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지 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구내 이발소가 이번 학기가 시작되면서 문을 닫았다. 일흔이 가까운 늙은 이발사 영감님이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직원들도 거의 찾지 않는 이발소를 꾸려가는 것이 용하다 싶었는데, 폐업 안내문이나 이전 공고도 없이 슬그머니 문을 닫고 말았다. 눈이 침침한지 가끔 면도 하다가 상처를 입히기도 했지만 늘 웃음 띤 얼굴로 손님들을 편안하게 맞아주던 분이었다. 작년까지 일하던 쉰 넘은 면도사 아주머니는 그를 늘 장로님이라고 불렀다.
구내 이발소는 문을 닫고 그러고 보니 구내 사진관을 운영하던 사진사 할아버지도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몇 년 되었다. 평양 출신의 키가 껑충한 그 사진사는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딸에게 사진관을 물려주고도 가끔씩 정장 차림으로 사진관에 들르곤 했다. 어쩌다 우리 같은 옛날 손님들을 만나면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끝도 없이 계속하는 통에 헤어지기가 힘들었다. 그 다정다감한 피난민 사진사도 이젠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동네 이발소를 다시 찾게 되었는데, 들어가 보니 몇 년 전 길 건너편에 있다가 없어졌던 이발소의 주인아저씨가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전처럼 손님이 많지 않아 이런저런 얘기도 나눌 수 있었는데, 첫 마디가 이제 이발소가 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란다. 젊은 사람들이 이발소를 찾지 않고 아무도 이발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거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역 이발사 가운데 대략 50대가 30%이고 60대가 60%, 70대가 10%라고 한다. 경북 문경군 가은 출신의 50대 이발사는 가은 탄광과 봉암사 얘기를 꺼내자 신이 나서 고향 얘기를 펼쳐 놓았다. 1960, 70년대에 흥청거리던 가은 광업소에서 구내 이발소를 하던 ‘잘 나가던 그 시절’부터 탄광이 쇠퇴하면서 대구로 나와 동네 이발소를 하게 된 사연을 듣는 동안, 주말인데도 찾아오는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발소 장식도 많이 바뀌어 이젠 동서양의 풍경이 혼합된 이발소 그림도 볼 수 없고, 동네 마실꾼을 위한 장기판이나 어린이 손님들을 위한 만화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동네로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이발소가 동네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사랑방이었다. 개발 붐으로 땅값이 오르면서 거액의 보상금으로 벼락부자가 된 동네 사람들 가운데 누구는 목욕탕을 차리고, 누구는 첩을 두고, 누구는 최고급 승용차를 사고, 누구는 아파트에 살면서 여전히 포도밭을 가꾼다는 등 온갖 얘기를 듣느라 나는 자주 이발소를 찾았었다.
사람 사는 얘기 듣는 사랑방 그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얘기가 있다. 공부 잘하는 아들을 두어 부러움을 사던 농부는 서울 유학간 아들 학비 대고 아파트 사주느라 땅을 팔아버려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신세가 돼 버렸는데, 공부 못하고 말썽만 피우던 자식을 둔 농부는 땅만 파먹다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어 떵떵거리고 산다는 얘기였다. 어떤 중소 섬유업체 사장은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공장을 꾸려갈 수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발소는 나에게 살아 있는 현실을 가르쳐주는 교실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동네 이발소가 사라져버린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호철의 「어느 이발소에서」에서 절묘하게 그려진 1960년대의 동네 이발소 풍경이나, 송강호의 「효자동 이발사」에서 묘사된 독재자와 소시민의 삶의 궤적은 어렴풋한 향수만을 환기시키는 무대 배경에 불과한 것인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인터넷 연재만화(웹툰) 「삼봉이발소」는 동네 이발소라기보다는 미용실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만화를 빨리 구해서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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