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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외규장각, 그 영광과 수난의 역사 / 신병주

문근영 2018. 9. 28. 00:52

제132호 (2009.3.25)


외규장각, 그 영광과 수난의 역사


신 병 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가 1866년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한 우리의 문화재. 바로 의궤이다. 아쉽게도 현재는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조 시대 외규장각을 짓고 의욕적으로 이곳에 보관하고 있던 의궤는 왜 사라졌던 것일까?


 자료의 안전한 보관을 위해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1782년(정조 6) 2월 당시 국왕 정조의 비상한 관심아래 추진되었던, ‘강화도 외규장각 공사의 완공’을 알리는 강화유수의 보고가 올라왔다. 1781년 3월 정조가 강화도에 외규장각의 기공을 명령한 지 11개월이 지난 즈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왕실의 자료들을 비롯하여 주요한 서적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보관되었다. 이후 100여년간 외규장각은 조선후기 왕실문화의 보고(寶庫)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784년에 편찬된 『규장각지(奎章閣志)』에 따르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행궁(行宮)의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외규장각은 인조 이래 강화도에 행궁과 전각이 세워지고 왕실관계 자료들이 별고(別庫)에 보관된 것을 계기로, 국방상 안전하고 보다 체계적으로 이들 자료들을 관리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로써 외규장각은 창덕궁에 위치하면서 조선후기 문화 운동을 선도했던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곳을 ‘규장외각’ 또는 ‘외규장각’이라 부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규장각은 정조 이후 그 위상이 커지면서 열성조의 어제, 어필을 비롯하여, 국가의 주요한 행사 기록을 담은 의궤, 각종 문집 등 조선후기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을 간행하고 이를 보존해 왔다. 외규장각에는 이 중에서도 어첩, 어필, 의궤 등 왕실 관련 자료들이 집중적으로 보관되었다.


국왕이 친히 열람한 어람용(御覽用) 의궤 대부분은 외규장각에 보내졌다. 어람용 의궤는 국왕이 열람한 후에 규장각에 보관하였다가 1781년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한 후에는 이곳에 옮겨 보관한 것이다. 어람용 의궤는 종이로 고급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하고 사자관(寫字官)이 해서체(楷書體)로 정성을 다해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했다. 어람용은 장정 또한 화려했다. 놋쇠 물림(경첩)으로 묶었으며, 원환(圓環), 5개의 국화동(菊花童) 등을 사용하여 장정하였다. 표지는 비단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서 왕실의 품격을 한껏 높였다. 어람용이 아닌 일반 의궤에는 초주지 보다 질이 떨어지는 저주지(楮注紙)가 사용되었으며, 검은 선을 두르고 표지는 삼베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장정에는 정철(正鐵)과 박을정(朴乙丁) 3개가 사용되었다. 특히 어람용 의궤에 표현된 반차도(班次圖:왕실의 주요 행렬을 그린 그림)를 보면 문외한이라도 그 화려함과 품격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화려하고 품격이 있는 의궤들,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손에


외규장각은 정조대의 영광을 뒤로 하고,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강화도에 주둔했던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우리 문화의 보고(寶庫)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은괴 19상자와 함께 그들의 눈을 자극한 것은 채색 비단 장정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소장된 각종 도서 중에서 유독 의궤류만을 집중적으로 약탈한 것도, 화려하고 품격이 있는 의궤의 장정과 비단표지, 그리고 의궤에 그려진 채색그림이 지닌 가치와 예술성이 벽안의 눈에 번쩍 띄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89종 340여책의 의궤는 이들의 퇴각과 함께 약탈당했으며, 당시 화염에 휩싸였던 외규장각은 그 흔적만을 남긴 채 백여년을 뛰어넘어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현재 프랑스에는 297책의 의궤가 보관되어 있다.


외규장각에 소장되었다가 약탈당한 의궤가 다시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가 1866년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했던 『휘경원 원소도감의궤』라는 책을 한국 정부에 반환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이후였다. 1993년 프랑스에서 의궤 2책이 반환되어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의궤의 선명한 글씨와 아름답게 장식된 장정을 보고 감탄하였다. 의궤가 이처럼 원형의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의 의궤 자체가 뛰어난 재질의 종이로 만들어졌고, 의궤에 첨부된 그림의 물감은 천연의 광물이나 식물에서 채취하여 그 색채의 생명력이 오래 갔기 때문이었다. 의궤에는 조선시대 우리 선인들의 뛰어난 기록 보존의 정신이 함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록문화의 꽃, 의궤를 돌려받으려면


1866년 강화도를 침공했던 프랑스의 해군장교 주베르가 ‘이 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고 고백했듯이, 조선인들은 누구나 책을 가까이 했으며 이러한 조선 문화의 최선봉에 규장각과 외규장각이 있었다. 외규장각 의궤는 그런 기록문화의 꽃이었다.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정수를 담아왔던 외규장각 의궤 반환 문제가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1860년 아편전쟁 때 중국이 프랑스에게 약탈당한 원명원의 청동상 2점의 반환이 중국과 프랑스의 외교 분쟁이 되면서, 우리의 약탈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의궤 반환을 둘러싸고 우리 정부와 프랑스 정부 사이에는 몇 차례의 협상이 오고 갔지만, 명쾌한 소식은 아직 들려오고 있지 않다. 양국 간의 입장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의궤를 돌려받는 일에는 양국간의 신뢰와 합의,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에 대한 존중과 관심, 국제관계 등 다양한 변수가 작용할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의궤와 같은 국가기록물의 가치를 알리는 연구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많은 연구자가 의궤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리는 연구를 수행해갈 때 의궤에 대한 인지도는 높아질 것이고, 의궤가 꼭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에 대한 국내외 인식도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2009(기축년) 다산 묘제 안내

오는 4월 7일, 남양주 다산유적지에서 다산선생 서세 173주년을 기리는 묘제가 열립니다. 묘제와 더불어, 다산에 관한 강연과 영화 상영이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 일시 : 2009년 4월 7일(화) 오전 10시~오후 3시
· 장소 :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유적지
· 참가비 :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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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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