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물고기 / 김경선 미스 물고기 / 김경선 가게 문을 열면 풍경소리가 들린다 아침 일찍 물고기가 운다 수문이 열리고 꼬리를 흔드는 물고기 한 마리 마른 허공에 강물을 풀어 놓고 첨벙 뛰어 오른다 수선집 문이 열리고 딸랑딸랑 파문이 인다 주인 보다 먼저 인사를 하는 미스 물고기 그녀의 반경은 10cm 쇠종에 시계추처.. 다시 보고 싶은 시 2008.11.14
할미꽃 / 유홍준 할미꽃 / 유홍준 안감이 꼭 저런 옷이 있었다 안감이 꼭 저렇게 붉은 옷만을 즐겨 입던 사람이 있었다 일흔일곱 살 죽산댁이었다 우리 할머니였다 돌아가신 지 꼭 십 년 됐다 할머니 무덤가에 앉아 바라보는 앞산마루 바라보며 생각해보는...... 봄날의 안감은 또 얼마나 따뜻한 것이냐 봄날의, 이 무덤.. 다시 보고 싶은 시 2008.11.14
덫 / 박이화 덫 / 박이화 자고 일어나니 정원 한 구석에 새의 깃털이 비명처럼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아마도 살찐 비둘기 한 마리 도둑고양이의 기습을 받았을 터이다 밥이 덫이 되는 현장에서 날개는 더 이상 날개가 되어주지 못한 채 도리어 적의 커다란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미루어 보아 새는 한움큼의 깃털을 .. 다시 보고 싶은 시 2008.11.14
물 위에 물 아래 / 최승호 물 위에 물 아래 / 최승호 관광객들이 잔잔한 호수를 건너갈 때 水夫는 시체를 건지려 호수 밑바닥으로 내려가 호수 밑바닥에 소리 없이 점점 불어나는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버려진 태아와 애벌레와 더러는 고양이도 개도 반죽된 개흙투성이 흙탕물 속에 신발짝, 깨진 플라스.. 다시 보고 싶은 시 2008.11.14
위험한 숲 / 김영식 위험한 숲 / 김영식 푸르르, 풋풋 산모룽일 돌아 나오는 거친 말굽소리가 눈두덩을 잡아당긴다 청미래덤불 지나 느릅나무 그늘 지나 푸른 갈기 휘날리며 헐레벌떡 숨을 턱에 달고 뛰어오는 여자 편자처럼 굽은 팔은 연신 허공을 찌르고 두 개의 봉우릴 거침없이 출렁이며 달려오는 저 야생의, 사나운 .. 다시 보고 싶은 시 2008.11.14
나는 휘파람의 어미예요 / 김경선 나는 휘파람의 어미예요 / 김경선 현기증과 손잡고 몇 바퀴를 돌고 돌았는지 몰라요 아직도 리허설 중이죠 지쳐 쓰러질듯 휘파람을 불지요 드문드문 관중을 향한 휘파람이 쓸쓸해요 자꾸 휘파람도 따라 울어요 끝도 없는 허방에 커다란 입을 오므리고 무대 밑 낯선 말들은 쫑긋거리는 물고기 떼 같아.. 다시 보고 싶은 시 2008.11.14
메밀밭을 벽에 걸다 / 김남수 메밀밭을 벽에 걸다 / 김남수 봉평 무이 미술관에서 흐드러진 메밀밭을 통째로 들고 왔다 밤마다 우리 집 거실에 휘영청 보름달이 뜬다 식구들이 잠든 밤 메밀밭에서 나귀를 탄 이효석이 걸어나온다 소금처럼 하얗게 뿌려지는 달빛 메밀꽃대가 달빛에 출렁인다 구월의 밤은 멀어져가고 쩔렁쩔렁 나귀.. 다시 보고 싶은 시 2008.11.14
조립로봇 / 변종태 조립로봇 / 변종태 파아란 억새풀숲에서 메뚜기가 교미하는 사진을 보고 있다. 손가락이 베일 듯 날선 억새 이파리에 열 다섯 처녀애 핏줄처럼 파란 바람 한 날 지나가고 꼼짝 않고 대사(大事)를 치르는 메뚜기 한 쌍, 그윽한 꿈 속에 잠시 취할 무렵 렌즈에 걸려 고정된 채 끌려온 한 쌍의 메뚜기 네 살.. 다시 보고 싶은 시 2008.11.14
4월 / 정영애 4월 / 정영애 사랑을 한 적 있었네 수세기 전에 일어났던 연애가 부활되었네 꽃이 지듯 나를 버릴 결심을 그때 했네 모자란 나이를 이어가며 서둘러 늙고 싶었네 사랑은 황폐했지만 죄 짓는 스무 살은 아름다웠네 자주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곤 했었네 활활 불 지르고 싶었네 나를 엎지르고 .. 다시 보고 싶은 시 2008.11.14
토란잎 / 송찬호 토란잎 / 송찬호 나는, 또르르르……물방울이 굴러가 모이는 토란잎 한가운데, 물방울 마을에 산다 마을 뒤로는 달팽이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작은 언덕길이 있고 마을 동남쪽 해뜨는 곳 토란잎 끝에 청개구리 청소년수련원의 번지점프 도약대가 있다 토란잎은 비바람에 뒤집혀진 우산을 닮았다 그래.. 다시 보고 싶은 시 2008.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