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훌륭해도 아들이 출중한 인물인 경우에는 아버지는 가리워지기 마련이고, 아버지가 탁월하면 아무리 잘난 아들이라도 묻히기 마련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다름 아닌 다산의 집안입니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1730-1792)은 번암 채제공이 일대기로 기록한 「진주목사정공묘갈명」에 나타나 있듯이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였고 학문도 높았지만, 특히 이치(吏治)에 밝아 현감·군수·부사·목사 등의 5개 고을의 목민관 생활에서 훌륭한 치적을 남긴 관료였습니다. 자애롭고 통찰력 깊은 목민관이면서도 의리에 밝은 선비의 자질이 넘쳐흘렀던 분이었습니다. 다산의 아들인 정학연·정학유 형제도 대단한 선비에 학문과 식견이 높았고 시문에도 뛰어났으나 아버지의 큰 그늘에 가려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못함이 아쉽기만 합니다.
그 중에서도 다산의 아버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라도 본격적으로 거론할 필요가 요구됩니다. 실제로 다산이 그만한 학문과 사상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직접 글을 가르쳐주고 학문의 방향을 정해준 아버지였습니다. 어린 시절 글을 가르쳐준 아버지, 글만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와 방향을 정확하게 일러준 가장 가까운 스승이었습니다. “다산의 덕기(德器)가 관홍하고 경전에 정미(精微)하였음은 모두 아버지의 덕택이었다”라는 다산연보의 표현처럼, 다산의 인격과 학문이 아버지에게서 나왔음을 명확히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다산이 한창 글 배우기에 물이 오른 10세 전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아버지가 집에서 본격적으로 다산을 가르쳤다는 기록에서 보듯, 다산의 학문은 아버지로부터 기본을 닦았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많이 남겼건만, 다산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하여는 짧은 「선인유사(先人遺事)」라는 글 한편만 남겼습니다. 당시의 어진 선비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훌륭한 정승감이었다는 한마디로 아버지의 큰 역량을 암시하는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채제공은 「묘갈명」에서, 자신이 퇴출되어 모두가 만나기를 꺼려할 때 유일하게 자주 찾아왔으나, 다시 정승으로 조정에 들어갔을 때에는 전혀 얼굴도 보이지 않던 훌륭한 인격에 대한 칭찬을 나열했습니다. 출세에 방해가 되는 일은 의리를 위해 과감히 행하면서도 출세에 도움이 되는 일은 구차스럽게 하지 못하던 인품에 채제공은 높은 점수를 매겼던 것입니다.
그런 훌륭한 다산 아버지에 대한 천착이 부족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제라도 다산의 「유사」와 번암의 「묘갈명」에 의거해서라도 그의 훌륭한 인격과 치적이 제대로 드러난다면 다산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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