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군정 이래 계속된 미국의 점령자 같은 태도
1950년 6월 25일에 터진 한국전쟁 이후 오래 동안 우리나라와 미국의 관계는 ‘우방’ 또는 ‘동맹’이라는 말로 표현되어왔다. 그보다 농도가 더 짙은 ‘혈맹’이라는 어휘도 많이 쓰였지만, 이 말은 1980년대부터 사용 빈도수가 아주 낮아진 것 같다.
1945년 8월 15일에 일제가 미국에 항복하고, 미군이 한반도의 38도선 이남에 진주해서 그해 9월 8일 ‘미합중국 군사정부’를 세운 뒤 1948년 8월 15일에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서기까지 두 나라는 실질적으로 통치자와 피지배자의 성격을 띠게 된다. 남한에 들어온 미육군 제24군단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이 군정의 수뇌라면 A. V. 아놀드 소장은 실무 책임자인 군정장관이었다.
미군정은 3년 가까이 38도선 이남 지역을 통치하는 기간에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토대를 다진다. 먼저, 좌우익이 극렬하게 대립하던 그 시기에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의 정치적 주도권을 확고하게 해주고, 박헌영을 최고지도자로 한 좌익을 법적, 제도적으로 압박해서 불법조직 또는 ‘반미군정 정당’으로 몰아붙인다. 또한 미군정은 자문기구나 정책입안 부서에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을 중용함으로써 좌익에 맞설 교두보를 쌓는다.
친일파를 중용한 미군정
미군정이 친미· 반공주의자들에게 장차 정부 수립의 주도권을 맡기도록 하는 것이 트루먼 행정부의 정치적 전략이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따라 미군정청은 유명한 친미주의자인 이승만을 우익의 지도자로, 정치적 기반이 약한 그를 도울 세력으로 한민당을 선택한다. 그 결과로, 조선사람으로서 친일행위를 일삼은 총독부 관리, 독립운동가들을 ‘사냥’하고 고문하던 일제의 경찰 같은 자들이 ‘반민특위법’의 응징을 모면하고 ‘독립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일을 맡는다. 심지어는 국군을 창설하는 일조차 나중에 그들이 주도한다.
백범 김구와 우사 김규식의 민족주의 진영은 한반도에 ‘반쪽 정부’가 서는 데 반대하지만, 암살을 당하거나 역부족으로 남북의 분단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지역에 김일성 주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래 지금까지 한민족은 61년이나 분단체제에서 살고 있다. 제2차 대전 뒤 두 동강이 난 나라 중에서 아직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유일한 민족이라는 ‘기록’을 안은 채.
미국은 남한 군정기간에 법률적 통치 주체로서 조선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데, 단독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실질적인 지배권을 놓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소규모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철수한 뒤 남한을 ‘극동지역 반공의 보루’로 굳히는 정책을 펼치다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자 유엔의 승인을 받아 연합군을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개입한다. 1953년 7월 27일에 미국과 북한 간에 휴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 한국 정부는 전시작전권마저 미국에 넘기고 아직까지도 그것을 되돌려 받지 못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 작전권을 가진 미군의 최고 통수권자이다. 현재 미군은 한미연합사령부의 지휘 아래 육군 2만여 명을 비롯해서 공군과 해군, 해병대까지 합치면 3만명 가까이가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은 2008년 11월 3일 현재 여군을 포함해서, 육군 61만3,000여 명, 해병대 21만9,000여 명, 해군 37만1,000여 명, 공군 32만4,000여 명에 해안경비대 4만2,000여 명까지 합치면, 1백60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린 군사대국이다. 이 수치는 중국보다 훨씬 적지만 전투기, 항공모함 같은 첨단무기의 위력은 그 어떤 나라도 따를 수가 없다.
한국의 전시작전권 돌려받기
바로 이런 군사적 초강대국이 한국의 전시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의무적으로 참전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부터 날카로운 논쟁의 초점이 되어온 전시작전권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1991년에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서울신문> 창간 46돌 기념회견에서 “1995년까지는 평시작전권을 한국군이 넘겨받고 2000년까지는 평· 전시의 작전지휘권 모두를 한국군이 이양받는다는 것이 큰 방향”이라고 발표한 뒤 1994년 12월 1일 0시를 기해 한국 정부는 44년만에 미군에게서 평시작전권을 환수한다. 그때까지는 부대와 병력의 이동, 주요 훈련 같은 것을 한미연합사령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했다.
2005년 10월 1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국군의 날 57돌 기념식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이하 전작권) 행사를 통해 스스로 한반도 안보를 책임지는 명실상부한 자주군대로 거듭 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발언에 대해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은 ‘북한의 남침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위험한 발상’이라고 공격하고, ‘자주국방’을 끈질기게 주장해온 진보 진영은 적극 환영한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2005년 한미안보협의회에서 전작권을 한국이 이양받기로 합의한 뒤 2006년 한미정상회담에서 그것을 확정한다. 정부가 그 시기를 2012년으로 정하고 미국에 통보하자 미국 정부가 오히려 3년을 앞당기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수진영과 그들을 대변하는 언론은 소리를 높여 전작권 돌려받기를 거부한다.
‘작전통제권 제대로 되찾기’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잠잠한 듯이 보이던 이 문제가 2009년 2월 중순에 되살아난다. 언론의 보도를 보면, 2012년 4월을 목표로 추진 중인 전작권 이양을 한국 합동참모본부와 주한 미군사령부가 긴밀히 협의하면서 차질없이 진행하고 있다고 국방부가 ‘정책뉴스’를 통해 밝혔다고 한다. 또 합참은 전군적 추진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이미 조직 개편에 착수했다는 뉴스도 나왔다. 어찌 된 셈인지 이런 움직임을 보고도 조선 · 중앙· 동아일보가 노무현 정부 시절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격세지감이 든다. 한국의 보수진영이 오바마 행정부의 아래와 같은 전략을 간파하고 조용히 넘어가려는 것일까?
우선, 오바마 정부는 ‘한-미 동맹’을 자신의 한반도 관련 정책의 성공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여기며, 미국의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태도다. 21세기 ‘한-미 동맹 미래비전’에 대해서는 여태까지보다 더 광범위한 공동 비전을 추구하는 포괄동맹을 강조하면서, 한-미 동맹이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정책의 일부분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과 6자 회담 참여국들에 의한 6 · 25 전쟁의 종식,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안보, 북-미 관계 정상화 등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량살상무기 비확산, 반테러, 에너지안보, 마약 밀거래 금지, 유행성 질병 퇴치 등 초국가적 문제들, 중국의 부상 등 여러 도전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응전하는 포괄적인 동맹의 비전이 필요하다는 태도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의 2009년 2월 16일자 <한겨레> ‘시론’에서)
전작권 돌려받기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나온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오혜란 평화군축팀장은 2월 13일 “국방부 설명대로 현행 한미연합사를 한미 공동방위체계로 대체하면 대미 종속성은 오히려 심해진다. 현재 협상대로라면 전시 작전통제권뿐 아니라 위기관리권과 평시 작전통제권까지 미국에 넘겨주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오마이뉴스> 2009년 2월 16일자)
인터넷에서는 ‘작전통제권 제대로 되찾기’ 1만인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이 운동은 “국방부가 작전통제권 환수를 핑계로 2020년까지 621조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첨단무기를 도입하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북아 군비경쟁이 치열해지고 군사적 긴장이 높아져 한반도 평화는 멀어진다’고 전망한다.
전작권 환수의 원칙과 방침이 바른 것인지, 오바마 행정부가 진정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합리적인 정책을 집행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오바마 대통령이 전임자들처럼 한국을 미군의 점령지처럼 보는 오만한 자세를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사법주권을 포기한 SOFA
2002년 초여름에 경기도 양주시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한국과 미국 사이에 날카로운 대립과 갈등을 일으켰다. 그해 6월 13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열네 살의 신효선과 심미순 두 여중학생이 무게 50여 톤의 미군 장갑차에 깔려 무참히 숨진 사건이 기폭제였다. 미군 제2사단 소속의 궤도차량을 운전하던 두 병사가 좁은 도로를 내려가다가 미처 그들을 보지 못하고 치었다고 미군 당국이 발표했으나, 첨단설비를 갖춘 그 차량이 바로 앞에서 브레이크만 밟았어도 그런 참사는 없었으리라는 한국인들의 주장이 터져 나왔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약칭 SOFA)에 따라 미군 당국은 ‘차량의 안전한 운행을 소홀히 해서 과실치사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두 병사를 미군사법정에 세운다. 두 사람이 ‘부주의로 인한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자 우리나라 법무부는 한국 법체제에 따라 우리나라 법정에서 재판을 하게 그들의 신병을 넘기라고 주한미군사령부에 요구하지만, “지금까지 미국은 세계 어디에서도 공무 중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예가 없다”며 거부한다.
(*한·미 SOFA는 주한미군의 법적인 지위를 규정한 협정이다. 일반적으로 외국 군대는 주둔국의 법질서에 따라야 하지만, 미국은 해당국가와 주둔군지위협정을 맺어 쌍방 법률의 범위 안에서 일정한 편의와 배려를 제공받는다. 예전에는 ‘한·미행정협정’이라고 불렀으나, 행정협정은 국회의 비준 없이 행정부 간의 서명만으로 발효되는 간단한 형식의 조약으로서 국회의 비준 절차를 거친 한·미 SOFA와는 다르다는 해석에 따라 ‘주둔군지위협정’으로 부르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장갑차의 두 운전병이 ‘무죄’로 석방되자,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의 열기에 가려져 있던 그 사건이 국민들의 관심을 끌면서 11월에 ‘촛불집회’가 열린다. 이런 집회가 전국으로 번지면서 한때 한국과 미국 정부 사이에 외교적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끝까지 평화적 시위를 함으로써 12월 19일의 대통령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보수적인 이회창 후보를 누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SOFA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다.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터진 뒤, 남한에 다시 진주한 미군은 전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일체의 재판권을 부여받는 ‘대전협정’을 체결했는데,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순순히 동의함으로써 사법주권을 포기하는 협정이 맺어진 것이다. 그 뒤 13년만인 1966년 7월 9일에 한국정부 대표인 외무장관과 미국정부 대표인 국무장관이 조인한 한·미 SOFA가 1967년 2월 9일 발효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요구에 따라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는 한편, 베트남전에 파병한 대가의 일부가 SOFA였다고 전문가들이 주장한 바 있다.
SOFA를 개정해야 마땅
SOFA는 1991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으나 한국에 불리한 규정은 별로 나아진 바가 없다. 가장 독소적인 부분은 제22조 3항으로서, ‘오로지 미국의 재산이나 안전에 대한 범죄, 또는 미군과 미군속 및 그들의 가족 내부에서 행해진 범죄, 공무집행중의 범죄’에 대해서는 미군당국이 1차적 재판권을 갖고, ‘기타 공무 외 범죄’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1차적 재판권을 갖는다고 되어 있다.
SOFA와 관련된 미군 범죄와는 다르지만 미국이 쿠바 영토 안에서 ‘운영’해온 관타나모수용소는 근래 국제적으로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 수용소가 들어 있는 관타나모만의 미해군 기지는 1백년도 전에 미국이 차지한 땅이다. 그곳은 미국이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나라에 자리잡은 유일한 해군기지로서, 2002년 이래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전쟁에서 ‘적국의 전투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잡아다 가둔 곳이다. 이런 일은 제네바협정에 어긋날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데도 부시 2세는 대통령으로서 공공연히 그런 조치를 취했다. 재판도 받지 않은 채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폭행과 고문을 당하거나 자살한 사건이 폭로되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로널드 레이건 이래 대통령들이 즐겨 쓰던 ‘불량 국가’(rogue state, 망나니 또는 악당의 나라라는 뜻)라는 말이 미국 자신에게 돌아가게 하는 짓이었던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한 지 이틀 뒤인 2009년 1월 22일, 1년 안에 관타나모수용소를 폐쇄하고 그의 첫 임기 안에 피수용자들이 미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가 상식과 이성을 존중하는 ‘법의 정신’에 따라 중대하고도 명백한 죄를 저지른 미군과 군속 및 가족이 한국의 민간법원에서 재판을 받도록, 한국정부와 협의해서 SOFA를 개정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2008년 12월 18일 국회의사당에서 여당인 한나라당, 야당인 민주당과 민노당의 ‘잠정적 연합전선’ 사이에 처참한 전투가 벌어졌다. 외교통상통일위원회(외통위) 위원장인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 회의실 문을 철통같이 걸어 잠그고 야당 의원들의 출입을 완전히 막은 채 한나라당 의원들만 자리한 가운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상정한 것이 싸움의 발단이었다. 흥분한 야당 의원들과 보좌관, 당직자들은 쇠망치로 회의장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실패하자 국회의장석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다. 의장의 직권상정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말고 보수언론의 대표인 ‘조·중·동’은 당연히 폭력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한다. 야당 의원들이 ‘결사항전’의 각오로 의장석을 지키자 김형오 의장은 결국 “경호권을 발동하면서까지 직권상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 뒤 이 문제는 곧 미디어관련법들을 비롯한 이른바 ‘MB 악법’에 가려져서 잊혀 버린다.
한미 FTA 국회 비준을 위해 ‘전쟁’까지? 도대체 왜?
수십 년 동안 언론계에 몸 담아온 내가 보기에도 ‘저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하는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는데, 일반 국민들은 어땠을까? ‘도대체 지금 한미 FTA를 우리나라 국회가 비준한다고 해서 취임을 한 달이나 남기고 있는 오바마 당선자가 아, 우리도 서둘러야지 하면서 미국 의회에 대고 한국을 따라 하라고 당부할까? 그게 아니면 레임덕 부시가 민주당이 다수인 의회에 부탁해서 그런 성과를 얻어내리라고 기대한 것인가?’ 그 퀴즈는 재미도 영 없고 답도 없었다.
그 의문은 2009년 2월 초에 얼마쯤 풀렸다. 정부와 여당이 비준 동의안을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려던 방침을 사실상 유보했다는 언론 보도가 2월 4일에 나온 것이다. ‘아니 그 난리를 피운 지가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는데 이렇게 연기하려면 왜 그렇게 서둘렀단 말인가?’ 여기서 퀴즈는 다시 시작된다.
청와대의 핵심 관계자가 “우선 민생경제 법안들에 주력하고, 비준 동의안은 일단 상임위에 상정된 만큼 미국 상황을 지켜보며 보조를 맞춰가야겠다”고 말하고, 한나라당 공보 책임자가 “2월 임시국회에서 유연성을 갖고 접근하겠다는 상징적 표시로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 동의안을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할 15개 중점 처리 법안에서 제외했다”고 잘라 말한 것을 보고서야 또 의문이 얼마쯤 풀렸다. 그러나 궁금증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런 유연성은 어디 두고 지난해 12월 18일에는 왜 그렇게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국회에서 극단으로 나갔을까?’
영화 ‘과속 스캔들’은 재미있고 감동적인데
나는 국회에서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둘러싸고 여당과 야당이 물리적 충돌을 벌이기 며칠 전에 <과속 스캔들>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2008년에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추격자>를 추격한 끝에 관객 동원 새 기록을 세웠다는 그 영화는 처음부터 보는 이를 황당한 느낌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름이 꽤 알려진 연예인으로서 라디오 인기프로그램의 디스크자키를 맡고 있는 남자 주인공 앞에 어느 날 ‘딸과 외손자’가 나타난다. 지금 서른여섯 살인 그를 향해 스물두 살인 여성이 ‘아버지가 중3 때 연상의 여자와 관계를 맺어 태어난 딸이 나이고, 이 남자아이는 내가 미혼모로 낳은 아버지의 외손자’라고 선언한다. 하루아침에 아버지 겸 외할아버지가 된 주인공은 딸과 손자를 어떻게 해서든지 집에서 몰아내려고 갖은 꾀를 부리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 영화는 ‘발칙한’ 소재에 비해 전개과정이 재미있고 대사들에 창의성이 넘치는 데다 결말 부분이 아주 감동적이다. 한 마디로 인간의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면서 관객들이 손수건으로 눈자위를 훔치게 한다.
그런데 2008년 말 한나라당이 ‘제작’한 ‘과속 스캔들’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나 이웃에 대한 배려는 물론이고 국회 운영의 기본인 민주적 규칙을 존중하는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니 야당의 ‘대응 폭력’이 조연으로 등장한 그 ‘드라마’를 보면서 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새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한미 FTA는 이명박 정부가 노무현 정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다. 2006년 2월 3일 협상을 시작해서 4월 2일 한국과 미국의 협상이 본부장 선에서 타결되어 6월 30일 대통령 서명으로 체결된 것이 바로 그 협정이다. 한미 FTA는 두 나라 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법적으로 발효되는데, 노무현 정부는 임기가 끝나는 2008년 2월 25일까지 국회 비준을 받아내지 못했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친노’가 되다니
중대한 사건이나 쟁점이 터질 때마다 한나라당과 조선· 중앙· 동아일보의 무차별 공격을 받던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가 기이하게도 그들의 적극적 지지를 받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한미 FTA 협상이었다. 그때 한나라당 의원들 중 농촌지역 출신 말고 대다수는 ‘친노 세력’으로 보일 지경이었고, 조·중·동도 참여정부 기관지 같았다.
여당인 민주당 안에서도 농촌 선거구의 표를 의식한 의원들을 빼면 다수가 그 협상을 지지했다. 소수 의원들이 민주노동당과 비슷한 논리로 협상을 반대하기는 했지만.
2007년 12월의 대통령선거와 2008년 4월의 총선은 FTA 앞에 놓인 지뢰밭이었다. 농축산물, 그중에서도 특히 쌀과 쇠고기 수입을 개방하면 우리나라 농축산업이 결정적 타격을 받으리라고 믿는 농민들이 그 협정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치인들에게 반대표를 던질 것이 자명하므로, 대통령 후보들과 여야당 의원들은 기나긴 눈치싸움을 계속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인수위원회부터 정책 입안에 참여했고, 참여정부 초부터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으로 일하다가 떠난 정태인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와의 대담에서 그 눈치싸움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또 하나의 변수는 미국 의회의 비준 동의 여부입니다. 미국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타결되었는데도 미국은 쇠고기, 자동차에서 더 얻어내려고 ‘비준 동의’를 무기 삼아 들이대고 있잖아요. 미국에서 아직 광우병이 발생할 시기는 안 됐지만 2003년 소한테 발생했으니까 2013년쯤 되면 인간한테도 발생할 시기가 되는 거죠. (···) 일단 인간 광우병이 발생하면 완전히 공포 분위기로 들어갈 텐데, 우린 아직 광우병 소도 발생하지 않은 상태라서, 설마 그거 먹고 어떻게 되랴,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미국산 쇠고기 먹고 있다가 뼛조각 붙은 고기 들어오고 하자 다시 경각심이 강하게 일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미국산 쇠고기 소비되지 않고 수출 막히면 미국 의회가 비준을 거부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그걸 빌미로 한국 정부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겠죠.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 2007년 11월, 시대의창, 235~6쪽)
한나라당의 승리가 확정적으로 보이던 2007년 대선 한 달을 앞두고 나온 이 책에서 정태인 교수가 말한 대로 한미 FTA가 ‘미국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타결되었는데도’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2월 25일에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뼛조각 붙은 미국산 쇠고기 ’ 수입을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이명박 정부가 나라 안팎에서 해결해야 하는 온갖 문제들 중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물꼬 삼아 한미 FTA가 두 나라 의회에서 비준되도록 하는 작업에 최우선순위를 두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결정적 요인은 4·14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국회 의석 299개 중 170석 이상을 단독으로 확보하고 친박연대와 자유선진당 같은 잠재적 우군까지 갖게 된 데다, 원내 제1당이던 민주당이 80석 남짓한 의석으로 오그라들었으니 그의 앞날에는 거칠 것이 없는 듯이 보였을 수도 있겠다. ‘미국 쇠고기 수입 협상 타결’이 발표된 4월 18일은 워싱턴에서 열릴 한미정상회담 바로 전날이었다. 따라서 그것이 부시에 대한 선물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촛불은 가라앉았지만
그러나 허약한 민주당과는 달리 국민들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여론은 만만치 않았다. 4월 18일에 협상이 타결되자 ‘광우병을 일으킬 수도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야 하는가’라는 항의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5월 2일에 여자 중고등학생들의 촛불시위가 벌어진다. 8월 초순까지 서울과 전국의 대도시들에서 석 달 남짓 이어진 촛불 집회와 시위는 이명박 정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듯이 보이기도 했으나 공권력이 강력히 대응하고 ‘촛불 진영’의 동력이 쇠약해지면서 잦아든다. 2008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촛불에 대해서는 아직 역사적 평가가 이르다는 생각도 들지만 나 자신은 잠정적으로 이런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권지희 외 19인이 쓴 <촛불이 민주주의다>(2008년 8월, 해피스토리)에 대한 서평의 한 대목이다.
2008년의 촛불은 바른 권력을 세우는 혁명적 성과를 빚지는 못했다 하더 라도 우리사회가 장기적으로 민주주의를 살리고 경제적 평등을 향해 나가며, 문화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직업언론인들과 민주화세력이 수십년 동안 해내지 못한 일, 곧 조선·중앙·동아일보의 반민주성과 그들이 수구특권세력의 전위부대라는 사실을 어린 학생들부터 유모차 엄마들까지가 철저히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촛불의 정치혁명이자 문화혁명이다. (<계간 광장> 창간호, 2008년 10월, 재단법인 광장)
그러나 촛불은 가라앉았지만 이명박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는 일들이 잇따라 벌어진다. 2008년 11월의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그해 4월 19일의 한미정상회담에서 확인된 바 있는 이명박-부시의 단단한 유대와 ‘우정’이 한미 FTA 의회 비준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음이 확실해진 것이다. 11월 4일의 미국 대선 뒤에 나온 ‘오바마-바이든 플랜’은 한국과의 중대 현안인 FTA에 대해 공세적인 입장을 보였다. 오바마 당선자 진영은 자유무역이 아니라 공정무역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우리의 경제적 안보를 침해하는 협정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설 것”이라고 명시한 부분은 이명박 정부가 비준을 서두르는 것이 일방적이라는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메시지였다. 그런데도 2008년 12월 18일 우리나라 국회에서는 ‘비준부터 하고 보자’는 식의 과속 질주가 시작되었다.
오바마, 자유무역보다 공정무역을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닷새 전인 1월 15일에는 국무장관 내정자인 힐러리 클린턴이 한미 FTA를 재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한국 정부측은 오히려 2월에 국회 비준을 강행하겠다고 응수했다. 민주당이 보호무역을 전통적 강령으로 삼아온데다, 제너럴모터스, 포드, 크라이슬러라는 3대 자동차회사가 파산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미국산 자동차가 한국에서 부닥치는 관세장벽을 허물어야 하는 판에 오바마 대통령이 기존의 자유무역협정을 원안대로 비준해달라고 의회에 요청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2009년 3월 들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국회에서 한미 FTA를 비준하는 문제를 두고 다시 논의를 하고 있는데, 3월 2일 오바마 행정부가 재협상 원칙을 분명히 밝혔다. “한국과 콜롬비아와의 자유무역협정을 둘러싼 문제들에 신속하고 책임있게 대처하고, 공적 이익을 증진시키도록 협정의 시행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미국과 무역상대국의 이익을 적절하게 진전시키는지 여부에 대해” 여론 수렴작업을 벌이겠다고 강조했다.
미국 정부의 입장이 이렇다면, 한국 국회가 협정을 서둘러 비준하더라도 난감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관련 기관에 재협상 지시를 하면 한국 정부가 ‘우리는 이미 국회 비준을 마쳤으니 응할 수 없다’면서 재협상을 거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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