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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호선생의 학자적 자세 / 박석무

문근영 2018. 9. 18.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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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선생의 학자적 자세


정조 재위 19년인 1795년에 다산은 34세의 장년이었습니다. 번암 채제공이 우의정에 오르고 정헌 이가환이 공조판서에 제수되어 당시 승지이던 다산까지, 남인들의 세력이 보란 듯이 강화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여 천주교 포교에 활동한다는 사건이 발각되어 온통 세상이 소용돌이치고 말았습니다. 반대파들의 거센 공격에 말려들어 그 일에 전혀 관련이 없던 다산은 아주 낮은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이라는 직책으로 충청도 홍주로 내침을 당했습니다.

불행을 당해도 때로는 행운이 올 수 있다고 그곳의 귀양살이 같은 미관말직의 생활에서도 특기할 재미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10일 동안 계속된 일이어서 ‘매우 즐거운 일[甚樂事也]’이었다고 자신이 평할 정도로 멋있는 학술대회가 열렸던 것입니다. 충청도의 홍주·예산·온양 등지, 이른바 내포지방(內浦地方)의 남인 명문가 소장학자 12명이 68세의 대학자 목재 이삼환(木齋 李森煥)선생을 강장(講長)으로 모시고 심도 깊은 학술세미나, 즉 강학회(講學會)를 열었습니다. 목재는 바로 성호 이익선생의 종손(從孫)으로 당시 생존해 있던 대표적인 성호학파의 학자였습니다.

장소는 온양의 서암(西巖)에 있던 봉곡사(鳳谷寺)라는 큼직한 절간에서 열흘 동안 합숙하면서 치룬 학회였습니다. 다산의 글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라는 글에는 그 때 일어난 모든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고 노선생에게 젊은 학자들이 질문하면 선생이 답한 내용까지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부지런히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호의 저서 『가례질서(家禮疾序)』를 교정하여 깨끗하게 정서하는 일도 해냈습니다. 그 장문의 글에 성호의 학문보다는 인품에 대해 우리들을 감동시켜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다산이 성호의 차원 높은 학문과 사상에 그렇게 많은 숭모의 정을 지녔고, 당시로서는 최고의 학자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던 성호선생, 그의 학문하던 자세가 그렇게 훌륭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어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강이중(姜履中)이 목재에게 물었습니다. “성호선생은 박식하고 달통하기가 그와 같았는데 남에게 질문한 적도 있었는가요?” 목재가 답하기를, “우리 종조할아버지의 평생은 아랫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혹 자신이 저술한 책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견해라도 말하면 아무리 몽매한 초학자의 말에도 표정도 바꾸지 않고 다 들어주었으며, 진실로 그가 해준 말에 취할 점이 있다면 바로 고치고 바꾸기를 지체 없이 하였으니 그분의 겸손함과 용기있음이 그와 같았다”라고 답했답니다.

진실로 큰 학자는 그래야 합니다. 남의 지적에 잘못을 고치고 바꿀 수 있던 겸손과 용기만이 참다운 학자가 되는 길임을 성호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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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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