분이 ‘서민’이란 어휘를 즐겨 사용하니, 어떤 정치인은 ‘민생’이란 낱말을 즐겨 사용한다. 한데 바라건대 그 어휘의 뜻을 먼저 밝혀주셨으면 퍽 고맙겠다. 그렇지 않으면, 서민과 민생은 정치인의 무능과 나태를 은폐하고자 하는 둔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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