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팍스 아메리카나인가 ‘겸손한 미국’인가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기뻐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으뜸가는 이유로 조지 부시 2세 행정부에서 절정에 이른 패권주의와 일방주의가 사라지거나 크게 약화되리라고 기대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세계 평화를 파괴하면서도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제 나라를 ‘절대적 선’으로 단정하고, 필요할 때마다 어떤 나라들을 ‘악’으로 규정해서 무력으로 공격하거나 경제적으로 억압하는 미국의 행태를 보고 양심적인 사람들은 진저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무엇이기에
팍스 아메리카나는 라틴어로 ‘미국의 평화’라는 뜻이다. 풀어서 말하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의 평화를 의미한다. 이 말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서 따온 것이다. 기원전 1세기 말에 제정(帝政)을 세운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이른바 ‘5현제’ 시대까지 약 200여 년 동안 로마가 그 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무력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일도 최소한으로 줄었던 시기를 가리킨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1945년에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뒤 미국이 지배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자랑하는 가운데 서방세계에 상대적인 평화가 찾아온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에 미국과 동맹국들은 국지전쟁(한국, 베트남, 페르시아만,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 개입했지만 주요 서방 국가들 자체에서는 무력 충돌이 없었고 핵무기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라면 팍스 아메리카나는 어디까지나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평화’를 규정한 일방적인 용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기라고 말하는 1945년부터 21세기 초의 10년 가까운 때까지 65년 동안 한국과 베트남의 전쟁에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최근에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참혹한 살육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 모든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은 언제나 미국이 맡았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도 권력의 정치· 경제· 군사적 목적에 떠밀려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팍스 아메리카나는 ‘지배자들의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레이건의 팍스 아메리카나, ‘힘을 통한 평화’ ‘미국만을 위한 평화’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말이 번지던 무렵인 1960년대 초에 특이하게도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그런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소비에트 진영도 미국인들과 똑같은 개인적 목표를 가진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면서, ‘미국의 전쟁 무기들’에 바탕을 둔 평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1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크게 외치기 시작한 이래 30년 가까이 이 말은 ‘세계의 경찰 또는 헌병’을 상징하는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글의 앞부분에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레이건은 국제사회의 무법자이자 폭군이었다.
그는 결국 레바논에서 (미국의) 해병대를 철수시키기는 했지만, 1981년에 리비아 해안에서 ‘위협적인’ 리비아 전투기들을 격추하라고 명령하고, 1983년에는 좌파정권으로부터 그레나다를 ‘해방’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 그는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에 석유 유통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페르시아만에 해군 호위함들을 보내고, ‘전략방어 선도정책’을 도입함으로써 무기 경쟁의 열기를 높였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소련의 귀에 거슬리는 말들을 더 많이 썼다.
1984년에 쉽사리 재선된 그는 두 번째 임기 중인 1986년에 리비아 폭격을 승인하고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는가 하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표현했다.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 2009년 1월 22일자 ‘특집기사’에서)
레이건은 재임 8년 동안에 국방예산을 35%나 늘리면서 ‘힘을 통한 평화’를 추구했다. 이것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미국만을 위한 평화’였음을 알려준다. 반면에 그는 메디케이드처럼 비군사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지출을 줄이고,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보장에 관한 시행령들을 까다롭게 만들면서 저소득층의 국민 수백만 명이 누리던 소득세 감면제도를 폐지해버렸다. 레이건은 또 리처드 닉슨이 1971년에 시작한 ‘마약과의 전쟁’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 붓고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팍스 아메리카나에 관해서 오래 남을 ‘명언’을 남겼다.
“미국의 국방 정책은 단순한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미국은 전투를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침략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조지 H. W. 부시는 1837년의 마틴 밴 뷰런 이래 현직 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레이건 밑에서 두 번이나 부통령으로 일한 그는 중앙정보국(CIA) 국장 출신으로는 첫 대통령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미국의 정보 행정을 총괄하면서 세계 온갖 지역에서 벌어지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들에서 ‘007식 작전’을 지휘하던 기관의 책임자가 국가원수가 된 것이다.
석유사업으로 부자가 된 부시 1세, 정보국장을 거쳐 대통령으로
1924년 매서추세츠주에서 태어난 그는 금융가이자 연방 상원의원인 프레스콧 부시의 아들로서, 특권을 누리며 안락하게 청소년 시절을 보낸다. 예일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948년에 졸업한 그는 석유업으로 돈을 벌려고 텍사스주로 이사한다. 조지 부시 1세와 2세가 석유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것이 시초이다. (석유는 이 아버지와 아들이 중동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되고, 9· 11 테러 뒤 부시 부자가 오사마 빈 라덴과의 수상한 관계 때문에 언론의 추적을 받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석유업으로 백만장자가 된 조지 부시 1세는 연방 하원의원, 유엔 주재 미국대사,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 주중 미국대사를 거쳐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중앙정보국장으로 임명된다. 그야말로 ‘화려한’ 경력이다. 그러나 이런 화려함이 언제나 가진 자와 힘센 자의 편을 들게 하는 동인이 되는 것은 이들 부자가 대통령으로서 여실히 입증한 바 있다.
그는 레이건의 높은 인기 덕분에 당선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 여건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이다.(‘레이거노믹스’[레이건식 경제정책]가 큰 재정적자를 낳고, 결국 아들 부시 임기 중 미국 경제를 파탄 직전으로 몰고 가는 씨앗이 되었음은 나중에 드러났지만). 부시 1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미국을 ‘더 친절하고 더 신사다운 나라’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석유시장의 동향에 늘 민감한 부시 1세는 (이 글의 앞부분에서 간단히 다루었듯이) 1990년 8월,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이라크군대가 세계 최대의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로 밀고 들어갈 것을 걱정했는지, 유엔의 지원을 받아 연합군을 구성해서 이라크를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시작한다. 미군 42만5,000여 명, 연합군 11만8,000여 명은 ‘사막의 폭풍’이라는 작전으로 100시간도 안 걸려서 이라크군 100만여 명을 패퇴시킨다.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이 빌미를 주었다 하더라도 부시 1세의 대응은 무자비하게 파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패전 뒤에도 사담 후세인은 계속 권좌에 앉아서 분풀이 식으로 쿠르드족을 살육했다.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부시 1세는 미국에서 인기가 하늘을 찔렀으나 국내 경기가 침체에 빠지자 선거 공약을 깨뜨리고 세금을 올린다. 이 때문에 보수적 공화당원들이 이탈함으로써 그는 1992년 선거에서 빌 클린턴에게 패배한다.
조지 부시 1세도 레이건처럼 ‘명언’을 많이 남겼다.
“내 입술을 읽어 보라. 새로운 세금은 없다.”
“링컨의 유산이 펜실베이니아 대로 1600 번지(백악관)에서 마침내 결실을 맺어서 흑인 남자 또는 여자가 오벌 오피스(대통령의 집무실)에 앉는 날이 올 것이다.(그날은 멀지 않았다) 그날이 오면, 가장 주목할 것은 얼마나 자연스럽게 그 일이 일어나는가이다.”(이 말은 그로부터 20년도 채 안 되어서 버락 오바마를 통해 실현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예언이다)
한미한 집안에 화려한 학력의 클린턴, 경제 문제로 집권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선거 구호로 이라크 전쟁의 최대 승자인 조지 부시 1세의 인기를 거품으로 만들어버리고 제42대 대통령으로 뽑힌 빌 클린턴은 영욕을 아울러 겪은 특이한 인물이다. 1946년에 미국 남부의 낙후된 지역인 아칸소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떻게 보면 버락 오바마보다 더 어려운 소년 시절을 보냈다. ‘떠돌이 세일스맨’이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에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의 어머니가 로저 클린턴이라는 사람과 결혼함으로써 빌은 평생 그 성을 가지고 살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그는 고등학교 성적이 뛰어나서 원하는 대학이면 어디라도 갈 수 있었으나 케네디 대통령 같은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수도 워싱턴의 조지타운대학교를 선택한다.
클린턴은 집안이 한미한 것 말고는 조지 부시 1세보다 ‘화려한’ 학력을 쌓는다. 미국 대학생들이 받기가 그리도 어렵다는 로즈 장학금으로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는가 하면 버락 오바마가 나온 하버드대 로스쿨과 쌍벽을 이루는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다. 여기서 만난 평생의 반려자가 힐러리이다.
불우한 성장과정에서 굳어진 성격 때문인지 클린턴은 청소년 시절부터 여자를 지나치게 ‘밝히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인디펜던트>의 ‘특집기사’는 그를 ‘위대한 유혹자[난봉꾼]’라고 표현했다) 그런 습성이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 탄핵 소추까지 당하게 하는 사태를 일으켰으나, 어쨌든 그는 공화당의 레이건이나 부시 1세에 비하면 국제관계에서는 덜 호전적이었다. 그러나 클린턴조차도 미국 대통령의 철칙처럼 되어버린 팍스 아메리카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빌 클린턴도 따라간 팍스 아메리카나
클린턴의 두 번째 임기 중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표적으로 한 공세가 벌어진다. 그는 1998년 ‘연두교서’에서 후세인이 핵무기를 가지려 한다면서 이런 내용을 강조한다.
생화학적 무기들, 그리고 그런 무기를 얻으려고 하는 불법 국가들, 테러리스트들과 조직범죄자들에 우리 모두가 맞서야 합니다. 사담 후세인은 1990년대의 절반 이상을, 국부의 대부분을 이라크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썼습니다. (···) 나는 사담 후세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세계의 의지에 도전할 수 없소. 당신은 전에도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했소. 우리는 당신이 그런 무기를 다시 사용할 수 없도록 하겠소.”
나중에 조지 부시 2세가 바로 그런 이유로 제2차 ‘걸프전’을 일으키던 때 내세운 이유와 비슷한데 후세인이 그런 무기를 개발한 적이 없음은 국제기구의 조사로 뒤에 밝혀진 바 있다.
클린턴도 사담 후세인의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이라크 정권 교체 정책을 추진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1998년 12월 16일부터 19일까지 나흘 동안 ‘사막의 여우’ 작전으로 이라크를 폭격했다. 그리고 1999년 옛 유고연방의 코소보 지역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알바니아인들을 ‘인종 청소’하고 대량 학살하는 것을 막으려고 클린턴은 ‘연합군 작전’에 미군을 사용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때 언론의 대체적인 의견은 클린턴 행정부가 전쟁 이전의 대학살을 크게 과장했다는 것이었다.
1975년에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클린턴은 2000년에 그 나라를 방문하는 평화외교를 선보였으나 레이건이나 부시 2세보다 정도는 훨씬 덜하더라도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치 아래 외국의 내전에 개입해서 인명을 살상하라는 명령을 군대에 내린 것이 사실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최악, ‘부시 독트린’
제43대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는 1946년에 조지 H. W. 부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처럼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중에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나온 그는 가업인 석유사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1977년에 텍사스주에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텍사스 레인저스 야구단의 공동구단주가 된다. 미국에서는 프로 부문에서 야구, 농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를 4대 스포츠라고 하는데, 부시 2세가 서른한 살이라는 나이에 프로야구단의 공동소유주가 되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로서, 아버지와 그의 재력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그 야구단에 80만 달러를 투자한 뒤 팔 때는 1,500만 달러를 받았다고 하니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것 같다.
워싱턴 정계 진출을 위해 공을 들이던 부시는 1994년 중간선거에서 마침내 텍사스 주지사로 당선된다. 그리고 2000년 11월에 대통령으로 뽑힌다.
그가 취임한 지 8개월만에 터진 9· 11 테러는 미국과 그 자신의 정치 지형을 크게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는 재빨리 ‘전 세계적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9월 20일, 아랍의 알카에다와 그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면서 빈 라덴이 작전을 하고 있다고 추정되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이렇게 요구한다. “테러리스트들을 넘겨라. 아니면 그들과 똑같은 운명에 빠질 것이다.”
그는 그로부터 두 해 뒤인 2003년에 이라크 전쟁을 시작함으로써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전략적 목적’으로 두 번이나 전쟁을 하는 최초의 대통령이 된다. 그는 ‘9·11 특효’ 덕분에 첫 임기(2001~2004년) 중 전임의 어느 대통령들보다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다. (두 번째 임기에는 인기가 급전직하 해서 사상 최하의 지지율로 일찌감치 ‘레임 덕’이 되고 말았지만). 결국 부시는 여론조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인기가 낮은 대통령으로 백악관을 떠난다.
부시의 팍스 아메리카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격적이고 파괴적이었다. 그는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서라면 합법과 불법을 가리지 않았다. 부시는 9· 11 테러 직후, 국가안보국(NSA)이 미국 밖의 테러 혐의자들과 미국 안 당사자들 간 통신을 영장도 없이 감청하는 것을 승인하는 행정명령을 내린다. 미국변호사협회는 그것이 불법이라고 지적했으나 부시는 요지부동이었다. 2006년에 미국의 한 지방법원 판사가 ‘테러리스트 감시 프로그램’은 위헌이라고 판결하지만 그 결정은 나중에 뒤집힌다.
부시는 2002년 1월 29일 ‘연두교서’에서 북한, 이란, 이라크가 ‘세계 평화를 위협하려고 무장을 하고 있다’고 단언하면서 세 나라는 ‘악의 축’이라고 선언한다.
‘부시 독트린’의 오만과 편견
미국의 외교정책에는 대통령의 이름이 붙은 것이 많았다. ‘트루먼 독트린’, ‘닉슨 독트린’이 바로 그런 보기이다. 그 중에서 ‘부시 독트린’은 그 어떤 전례보다도 대상이 광범위하고 일방적이다.
이 용어는 조지 부시 2세가 대통령 재임 시기에 실행한 다양한 외교 원칙들을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애초에, 미국이 테러리스트들을 보호하거나 원조하는 나라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권리가 있다는 정책을 의미하면서, 2001년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정당화 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예방전쟁’이라는 말썽 많은 정책을 포함하는 다른 요소들을 담게 된다. 예방전쟁은 ‘미국의 안보를 잠정적 또는 인지적(認知的)으로 위협하는(설령 그 위협이 즉각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외국의 정권들을 퇴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정책은 전 세계, 특히 중동지역에 민주주의를 전파하고, 테러리즘과 싸우는 젼략인 동시에 일방적으로 미국의 군사적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런 정의에 따른다면 미국은 어떤 ‘가상의 적’이나 수상한 세력에 대해 언제나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미국 내부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터져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부시 독트린의 핵심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테러리스트들을 품고 있는 나라들을 공격하기
2001년 9월 11일 저녁 부시는 전국을 향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런 행동들을 한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을 품고 있는 자들을 구분하지 않겠다.” 바로 이 ‘정책’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정당화 하는 데 적용되고, 그 뒤에는 파키스탄 북서부의 알카에다 캠프들에 대한 미국의 군사작전에도 이용된다.
부시는 같은 해 9월 2O일에는 이 정책을 훨씬 더 공격적으로 표현한다. “당신들은 우리와 함께 있든지, 아니면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있어라. 바로 오늘부터 테러리즘을 보호하거나 지원하는 그 어떤 나라라도 미국은 적대적 정권으로 간주할 것이다.”
(2) 예방적 공격
부시는 2002년 6월 1일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 졸업식에서 예방전쟁이 장차 미국의 외교정책과 국방에서 할 역할을 밝힌다.
우리는 최선을 바라기만 하면서 미국과 우리의 친구들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핵) 비확산조약들에 엄숙하게 서명하고 나서 조직적으로 그것을 깨뜨리는 독재자들의 말을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위협이 완전히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면, 우리는 너무나 오래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안보를 위해서라면 여러분이 이끌 군대를 변형시켜야 합니다. 세계의 캄캄한 어떤 구석에서도 단숨에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군대라야 됩니다. 우리의 안보를 위해서라면 모든 미국인이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는 데 필요한 예방적 행동을 할 태세를 갖추겠다는 전향적이고 결연한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3) 민주적 정권으로의 교체
2002년 말부터 2003년까지 부시는 미국 외교정책과 전 세계적 개입에 관한 견해를 확대해 나간다. 그는 유엔 같은 국제기구들의 승인 없이도 미국은 안보상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방적으로 행동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트루먼 독트린의 ‘억제와 봉쇄’라는 냉전정책, 파월 독트린과 클린턴 독트린 같은 냉전 이후의 철학들과 결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부시는 2003년 ‘연두교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인들은 자유가 모든 인간의 권리이며 모든 국가의 미래임을 아는 자유로운 국민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유는 미국이 세계에 주는 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는 2004년 1월 국방대학교에서 “자유를 지키려면 자유의 진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부시 독트린은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하기보다는 계속 봉쇄의 그물 안에 가두어 둔 채 한반도의 비핵화를 추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북한이 6자회담에서 더욱 경직된 자세를 보이게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부시는 “미합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권들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무기들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북한을 포함한 ‘악의 축’ 나라들을 거세게 비난했다. 결국 2009년 1월 20일 부시가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날 때까지 북한과 이란의 핵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부시 독트린의 배경 - 네오콘, 석유의 땅 텍사스, 매카시즘
부시 독트린은 9· 11 이후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고, 부시 혼자서 ‘창안’하지 않았음도 물론이다. 거기에는 네오콘이 오랜 기간 구상해 온 ‘이념들’이 반영되어 있었다.
(···) 미국의 확고한 주도권을 확장하는 것이 클린턴의 후임인 조지 W. 부시 주니어의 프로그램이었다. 새 대통령은 미국의 세력과 정치적 행동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모두 거부했다. 그는 협력 국가들에 대한 배려를 요구하는 국제연합과 나토 같은 기구에 대해, 미국의 군비를 제한하는 조약에 대해, 환경 규제를 통해 미국의 산업을 가로막는 국제협정에 대해, 그리고 인권에 대한 범죄와 전쟁 범죄를 비난하는 국제사법재판소에 대해 대항했다.
120개 국가가 국제사법재판소를 유지하고 있었고 미국이 최고로 여기는 가치가 문제가 되고 있었음에도, 세계를 이끌어 갈 이 나라는 자기 병사들을 세계에 예속시키기를 거부했다. 이 법정을 격렬하게, 거의 전투적으로 거부한 것은 미국의 자신감이 거쳐 온 변화를 보여준다. 그것은 ‘미국은 미국 이외에는 누구도 수행할 수 없는 세계적인 임무를 지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은 세계 모든 나라의 위에, 세계적 조직인 국제연합의 위에까지 서 있다’는 것이다. (<제국의 부활>, 페터 벤더 지음, 김미선 옮김. 2006년 2월, (주)이끌리오, 279~8쪽)
위 글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부시는 미국의 ‘건국이념’과 전통적 가치를 무시하고 ‘세계의 독재자’가 되려고 시도한 셈이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보수 강경론자인 팻 뷰캐넌(Pat Buchanan, 미국의 정치인, 칼럼니스트, 방송인으로 1992, 1996년에 공화당 대통령 예비선거에 출마. 2000년에는 개혁당 후보로 대선에 나감)조차도 부시 독트린은 종전의 미국 외교정책들과 과격하게 결별하고 신보수주의의 이념적 뿌리를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지 부시 부자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주인 텍사스를 정치적 본거지로 삼아 대통령이 되었다. 텍사스 전체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 지역은 대체로 정치, 문화, 종교적으로 아주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1950년대에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제임스 딘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자이언트>에 잘 그려져 있듯이 텍사스는 석유의 땅이다. 어제까지 황무지이던 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석유가 터져 나오면 그 땅 주인은 벼락부자가 되어 제임스 딘처럼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게 된다. 혹시 부시 2세가 텍사스에서 이루어 낸 ‘성공 신화’에 도취되어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 전체를 사유물처럼 움직이려고 하지나 않았는지, 정치· 심리학자들이 깊이 연구해 볼 과제이다.
매카시, “국무부, 육군에 공산주의자들 있다”고 일방적 주장
팍스 아메리카나가 최악의 형태로 나타난 부시 독트린은 1950년대 초반에 미국을 뒤흔든 ‘매카시즘’(MaCarthyism)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정인의 이름에서 비롯된 용어가 그렇게도 빨리, 광범하게 온 세계로 퍼져서 반이성적인 정치공세와 모함, 반대파를 공격하는 몰지각한 선동과 비방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은 역사상 아주 드문 일이다.
조지프 레이몬드 매카시(Joseph Raymond MaCarthy, 1908~1957)는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 위스콘신주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일한 사람이다. 그는 1945년에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 불어닥친 ‘공산주의 경계’ 바람 속에서 ‘반공’이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던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인물이다.
27세 때인 1939년에 위스콘신주 역사상 가장 젊은 순회판사로 선출된 매카시는 33세에 해병대에 자원입대해서 2차 대전에 나가 싸운 뒤 1946년에 상원의원으로 뽑힌다. 무명 정치인이나 다름없던 그는 1950년, 한 연설을 통해 ‘국무부에 고용된 공산당원들과 스파이단원들’의 명단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발표’함으로써 일약 전국적 명사로 솟아오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주장했을 뿐, 혐의들을 입증하지도 못한 채 해리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부, <미국의 소리> 방송, 미육군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있다고 계속 비난한다.
‘빨갱이 공포심’(red complex)으로 몰아넣은 매카시 광풍, 피해자와 이득자는?
매카시가 1950년 초에 ‘공산주의자 사냥’을 시작한 이래 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전성기’에 그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다. 1951년 8월에 지지 15%, 반대 22%이던 매카시의 인기는 1954년 1월에 지지 50%, 반대 29%로 조사 대상의 절반이 그의 편임을 보여주었다. 결국 1954년 11월에는 지지 35%, 반대 46%로 다시 역전되기는 했지만.
매카시즘의 광풍은 꼬박 4년 동안 미국사회를 ‘빨갱이 공포심’(red complex)으로 몰아넣는다. 그는 1950년 초부터, 해리 트루먼 행정부가 정부 고위직에 침투한 자들을 처리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조장한다. 그는 국방장관인 조지 마샬(George Marshall)이 205명의 ‘알려진 공산주의자들’을 품고 있다고 공격한다. 제2차 대전 때 미육군 참모총장으로서, 국민들이 존경하던 정치인이며, ‘마샬 플랜’을 창시한 바로 그 사람을 말이다.
1950년에 터진 한국전쟁에서 유엔군 총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매카더(Douglas McArthur)는 중공군이 북한을 도우러 참전하자 ‘중국 땅에 원자폭탄을 터뜨리자’고 정부에 건의한다. 트루먼 대통령이 그것을 거부하고 그를 해임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매카시는 트루먼을 향해 ‘그 개자식은 탄핵당해야 한다’고 극언을 퍼붓는다.
그 무렵 미국에서 반공주의의 강력한 보루 중 하나는 천주교였는데, 신자 대다수가 민주당원이었다. 그런데 공화당원인 매카시가 자신은 천주교인이라고 공언하자 미국 유권자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천주교 계열의 언론매체들이 매카시를 지도적인 ‘반공투사’로 치켜세운다. 당시 천주교에서 사회적으로 아주 유력한 집안은 조세프 케네디 1세(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가문이었다. 케네디는 매카시와 가까운 친구가 되어, 별장에 자주 초대하는가 하면 상당액의 정치자금까지 준다. 매카시는 그의 3남인 로버트 케네디의 영세 때 대부를 맡고 나중에는 ‘정치적 선배’로서 상원에서 함께 일한다. 존 F. 케네디는 상원의원 시절 매카시의 광적인 선동을 보고도 매카시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는 왜 그러느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한다. “빌어먹을! 매서추세츠주 유권자의 절반이 매카시를 영웅으로 보니까요.”
반공 영웅 매카시, 증거 못 찾고 물러나 곧 세상을 떴지만 그 역사는
매카시는 1953년에 ‘정부활동조사위원회’ 책임자가 되어 육군 안의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려고 나서지만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한다. 반격에 나선 육군은 1954년 초에 그를 고발하고, 그는 4월에 위원장 자리를 물러난다. 그는 1957년 5월에 간염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알콜중독이 원인이라는 설이 널리 퍼졌다.
현대사의 초입, 매카시즘은 본격적인 냉전의 시작을 상징한다. 정신 차리고 보니 국민의 바로 코앞에 냉전이 있는 터였다. 심지어 언론들은 냉전 종식 10년 후에 발생한 9· 11 사태(2001년)와 이라크전을 매카시즘에 비유했다. 좀처럼 집단행동에 수렴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 나라 국민정서가 9· 11 사태의 충격으로 인하여 대 테러전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미국, 명백한 운명인가, 독선과 착각인가>, 최승은· 김정명 지음, 2008년 8월, 도서출판 리수, 69쪽)
매카시는 미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비롯해서 국제관계에 치명적 손상을 입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매카시즘의 악몽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 정치인들은 늘 ‘레드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야 했고, 문학과 영화 등 온갖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는 잔뜩 위축되었다. <모던 타임스>라는 영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본질을 고발한 찰리 채플린이 ‘빨갱이’로 몰려서 1952년에 미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이 대표적 보기이다. 그러나 매카시 광풍은 부정적 역할만 하고 끝났지만, 그 이후 좌파세력이 기운을 쓰지 못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미국을 지배하는 주류세력의 은근한 고마움을 샀는지도 모른다.
부시 독트린은 ‘잠정적’또는 ‘인지적’테러리스트를 응징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나라에라도 군대를 보내서 전쟁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위에서 살펴본 매카시즘의 간략한 역사는 이런 궤변의 뿌리가 1950년대 ‘반공 광풍’의 반이성적 분위기에서 뻗어 나왔음을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