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눈물
심 경 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1.
스승의 날이라는 5월 15일, 강화도를 사랑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강화도를 돌아보았다. 서여 민영규 선생님은 77세 되시던 해에 나를 제자로 받아주시고 이 강화학파의 유적지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셨다. 초피봉과 옹일산이 바라보이는 곳 신작로에서는 차를 버리시고, 나무와 잡풀이 우거진 가파른 산을 앞서 오르셨다. 아름드리나무가 솟아나 있는 초원 이충익의 무덤 앞에서, 종이봉투에 싸 들고 오셨던 술병을 꺼내셨다. “잔을 올려 드려요. 앞으론 심교수가 다른 사람을 안내하셔야지.” 피택(陂澤)의 물은 그때처럼 질펀하거늘, 선생님의 미소는 이제 접할 수 없다. 만년의 선생님을 서교동 자택으로 찾아뵈었던 날, 일어나 앉지 못하시고는 눈길만으로 대화를 하시다가 눈가에 눈물을 보이셨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떨어졌다. 그것이 벌써 서너 해 전이다.
강화학파 유적을 답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여러분들 도움으로 더 많은 묘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너른 논에 가득 한 물 위로 가는 비가 떨어지는 풍경은 마음을 활연하게 틔워주었다. 정경부인 청송심씨의 음택이 있던 자리에 섰을 때는 기운이 몸 아래쪽에서부터 서서히 자라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정경부인은 심씨는 1866년의 병인양요 때 여귀가 되어 적을 무찌르겠다고 음독 자결한 이시원(李是遠)의 부인이셨다. 그 시신은 이제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고 하는데, 손(巽)좌의 그곳은 양쪽 나직한 구릉이 청룡과 백호가 되어 돌아나가 여전히 부드러운 바람이 흘러가는 생명의 공간이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망월평은 몽골의 침략에 맞선 고려 정부의 기상을 느끼게 했다.
그러다가 계명의숙(啓明義塾)이 있었던 곳의 밭두둑에서 서서, 만주로 망명한 이건승(李建昇, 1858-1924)이 제자들로의 은수저 선물을 받아들고 눈물을 흘렸던 일이 생각났다.
2.
이건승은 전주이씨 덕천군파의 인물로, 강화도 사기리에서 태어났다. 이시원의 손자요, 영재(寧齋) 혹은 명미당(明美堂)이라는 호로 잘 알려진 이건창(李建昌)의 아우이다.
이건승의 집안은 1755년의 을해옥사 때 온 집안이 식은 재처럼 되었으나, 하곡 정제두의 조선양명학을 발전시켜 새로운 인간학을 열었다. 이건승 자신은 1891년에 진사가 되고, 1894년 갑오정부에서 주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있자, 하곡 정제두의 6세손인 정원하(鄭元夏)와 함께 죽기로 다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에 독립권이 없으면 인민들이 자기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1906년에 강화도에 계명의숙을 세우고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개인의 마음은 미미하므로 뭇사람의 심지(心智)를 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신학문에 힘써서 지식을 개광(開廣)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후진을 양성하는 것만으로는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것은 마치 정위 새가 원한을 씻으려고 자갈을 물어다 동해 바다를 메우려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1910년 8월 29일에 강제 합병이 있자 이건승은 9월 24일에 사당을 하직했다. 12월 7일, 만주 회인현 서쪽 40리 흥도촌에 이르러, 먼저 망명해 있던 정원하의 집에 머물렀다. 1911년 3월 22일에는 강구촌에 전방을 사서 약을 팔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1914년에는 접리촌으로 이사했다. 이때 민단(民團)에 가입하라는 일본 순사의 요구를 물리쳤으므로, 이웃 중국인들은 그를 ‘호적 없는 이씨 늙은이’라고 불렀다. 교리 벼슬을 했던 안효제(安孝濟)도 망명해 와서 1914년 여름부터 3년간 이웃에 살았다. 안효제는 일본이 대한제국 고관들을 매수하려고 주는 은사금이란 것을 받지 않아 창녕의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서는, “어찌 이 땅에 살아 일본민이 되랴?” 싶어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
환갑을 맞은 이건승에게 계명의숙 졸업생 열두 명이 은잔과 수저를 보내 왔다. 이건승은 세 수의 시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시의 제목은 「내가 일찍이 병오(1906)년에 사립계명의숙을 세웠었다. 졸업한 열두 명이 은잔과 시저로써 멀리 환갑을 축수하니 그 뜻이 느꺼워 시로서 고마워한다[余嘗於丙午歲 建私立啓明義塾 卒業十二人 以銀盃及匙箸 爲弧辰之壽 其意可感以詩謝之]」이다. 정양완 선생님의 번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엾어라. 정위 새여 작디작은 몸
바다를 메우려는 뜻 이루지 못한 채 원통하게 괴로움만.
어찌 뜻했으리 그 당시 처음 발원이
이제 와서 겨우 열 사람의 은잔 은수저를 받게 될 줄이야!
可憐精衛?然身, 塡海無成枉苦辛.
豈意當年初發願, 如今只得十家銀.
망상(妄想)만 어수선터니 나라는 망하여 서글픈데
뜻이 큰 영재들 모조리 서로 헤어졌네.
세상의 변고 이 눈으로 보니 누군들 변치 않으랴만
오직 자네들 마음만은 옛날과 똑같구려.
瓮算紛?瓮破悲, 英才落落盡相離.
眼看滄海誰無變, 惟有君心似舊時.
계명이라 아로새긴 글자 획도 새롭고
은빛만 번쩍번쩍 환갑을 느껍게 하네.
어쩌자고 온갖 생각 모두가 재처럼 사윈 이 때
다시금 이 늙은 영감의 눈물이 수건을 적시게 하는가!
刻鏤啓明字?新, 銀光燁燁動弧辰.
如何萬念俱灰日, 復使衰翁淚?巾.
이 날 스승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열두 명의 제자들은 멀리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3.
이건승은 1924년에 만주에서 이승을 떴다. 그의 뼈는 어디에 묻혔는지, 이번에도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그의 열두 명 제자의 재전제자가 되어, 그가 흘렸을 눈물의 의미를 되새겼다. 아흔의 서여 선생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의 의미도 함께 생각해 보았다.
통진에 있는 정술인(鄭述仁) 묘를 마지막으로, 직행버스를 타고 송정역으로 향했다. 저녁 여섯시 반부터 학교 근처에서 교육대학원 재학생들이 사은의 자리를 마련한다고 했다. 늦게라도 참석하려 한 것이지만, 전원일기를 촬영했다던 양촌면 부근에 이르렀을 때 벌써 7시 50분, 송정역에는 여덟 시가 훨씬 넘어야 닿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아직 학생들로부터 감사의 뜻을 받아들일 나이가 아니다. 더구나 큰 선생님들께 너무 많은 학은을 받고도 그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면서, 빗발이 타고 오르는 버스 차창의 저쪽 어둠을 가만히 응시했다.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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