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 주는 남자
심 경 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1.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가 2009년 아카데미상의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더니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는지, 블로거들이 캡쳐해서 올린 사진들이 꽤 많다. 그것만 보아도 케이트 윈슬렛과 랄프 파인즈의 연기가 대단히 훌륭했으리라 생각된다.
아카데미상 소식을 몰랐던 나는 다른 일 때문에 인터넷 써핑을 하다가 무척이나 낯익은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말이 상당히 많이 검색되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그 단어를 글 제목으로 삼은 블로그를 클릭해보게 되었다. 그러고서 그 타이틀을 지닌 영화가 지금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고, 영화의 원작이 바로 베른하르트 슐링크(Bernhard Schlink)의 ‘그’소설임을 알았다.
수년 전에 나는 소설의 번역자이자 시인이신 우리 대학의 김재혁 교수님으로부터 그 책을 증정 받고 그날로 밤새 읽은 적이 있다. 책을 덮은 뒤 오랫동안 무척 마음이 아프고 속이 거북했다. 열다섯 살 소년과 서른여섯 살 여인의 육체적 관계 때문이 아니었다. 그 소설은 독일의 패전 이후 과거극복의 과제를 정면으로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토마스 만(Thomas Mann)은 76세 때인 1951년에 집필한 『선택된 인간(Der Erwahlte)』에서 깊은 원죄를 지닌 인간이라도 속죄의 의식을 거치면 은총을 받게 된다는 장엄한 주제를 다루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설화를 소재로 삼아, 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사내아이가 성장해서 다시 자기 어머니와 결혼해 두 딸을 낳는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불륜의 죄를 범한 자이지만, 그 사내는 17년 동안 속죄한 결과 교황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죄의 자각과 속죄를 통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설의 주제는 단지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독일의 전시체제에서 무언무형으로 동조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한 듯하다. 토마스 만 자신은 1933년에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뇌와 위대함』이라는 강연에서 히틀러의 바그너 우상화를 공격하고 망명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전후에 전쟁 세대의 정신적 공황을 치유하는 문제를 자신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전쟁 이전 세대와 전쟁 이후 68세대 사이의 관계를 다루면서, 전쟁 이전 세대과 과거청산의 주역 세대가 겪고 있는 고뇌를 동시에 보듬어주려고 했다.
고등학생 마이클을 책을 읽어주고 육체적 관계를 가졌던 여인 한나는 나치 수용소의 감시원이었다. 한나는 과거사 청산의 법정에서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까지 뒤집어썼다. 법정의 구형을 지켜보던 법대생 마이클은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 사실을 증언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한나는 죄를 경감해 받지 못했다. 미하엘은 법학자로서 성공하지만 한나에 대한 죄의식 혹은 자신에 대한 혐오증을 견디지 못하고, 책을 낭독해서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종신복역 중인 한나에게 계속해서 전한다. 오래 뒤 한나는 사면을 받지만, 그날로 자살하고 만다.
한나가 왜 이렇게 자살을 해야 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2.
나로서는 소설 「책 읽어 주는 남자」가 두 세대를 모두 감싸 안으려 하다가 두 세대에게 모두 성급한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나는 문맹이었으므로 사실 종신형을 받을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마이클은 비록 과거사 청산의 법정에서 전쟁 세대를 위해 증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뒷날 깊이 자책했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변호하고 옹호하는 듯했다. 다만 이 소설이 법학자의 사건 심리 기록과도 같은 건삽한 구조와 문체를 이용해서 감정의 이입을 차단하고 핵심 주제를 늘 환기시켜 나간다는 점에서 대단히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어권의 소설인 「책 읽어 주는 남자」가 미국에서 성공한 것은 1999년 2월에 <오프리 윈프리 쇼>의 ‘북 클럽’ 코너에서 소개되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그 코너에서 소개되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토론 참가자들은 여인이 소년을 성적으로 학대한 것은 아닌지, 스튜디오에 나온 작가에게 물었다고 한다. 이번의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를 사랑으로 분명하게 규정한 셈이다. 영화는 법학자 마이클이 한나와의 첫사랑을 회상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한다. 그 회상의 부분에서 15세 소년 마이클과 30대 한나의 사랑이 클로즈업되어 있고, 그 가운데서도 케이트 윈슬렛의 누드 장면은 특히 관심의 대상인 듯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평은 이랬다.“관객들을 자극적인 토론으로 몰아넣을 에로티시즘, 비밀, 죄의식에 관한 이야기. 이 영화는 성적인 자각과 도덕적 딜레마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관객들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진 후 간단한 대답을 거부할 것이다.”
만일 이 평이 옳다면 영화는 소설의 묵중한 주제를 어디 다른 곳에 슬그머니 내려놓은 것 같다. 과거사를 진지하게 청산해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더구나 분단의 현대사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소설의 본래 주제를 되새겨 보는 일이 필요할 듯하다.
이 소설만이 아니다, 내가 접할 수 있었던 여러 독일 현대소설들은 정말 나로서는 속을 불편하게 만드는 묵중한 주제들을 담고 있었다. 그 주제들은 결코 ‘짧은 에로티시즘’이나 ‘운명의 사랑’때문에 잠시라도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문학과 예술의 작품은 원래의 맥락에 구속되지 않고 새로운 텍스트로 변용될 수 있다. 더구나 참신한 감각으로 재구조화되고 현재적 관점으로 재해석된다는 것은 본래의 작품이 지닌 의미장을 확장시켜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원래의 작품이 지닌 텍스트내적 문맥과 텍스트회적 문맥을 무시하거나 왜곡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별개의 작품이지 의미장의 확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문고전을 주요한 소재로서 이용하면서 나 자신은 텍스트내적 문맥과 텍스트회적 문맥을 동시에 중시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자만할 수는 결코 없지만 말이다. 한문고전들이 담고 있는 많은 주제나 소재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린다고 하면서, 문맥을 무시하여 주제를 바꿔치기 하거나 소재적 요소를 지나치게 과장한다면 그 일은 결국 원래의 고전을 소거(消去)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