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남자 형제는 5명이었습니다. 전처 소생인 정약현(丁若鉉:1751-1821)은 장형, 재취 소생인 약전·약종·약용 등 3형제에, 서모 소생인 정약횡이 그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재주가 높고 똑똑하고 글도 잘하여 남부럽지 않게 잘 나가던 형제들이었으나, 1801년 신유옥사에 잘못 걸려들어 집안이 풍비박산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다산의 지적대로 3형제가 감옥에 갇히고 국문을 받아 끝내는 ‘일사이적(一死二謫)’의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장형 약현은 뒤늦은 45세에 진사과에 합격하여 선비로서의 대접을 받았고, 글도 잘하여 시집을 3권이나 남겼지만, 51세에 신유년의 화란을 맞아, 두 아우가 귀양가버렸는데, 혼자서 꿋꿋하게 가정을 지키고 정씨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는데 손색이 없는 삶을 살았더랍니다. 모두 넘어지고 엎어졌음은 말할 것 없고, 사위이던 황사영이나 딸인 황사영의 부인 및 자녀들까지 온통 처참한 운명에 놓였으나, 약현 형님만은 전혀 법망에도 걸리지 않았고, 종교문제로도 시비를 당하지 않아 찬란한 정씨 가통을 그래도 유지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다산의 글, 「선백씨진사공묘지명」을 읽어보면 다른 형제들이야 돌아오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으나 다산만은 18년 뒤인 1818년 57세로 집으로 돌아오자 68세의 노인 약현은 아우 다산을 다시 만나 즐거운 형제애를 누리다가 3년 뒤에야 71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큰형님이 다산에게는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가통을 잇고 보존해준 큰 형님, 그래서 묘지(墓誌)의 명(銘)에서 그분을 한없이 칭찬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큰형님이었는가. “신유년의 화란에 우리 3형제가 함께 어처구니 없는 화란에 걸려들어 한 분은 죽고 두 사람은 귀양 갔건만 공은 조용하게 그러한 논란에 빠지지 않고 우리 집안의 문호(門戶)를 보존하였고 선조들의 제사를 받들 수 있었다.…”라고 표현하여 가문을 지킨 큰형님의 공덕에 머리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충주의 하담(荷潭)에 부모님의 묘소가 있었기에 묘소를 바라보면서 살겠노라고 ‘망하정(望荷亭)’이라고 호를 짓고 극진하게 부모님을 사모했던 효자의 마음을 지니고 살았다니 그분의 인품도 짐작할 만합니다.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큰형과 함께 배를 타고 충주 하담으로 성묘를 다녔으며, 소양강을 따라 춘천까지 유람하는 즐거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의 따뜻하고 정겨운 형제애가 은근하게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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