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출판 혁명
심 경 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1.
최근에 나는 선인들의 죽음과 삶에 대한 관념을 다룬 『내면기행』(이가서, 2009)이란 책을 간행했다. 이것은 『한시기행』, 『산문기행』으로 이어지는 기행 시리즈 전 4권의 세 번째 책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교정에 애를 먹었다. 가장 큰 이유는 최종 단계에서 원고 내용을 대폭 수정하는 나의 기벽에 있다. 하지만 컴퓨터 조판의 운영체계에도 적지 않은 원인이 있었다.
내가 보통 사용하는 문서 프로그램은 IBM체계를 따르는 국내 한글소프트웨어의 것이다. 이 소프트웨어는 웬만한 한자들을 거의 다 구현할 수 있어서 한문 자료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무척 편리하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그것을 매킨토시(줄여서 '맥'이라고 함)의
프로그램(Quark Xpress)으로 전환하여 편집을 하는데, 이때 상당히 많은 한자들이 깨지게 된다. 또 아예 없는 한자들도 있으므로 이른바 ‘쪽자’ 작업으로 한자를 채워 넣어야 한다. 그런데 매킨토시를 조작할 수 있는 전문가가 그리 많지 않고 또 외주 형태로 작업을 하므로, 서적 간행에 이르기까지의 공정이 복잡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는 다행히 편집자가 매킨토시를 사용하는 전문가여서, 내 교정 사항을 매킨토시의 워드로 작성해서 디자이너에게 넘기는 방식을 택했으므로 오자를 줄일 수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나나 편집자나 마지막까지 매우 고생했다.
출판에서 매킨토시를 사용하는 이유를 알아보니, 이쪽이 그래픽이 좋고 글꼴이 좋아서란다. 실제로 우리 출판물들을 살펴보면, 전문 출판사들은 IBM체계보다 매킨토시를 선호하는 듯하다. 일상의 문서작업에서는 IBM체계의 한글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서도 서적 출판에서는 매킨토시의
을 선호하는 것이 의아하다면 의아하다. 그래픽 수준은 그렇다 치더라도 글꼴마저 그토록 나쁘단 말인가? 실은 매킨토시가 책 제작에 필요한 기능과 요소를 상당히 많이 지원하므로 글꼴 개발자들이 일반 PC보다 매킨토시의 프로그램용 글꼴을 먼저 개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득 세종대왕이 갑인자의 글꼴을 확정하여 그것이 조선 인쇄물의 기본 글꼴로 활용된 사실이 생각난다. 세종대왕이 다시 살아난다면 우리의 글꼴 개발과 출판이 매킨토시 프로그램에 예속되도록 보고만 있을까?
2.
세종대왕은 조선조 문화의 근간을 확립한 제왕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위대한 공적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것이 없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서적 정책에서도 후사왕(後嗣王)들이 행해야 할 정책의 방향을 거의 확정지었다.
세종대왕의 서적 정책에서 가장 특기할 사실은 1434년(세종대왕 16)에 갑인자의 동활자를 주조한 점이다. 물론 그보다 앞서 태종 3년인 1403년에 계미자가 나왔다. 또 세종대왕은 재위 32년에 경오자도 주조했다. 하지만 조선의 대표적인 활자는 역시 갑인자다. 세종대왕 때 만든 초주 갑인자로 찍은 책의 뒤에는 김빈의 주자발이 붙어 있다. 그 발문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중추원지사 이천, 직제학 김돈, 직전 김빈, 호군 장영실, 사역원첨지사 이세형, 사인 정척, 주부 이순지 등을 시켜 두 달 동안 20여만 자의 글자를 주조하게 했다. 자본(字本)으로는 경연청에 소장된 『효순사실』·『위선음즐』 그리고 『논어』 등 명판본을 이용했다. 단, 내가 보기에 갑인자의 글꼴은 기본적으로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를 토대로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갑인자는 정조대왕 때까지 여섯 번 개주되었다. 세종대왕 때 처음 만든 활자를 초조갑인자, 1580년(선조 13)에 만든 활자를 재주갑인자 혹은 경진자, 1618년(광해군 10)에 만든 활자를 삼주갑인자 혹은 무오자, 1668년(현종 9)에 만든 활자를 사주갑인자 혹은 무신자, 1772년(영조 48)에 만든 활자를 오주갑인자 혹은 임진자, 1777년(정조 원년)에 만든 활자를 육주갑인자 혹은 정유자라고 부른다. 이 갑인자에는 한글 자체도 있다.
갑인자의 글꼴이 관찬 활자본의 기본 글꼴로 지속적으로 사용됨에 따라, 그것을 정판(整版)한 목판본, 혹은 목판으로 개간(開刊)한 책들도 갑인자의 글꼴을 활용한 것이 대단히 많다. 따라서 적어도 18세기까지, 조선 서적의 기본 글꼴은 갑인자체였고, 갑인자를 주조하게 한 세종대왕이 우리나라 서적의 기본 글꼴을 확정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세종대왕은 활자본을 간행하면서 판심(版心)의 어미(魚尾)에 꽃무늬를 집어넣었다. 인쇄면의 반곽(半廓)을 보면 어미 속의 꽃무늬는 잎이 세 개였다. 그것을 삼엽 화문이라고 한다. 이후 그것이 2엽으로 바뀌고, 아래쪽 어미는 선으로 바뀌면서도, 어미에 꽃무늬를 새겨 넣는 디자인은 18세기까지 계속된다. 일본의 에도 초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활자본의 미려함에 매혹되어 독자적으로 활자본을 만들고 화문어미를 사용한 예가 있다. 그래도 어미에 꽃무늬를 넣은 디자인은 역시 조선 판본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세종대왕은 정말 예술적 유희에 뛰어난 디자이너였던 것이다.
3.
세종대왕은 사장(詞章)의 진흥에 심혈을 기울여 한문 고전의 중국책을 중앙과 지방에서 활자나 목판으로 인쇄하도록 직접 명하거나, 지방에서의 판각 사업을 용인했다.
재위 9년인 1427년에 세종대왕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에 『사서오경대전』을 복각을 분담시켰는데, 이 『사서오경대전』은 조선 유학의 기본 텍스트로 공인되었다. 선조 때 교정청 언해본도 이것을 저본으로 이루어졌고, 정조 연간의 규장각 강의도 이 텍스트를 이용했다. 그 한편으로 세종대왕은 경학의 편향성을 우려해서인 듯, 1434년에 『사서통의』 즉 『중정사서집석통의대성(重訂四書輯釋通義大成)』을 갑인자로 인쇄하여 반포했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재위 3년인 1421년에 『자치통감강목』을 주자소에서 간행하도록 명하여 1423년 8월에 하사했다. 1434년 7월에는 갓 주조한 갑인자 대자로 『자치통감강목』을 간행 했다. 그리고 1434년 6월부터 집현전에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하도록 명하여, 1436년 2월에 『자치통감사정전훈의(資治通鑑思政殿訓義)』를 반포했다. 또 『통감강목』에 그 훈의를 병입하도록 지시해서, 1438년 11월에 『자치통감강목사정전훈의』를 병진자의 활자로 간행했다.
이와는 별도로 1435년에는 『분류보주이태백시』, 1440년에는 『당류선생집』을 갑인자로 간행했으며, 별도로 『당시고취』·『속고취』도 갑인자로 간행했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집현전 관원과 성균관 관원을 동원하여 고전의 주석들을 찬집(纂集)하여, 그 결과물을 간행하는 일도 주도했다. 즉 1439년에는 한유와 유종원의 문집을 찬주하게 하였고, 1443년에는 두보 시를 찬주하게 했다. 두보 시 주석의 찬집 결과물은 적어도 재위 말까지 갑인자본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로 간행해낸 듯하다. 이 책은 성종 때 『분류두공부시언해』가 이루어지는 기초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은 중국 사신과 우리나라 문인들 사이에 주고받은 시를 편찬한 『황화집(皇華集)』도 갑인자로 간행했다. 태종 원년인 1401년에 고명사신 단목례가 조선에 왔을 때는 창화집을 묶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재위 32년인 1450년에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이 명나라 경제의 등극조서를 가져왔을 때, 원접사 정인지, 종사관 신숙주와 성삼문이 그들과 창화한 시문은 갑인자본 『황화집』 1책으로 간행했다. 이것을 간행 연도의 간지를 따서 ‘경오 황화집’이라 부른다. 그 후로 1641년(인조 19, 숭정 14)에 최후의 명나라 사신이 올 때까지 24집의 『황화집』이 편찬되었다. 단, 1506년(중종 원년)의 창화집은 1492년(성종 23, 홍치 5)의 창화집과 합철하여, 전체 『황화집』은 23집이다.
사신과의 창화는 응구첩대의 계교에 불과한 면이 있다. 또 그 창화집을 활자본으로 간행해서 저들에게 증정한 것은 사대(事大)의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경오황화집』을 간행한 것은 숨은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명나라 사신의 격을 높여달라는 일종의 압력이었던 것이다. 조선 초에 내방한 명나라 사신들 가운데는 우리 출신의 환관이 있었는데, 그들은 방자한 작태를 보여 국가 권위를 실추시켰다. 이에 대해 세종대왕은 진사 출신의 사신이 온 것을 계기로 『황화집』을 저쪽에 헌정함으로써, 창화를 항례로 만들어 명나라 사신들의 품격을 격상시키도록 압박한 듯하다. 사신들이 한림원 편수 등의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접반사와의 응대에서 예의를 갖추고 현안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며, 귀환 후 우리 사정을 객관적으로 보고하여 외교상의 마찰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사대의 뜻에서 『황화집』을 헌정한 것이 아니라, 그 출판과 헌정을 외교적 전략의 하나로 활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세종대왕이 각종 서적을 기획 편집하고 갑인자의 동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을 간행한 것은 출판 혁명이었다. 그 과정에서 세종대왕은 조선 출판물의 형태를 결정하고 핵심 글꼴을 제시했으며 화문어미의 디자인을 고안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명나라 때 인쇄체 글꼴로 통용된 명조체가 들어오자 차츰 인서체(印書體)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어미의 디자인이 바뀌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일본 출판의 영향으로 명조체를 변형시킨 글꼴이 널리 사용되었다. 근래 PC가 유행하면서부터 갖가지 글꼴들이 나왔지만, 주류는 명조체다. 명조체는 한자에 어울리는 글꼴이고, 변형 명조체는 일본의 가나에 적합한 글꼴이어서, 그것에서 파생되어 나온 한글의 명조체는 자간조절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PC상에서 다양한 글꼴들이 경쟁하고 각 글꼴이 적재적소에 활용되고 있다. 또 PC에서 운용 가능한 인디자인이라는 프로그램까지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출판은 아직 매킨토시의 운용체계를 선호하고 있고, 그 때문에 복잡한 출판 공정을 감내하고 있다.
세종대왕이라면 한글소프트웨어의 글꼴도 개발하고 그래픽 기능도 더 발전시킬 듯하다. 또 여러 운용 체계들이 더 잘 호환될 수 있도록 기술개발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 출판문화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길임을 잘 아실 것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 심경호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 일본 교토대학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중국문학) 수료, 문학박사
·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원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의 조교수 · 현재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다산과 춘천』, 『한문산문의 미학』,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국문학연구와 문헌학』, 『김시습평전』, 『한시기행』, 『한시의 세계』, 『산문기행』,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한학입문』(황소자리), 『자기 책 몰래 고치는 사람』, 『내면기행』 등이 있음.
· 역서 : 『주역철학사』, 『불교와 유교』, 『일본한문학사』, 『금오신화』, 『당시읽기』, 『한자학』, 『역주 원중랑집』, 『한자, 백가지 이야기』,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일본서기의 비밀』, 『문자강화』, 『증보역주 지천선생집』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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