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민 환(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일제 강점기에 토호들이 재미 본 것이 양조장 경영이다. 전에야 아무나 술을 담가 마셨지만 총독부가 법을 만들어 일정 지역에 양조장 하나만을 허가해 술을 만들어 팔게 했다. 지역 독점을 총독부가 뒷받침한 터여서 양조장 주인은 땅 짚고 헤엄치는 식으로 돈을 벌었다. 광복 이후에도 그런 제도가 유지되어 곳곳에서 양조장 주인들이 위세를 떨쳤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국회의원이나 도의원이 되었다.
독점 경영을 제도적으로 지원해줘 누린 호시절
60년대 이후에 돈을 많이 번 곳이 방송사다. MBC가 대표적인 예다. 부산에서 부산문화방송을 운영하던 김지태 씨는 서울에서 민방허가를 얻어냈다. 이 방송은 초기에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월말이 다가오면 중역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돈을 구해와 월급을 주기도 했다. 아나운서들은 방송실마저 냉방이 되지 않아 여름이면 밀폐된 방송실에서 탁자 아래 얼음 대야를 갖다놓고 발을 담근 채 방송을 했다. 윗부분만 화면에 나오기 때문에 어떤 아나운서는 바지를 벗고 방송을 했다.
그러나 이 방송사에 곧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광고 덕분이었다. MBC에 광고를 가장 많이 낸 것이 일동제약의 ‘아로나민’과 동아제약의 ‘박카스’였다. 두 제품이 텔레비전 광고를 타자 판매가 폭증했다. ‘아로나민’은 MBC에 힘찬 활력을 불어넣었고 ‘박카스’는 MBC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두 제품의 성공 신화는 광고 전성시대를 열었고 그 덕에 MBC는 탄탄한 경영기반을 구축했다.
우리나라에서 광고는 그야말로 압축적으로 성장했다. 그 시절에 10년이면 대체로 열 배씩 GNP가 늘곤 했는데 광고비는 스무 배 가까이 뛰었다. 광고 규모가 폭증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 제품은 모두가 신제품이나 마찬가지였다. 뭐가 돈이 된다 하면 너도 나도 유사품을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품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승부의 관건이었고, 인지도를 높이는 데는 광고가 묘약이었다.
이렇게 광고가 폭증하면 방송사 수가 늘어야 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방송시장에 신규 업자가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방송뿐만이 아니라 신문시장도, 출판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정책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도 고수했다. 총독부가 신규 업자의 시장 진입을 막아 일제 강점기에 양조장이 떼돈을 벌었다면 70년대 이후 방송사도 비슷한 정책 덕에 거대자본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양조장이나 방송사나 그런 호시절은 갔다. 시골 양조장은 대부분 경영난을 겪다가 문을 닫았고 일부가 남아 있지만 목하 고전중이다. 방송사도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양조장과 방송사가 곤경에 처한 이유는 비슷하다. 양조장이나 방송사나 독점경영의 제도적 지원이 사라졌다. 술 시장에 전에는 막걸리나 소주가 고작이었으나 이제는 위스키나 포도주에 중국술까지 넘쳐흐른다. 방송시장에도 전에는 라디오와 텔레비전뿐이었지만 요즘은 케이블에 위성에 IPTV에 인터넷에 뭐에, 매체 종류를 세기도 쉽지 않다. 소비자 입맛도 까다롭기 짝이 없다.
광고시장의 변화로, 방송사 광고수입도 달라져 거기다 방송은 양조장과는 다른 이유로 허덕거리고 있다. 광고 사정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텔레비전을 보면 황금시간대에도 기업이나 상품 광고를 보기가 쉽지 않다. 눈 먼 돈 펑펑 쓰는 지방자치제 광고로 방송사는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있다.
앞으로 방송광고 사정이 크게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전처럼 자본주의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광고비를 쏟아 부으면 그만큼 팔리던 시대도 지났다. 소비자는 인터넷에 들어가 살 상품을 정해 온라인으로 직거래한다. 그래서 세계의 광고주들이 인터넷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
양조장과 방송사 사이에 다른 현상은 또 있다. 너도 나도 양조장을 하려 한다는 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그야말로 우수마발이 다 방송 사업에 군침을 흘리는 것은 판이한 현상이다. 신문사들도 방송을 겸영하고자 한다는데 20년 뒤에 문 닫을 신문사가 10년 뒤에 문 닫는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하기야 자기 돈 가지고 하겠다는데 할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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