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승훈 너에 대한 생각 / 이승훈 너에 대한 생각은 가냘픈 들국화 같고 가느다란 들길 같고 이 마음속에 뒹구는 너에 대한 생각은 하아얀 눈발 같고 어디론가 떠나는 배 같고 자꾸만 어디로 가서 살고 싶은 이 마음속에 뒹구는 너에 대한 생각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같고 지상에 남은 한 조각 마지막 빵 같고 --.. 작가 탐방 2010.01.20
시인 이향아 동백을 보며 / 이향아 봄이라고 너도나도 꽃피는 게 싫다 만장일치 박수를 치며 여름이라 덩달아서 깔깔대는 게 싫다 봄 여름 가을 꿈쩍도 않다가 수정 같은 하늘 아래 기다렸었다 마지막 숨겨 놨던 한 마디 유언 성처녀의 월경처럼 순결한 저 피 헤프게 웃지 않는 흰 눈 속의 꽃 사람들은 비밀처럼 귀.. 작가 탐방 2010.01.18
시인 김혜순 지평선 / 김혜순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내가 두 눈을 뜨자 닥쳐.. 작가 탐방 2010.01.18
시인 장옥관 꽃눈이 생겼다는 거지 / 장옥관 그래, 꽃눈이 생겼다는 거지 함부로 몸을 만지지 말라는 거지 초경의 딸아이가 껴안으려는 나를 한사코 밀어낸다 그래, 열 두살이라면 고치를 만들고도 남을 나이 늘 열어놓던 방문도 자주 닫히고 눈에 띠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보지는 않았지만 일기장 두께가 두꺼워지.. 작가 탐방 2010.01.17
시인 고진하 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 / 고진하 그대가 불행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대의 삶이 타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할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그대의 존재가 이루지못한 욕망의 진흙탕일 때 불면으로 잠못 이루는 그대의 반이 사랑의 그믐일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쓰디쓴 기억에서 벗.. 작가 탐방 2010.01.17
시인 이기와 이웃 사내 / 이기와 "아저씨, 왜 이러세요. 이렇게 무력적으로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감동을 주고 감동을 받는 육체를 원했다고요" 지체부자유 그녀의 생 이웃에 사는 사내는 이 날 밤, 철야 기도 가는 것도 잊고 잠금 장치가 허술한 그녀의 몸을 따고 들어가 주린 욕망을 증식시킨다 순간, 창 밖 .. 작가 탐방 2010.01.16
시인 장석남 自畵像 / 장석남 무쇠같은 꿈을 단념시킬 수는 없어서 구멍난 속옷 하나 밖에 없는 커다란 여행 가방처럼 종자로 쓸 녹두 자루 하나밖에 아무 것도 없는 뒤주처럼 그믐 달빛만 잠깐 가슴에 걸렸다 빠져 나가는 동그란 문고리처럼 나는 공허한 장식을 안팎으로 빛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모.. 작가 탐방 2009.12.25
시인 임보 마누라 음식 간보기 / 임보(林步) 아내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내 앞에 가져와 한 숟갈 내밀며 간을 보라 한다 그러면 "음, 마침맞구먼, 맛있네!" 이것이 요즈음 내가 터득한 정답이다. 물론, 때로는 좀 간간하기도 하고 좀 싱겁기도 할 때가 없지 않지만― 만일 "좀 간간한 것 같은데" 하면 아내가 .. 작가 탐방 2009.12.25
시인 김충규 저수지 / 김충규 바닥 전체가 상처가 아니었다면 저수지는 저렇게 물을 흐리게 하여 스스로를 감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수지 앞에 서면 내 속의 저수지의 밑바닥이 욱신거린다 저수지를 향해 절대로 돌멩이를 던지지 않는다 돌멩이가 저수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동안 내 속의 저수지가 파르르 전율.. 작가 탐방 2009.12.21
시인 위선환 둥지 / 위선환 산마루에 눈바람이 쌓였다는 전갈이 왔으므로 뚜벅뚜벅 걸어서 내려오곤 하던 산길이 어두워졌으므로 귀가가 늦은 나무들을 찾아서 산으로 들어갔다 나무들은 골짜기에 모여 있었지만 등덜미를 다독이며 타일러도 아름으로 안고 달래도 집에 돌아갈 형편이 아니라 했다 저마다 둥지를.. 작가 탐방 2009.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