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재 소(성균관대 명예교수)
중국 청나라의 문인 오교(吳喬)는 산문과 시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산문과 시가 나타내고자 하는 뜻(意)을 쌀에 비유한다면, “산문은 쌀로 밥을 짓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시는 쌀로 술을 빚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밥은 쌀의 형태가 변하지 않지만 술은 쌀의 형태와 성질이 완전히 변한다.”고 했다. 참으로 절묘한 비유이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술을 마시면 취한다. 밥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영양소이지만 술은 마시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찌 밥만으로 살 수 있으랴. 때로는 얼큰한 취향(醉鄕)의 경지가 밥보다 더 절실한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래서 우리가 시를 쓰고 시를 읽는 것이 아닐까? 시는 우리를 취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찌 밥만으로 살 수 있으랴 술은 인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시의 역사도 술의 역사만큼 유구하다. 술이 있는 곳에 늘 시가 있었다. 술의 양조법과 종류가 달라도 술은 술이듯이, 시의 형태와 기법이 아무리 다양해도 시는 시이다. 이렇게 시와 술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인간의 다정한 벗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시가 지금 바야흐로 전성시대를 맞이한 느낌이 든다. 중앙일보가 매일 시 한편씩 소개하는 ‘시가 있는 아침’ 코너가 1998년 1월에 연재를 시작한 이래 금년으로 11년째를 맞아 곧 3000여 편을 돌파할 예정이고, 조선일보가 2008년 1월부터 파격적인 지면을 할애하여 연재한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이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끌어내었다. 또한 이 100편을 묶어 출판한 시집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가 2008년 하반기에만 5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고 박경리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이미 10만부를 돌파했고, 신경림의 『낙타』, 안도현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도 1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서울의 송파구에서는 이미 금년 3월에 ‘시가 꽃피는 봄날’이란 주제로 시 낭독회를 개최했고, 강남구에서도 4월 한 달간 ‘시 따라 희망 찾아’를 주제로 시 축제 행사를 열고 있다고 한다. 또한 법무부 교정본부 교화방송센터는 서울구치소 등 전국 47개 교정시설에서 매달 돌아가면서 시 낭독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 밖에도 각종 시 행사가 만발하다.
도대체 시가 무엇인가? 고은 시인은 “아침에 시 한 편 읽는 일은 눈물 없이 메마른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하고 맨 얼굴에 미소를 그려주는 일”이라 했다. 눈물과 미소는 슬픔과 기쁨이다. 그렇다, 시는 인간을 슬프게도 하고 기쁘게도 한다. 논리로 기쁘게 하고 논리로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호소하는 것이 시이다. 이제야 시를 술에 비유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술을 가슴으로 마시지 머리로 마시지 않는다.
시에선 잘 읽은 술 냄새가 난다 그러고 보니 시인들의 작품에선 잘 익은 술 냄새가 난다. 정희성의 시에서는 담백한 백세주 맛이 나다가도 30년 된 바렌타인의 격조 높은 향기가 난다. 신경림의 시를 읽으면 중국의 명주인 분주(汾酒)에 취한 듯하다. 거역할 수 없는 분주의 그 맛과 향기. 고은의 시에는 그가 즐겨 마시는 소주 맛이 배어있고 이시영의 시는 독하지 않으면서 은은히 취하는 일본 술 사케와 같다. 그런가 하면 김혜순의 시는 깔끔한 데낄라 같은 맛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난해(難解)한 술 소흥주(紹興酒) 같기도 하다. 처음 마시는 사람에게 그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그 맛에 홀려버리는 술이 소흥주이다.
이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가는 한 시인들은 아름다운 술을 빚는 마음으로 시를 쓸 것이고, 사람들은 아름다운 술을 마시는 마음으로 시를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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