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태 희(다산연구소 기획실장)
과연 소통(疏通)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우리 사회도 제법 나아진 것이다. 과거에 발언 자체만도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던 시대가 있었다. 입을 막았던 그 시절에는 오히려 행간에 감춰놓은 메시지만으로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교감이 이뤄졌다. 압제자는 엄연한 사실을 감추고 광범위한 공감을 부정했다. 배후조종자와 일부 몰지각한 자들의 부화뇌동으로 치부했다. 심지어 편가르기로 공감의 확산을 차단했다. 그런 어두운 시절은 민주화 투쟁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지 않나?
독재자가 물러나고 발언이 자유로워지고 나니 문제는 달라졌다. 단지 어떤 좋은 뜻만으로 현안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발언이 넘치고 다른 주장이 서로 부딪쳤다. 이제 절대선과 절대악이 문제가 아니라 공동선(共同善)이 문제였다. 무엇이 우리 모두를 위한 공동선일까? 서로 다른 입장에 처한 사람들 사이에 이뤄지는 대화나 소통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야 소통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다. 어찌 ‘악의 무리’와 대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선을 추구하고 악을 배제하는 것은 선한 사람들이 선택해야 할 당위이다. 그러나 규범판단과 사실판단은 다르다. 내가 마땅히 선을 추구한다 해도, 사실의 견지에서 내가 100% 선하다는 것은 허위일 수 있다. 저들이 아무리 악하다 해도, 저들 또한 얼마간 선한 요소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선악이나 공적인 이념의 문제로 포장하는 것은 구분될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평범한 선한 사람들이 선을 추구하다 자칫 완고해지기 쉽다는 점이다. 극악(?)한 무리와 싸우는 동안 어느새 자신도 극악한 사람이 되고 자폐에 빠질 위험이 있다.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서는 결코 소통은 이뤄질 수 없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소통의 전제이다.
소통이란 상대방과의 이해와 교감을 의미한다. 간혹 소통의 문제를 홍보의 문제로 오인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일방적으로 주입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소통일 수 없다. 소통은 서로 마음을 나누는 쌍방향의 것이다. 메시지 자체가 이미 공감을 이룰 만하다면, 소통의 기술이나 요령이 도대체 문제될 것이 있을까? 그런데도 소통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서로 좋아서 연애하는 청춘남녀 사이에서조차도 소통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소통의 기술 내지 요령 또한 절실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글쓰기의 대가 연암 박지원은 글쓰기를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것에 비유한 바 있다. 글자는 병사요, 글 뜻은 장수로 비유된다. 똑같은 병졸들이, 이끄는 장수가 뛰어나면 승리의 군사가 되고, 이끄는 장수가 무능하면 패배의 군사가 된다. 전쟁의 승패가 장수에 달렸듯, 글의 메시지가 그만큼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글 짓는 자는 항상 길을 잃지 않을까 요령을 얻지 못할까 걱정인데, 뛰어난 장수는 이에 대해 임기응변의 계책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했다. 메시지가 공감되기를 바라는 만큼 전달 요령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소통의 요령을 학습하고 훈련해야 오바마는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미국인은 모두 하나’라는 17분짜리 기조연설을 하여 단번에 유력한 차기 대통령후보로 떠올랐다. 특히 그의 연설은 통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 깊고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분열과 투쟁을 부추기는 우리의 연설 상황과 대비된다. 연설에 뛰어난 오바마도 정치인 초년병 시절엔 자신의 연설에 대한 청중의 반응이 시원치 않아서 연설 스타일을 바꿔야 했다고 한다.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전달 요령도 중요한 것이다.
소통의 기술이나 요령은 문화의 문제이다. 사회적으로 오랜 경험이 축적되어 구성원이 공유하는 문화인 것이다. 내가 알기론 유럽이나 미국이 동아시아에 비해 연설문화가 더 발전되어 있다. 서구문화의 근간인 그리스문화에서 연유한다. 그리스의 민주정치는 폴리스의 문제에 관해 직접 다수의 청중들에게 호소하는 연설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에 비해, 한자문화권에서는 한자를 아는 지식층들 사이의 공론에서 상소문(上疏文)과 같이 한자로 쓴 글이 위력을 발휘했다. 독재자의 일방적 담화문만이 허용될 뿐, 필화사건이나 ‘막걸리 보안법위반사건’이 벌어지고, 종국엔 극렬한 저항밖에 택할 수 없는 곳에서 소통의 문화가 발전할 수 없다. 소통의 기술이 문화의 문제라는 것은 바로 소통을 위해서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 마음이 통하려는 자세를 갖췄는데도 소통이 문제라면, 그 요령을 학습하고 훈련해야 한다. 주역의 ‘계사전’에 “막히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 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는 구절이 있다. 안과 밖이 통하지 않고 막힌 상태란 죽음을 뜻한다. 통하려면 변해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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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기]---------- 지난주 경기문화재단(대표이사 권영빈)의 재정지원으로 3박 4일의 대학생 실학캠프를 다녀왔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제5기입니다. 발전적 도약을 꾀할 시점입니다. 실학의 정신을 현재적 관점에서 살릴 수 있는 실제적인 내용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소통의 자세와 훈련과 같은 것이 그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4기까지 여러분의 도움으로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계속적인 관심과 성원을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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