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백년 동안의 학술사를 고찰해 보면 그런대로 의미 깊고 재미난 학술논쟁이 많았음을 알게 됩니다. 대표적인 학술논쟁의 하나는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의 7년에 걸친 성리철학의 논쟁이었습니다. 만나서 함께 앉아 얼굴을 보면서 벌인 논쟁도 아니고, 편지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벌인 7년의 긴긴 논변은 학술논쟁의 최고봉임에 분명했습니다.
그 뒤에도 학술논쟁은 이어집니다. 당파로 나뉘어 당색을 달리하면 논리도 다르던 때가 도래하고 말았는데, 당쟁이 계속되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 논쟁의 하나가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1762~1836)과 문산 이재의 (1772~1839)의 성리학 논쟁입니다. 퇴계와 고봉은 사제간으로 26세의 연령의 차이는 있었지만 당파의 문제는 없었으나, 다산과 문산은 10세의 연령 차이도 있으면서 남인과 노론이라는 당파의 차이가 컸으니 학문 논쟁은 더욱 뜨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3년 동안 계속된 다산과 문산의 논쟁은 퇴고(退高)의 왕복서찰처럼 편지로 진행되었으나 끝내 의견의 합일점을 찾지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퇴계는 고봉의 의견을 참고하여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였고, 퇴계의 지적을 받은 고봉은 또 다른 면에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여 논쟁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보이지만, 다산과 문산은 팽팽한 의견의 대립으로 끝났으나 그들의 우정은 더욱 깊어져, 논쟁 뒤에도 참으로 가깝게 지내고 자주 만나면서 학문을 논하고 시주(詩酒)를 즐기는 멋진 만남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런 아름답고 진지한 학술논쟁이 몇 년 동안 계속되려면 특별한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산이 피력하였습니다. “학문과 사변(思辨)의 업적은 참되고 정성스러운 마음이 아니고는 이룩될 수 없다. 하나라도 속임과 허위가 개재되면 참되고 정성스럽다고 말할 수 없다”(學問思辨之功 非誠不立 一有詐僞 不可曰誠 : 答李汝弘載毅)라고 말하여 속임과 거짓이 끼워 있는 한, 아무리 현란한 언어나 미사여구로 논쟁을 벌여도 소득이 없다는 것이 다산의 뜻이었습니다.
진실을 밝히고 진리를 찾아내 학문과 사변의 업적을 이룩하기 위한 전제가 바로 성(誠)이라는 글자 하나라는 것입니다. 요즘도 많은 학문과 사변의 논쟁이 있고 토론과 세미나가 계속되지만 얻어지는 결과가 무엇인가요. 참과 정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혀 진실과 진리를 외면하는 한 논쟁의 업적은 이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론의 논쟁, 인터넷의 토론, 끝내는 육두문자로 자기편만 옹호하다가 끝나는 논쟁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7년, 3년 동안이나 진지하고 아름답게 논쟁을 계속했던 옛날 학자들의 인격의 거룩함이 다시 생각되었습니다.
박석무 드림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목록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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