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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바마시대와 한국21]7.6. 오바마시대와 남북관계 / 김종철

문근영 2018. 10. 12. 01:04

 

 

[오바마시대와 한국21]


7.6. 오바마시대와 남북관계

7.6.1. 남한의 대북정책이 걸어온 길

개나리와 진달래가 꽃망울을 틔우려고 하는 초봄이면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어김없이 벌어지는 ‘연례행사’가 있다. 남쪽에서는 대규모의 ‘한미 합동 군사훈련’이 시작되고, 북쪽에서는 ‘북침전쟁 연습’이라는 선전공세가 펼쳐진다. 2009년 3월에는 그것이 아주 살벌하게 전개되었다. 한국군과 미국군이 ‘키 리졸브’(Key Resolve)라는 이름의 군사훈련을 하기로 한 9일부터 20일까지 12일 동안 북한이 남북간 군사통신을 차단하겠다면서 먼저 육로를 통한 왕래를 막았다. 9일 오전 개성으로 들어가려던 남쪽 사람들 700여명이 ‘입국’을 거부당하고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한국인 80여명이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는 중대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하루만에 왕래를 재개시킴으로써 긴장은 누그러졌으나 군사통신은 회복되지 않았다. 하루 동안 남쪽의 신문과 방송은 그 사건을 대서특필하면서 혹시 ‘서해교전’ 비슷한 긴급상황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렇게까지 험악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극한 대립으로 되돌아간 남북관계


나는 그 사태를 계기로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제2차 대전이 끝나면서 남북으로 분단된 지역은 한반도였고, 동서로 나누어진 나라는 독일이었다. 독일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1990년 10월 3일에 통일되었다. 오래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제2차 대전 뒤 다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다시피 했던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으로 나뉘어져서 전쟁을 치르다가 1975년 4월 30일에 통일되었다. 그리고 1967년에 남북으로 갈라진 예멘은 1990년 5월 22일에 통일되었다.


독일은 분단 45년만에 서독 중심의 흡수통일, 베트남은 북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로 21년만에 무력통일, 예멘은 남과 북이 여러 차례 회담을 가진 것이 열매를 맺어서 무장을 해제하고 23년만에 평화통일을 이루었다. 그런데 한반도는 1945년에 남과 북으로 갈라진 지 64년이 지난 2009년 현재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한반도의 분단 국가라는 것은 단순히 한 나라가 두 나라로 갈라져 있는 상태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남쪽의 대한민국이 1945년 8월 15일,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9월 9일에 정부 수립을 선포한 이래 1950년 6월부터 3년 남짓 ‘동족 상잔’의 전쟁을 치른 뒤 남과 북은 정전협정이 아닌 휴전협정을 맺고서 아직도 적대 관계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이 동독 영토 안에 있던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고 대치하다가 큰 무력충돌 없이 통일된 것과는 달리 한반도에서는 걸핏하면 특수부대의 상호 침투, 간첩 보내기,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둔 비방전, 해상의 돌발적 교전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동북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에 위협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북한의 핵문제는 한반도에서 민감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하는 난제 중의 난제가 된 지 오래이다.


한국을 비롯한 6자회담 관련국들에서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면 6자회담이나 미국과 북한의 직접 접촉을 통해 북핵문제가 쉽사리 풀리리라고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지 두 달 가까이 되도록 북핵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역대 정부들은 대체로 앞선 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어 받아서 필요에 따라 크게 손질을 했다.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은 다분히 정치적 구호의 성격을 띤 것으로서 한국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이 1953년 7월의 휴전 이래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므로 탁상공론처럼 되어버렸다.


1960년의 4월혁명 뒤에 들어선 장면 정권은 ‘유엔 감시 하의 자유선거에 따른 통일정부’를 주장했다. 그러나 집권 한 해도 되지 않아서 대학생들과 혁신정당들이 ‘중립화 통일론’과 ‘남북 협상론’을 주장하면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는 바람에, 그것을 빌미로 삼은 5·16 쿠데타 세력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으뜸으로 내세운 박정희 정권은 처음부터 ‘선 건설, 후 통일’을 강조하다가 1969년에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주한 미군 감축’이 현실로 다가오자 자주국방 정책을 발표한 뒤 대북한 교섭을 추진한다. 박 대통령은 1970년 8월 15일 “남북이 분단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평화정착, 평화공존을 지향”면서 북한을 협상 대상으로 하겠다는 요지의 ‘8·15 선언’을 발표한다. 그러고 나서 한 해 뒤인 1971년에 남북 적십자 회담을 제안하자 북한이 받아들임으로써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남한과 북한의 민간기구 대표들이 판문점에서 만난다. 그때 많은 국민들, 특히 월남한 사람들은 감격에 벅차서 금세라도 통일이 될 듯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1972년에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협의한 결과로, 7월 4일 ‘자주 통일, 평화 통일, 민족적 대단결’을 3대 원칙으로 한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된다.


그러나 1972년 10월 17일에 박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한 뒤 남한사회가  훨씬 더 냉혹한 독재에 시달리게 되면서 재야운동 세력에서는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해 통일문제를 이용한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져 나온다.


진퇴를 번갈아가면서 진전되었던 남북관계


전두환 정권은 1982년 1월에 ‘민주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발표하는데, 당시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강력한 반공정책을 펴던 때라서 그쪽 ‘눈치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1985년 9월에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 공연단 교환을 성사시켜 남북 교류사상 가장 큰 성과를 거둔다. 그때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이산가족의 만남은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시청자들까지를 눈물 바다에 빠뜨렸다.


노태우 정권은 88년에 “남북이 모든 부문에서 교류를 추진하면서 공동 번영을 추구한다”는 ‘7·7 선언’을 발표한다. 그리고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에 고무되어 1989년 9월 11일 ‘과도적 통일체제로 남북연합을 구성하자’는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을 제시한다. 노 정권 시절에 특기할만한 일은 1991년 9월 18일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남한과 북한이 각기 별개 의석을 가진 회원국으로 유엔에 가입한 것이었다. 분단 46년만에 남과 북이 독립된 국가의 자격으로 유엔 회원국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남한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면서 단독 가입을 추진했는데,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을 보고 의아해 하면서도 통일을 향해 큰 진전을 이룬 ‘업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남북한의 유엔 공동 가입 석 달 뒤인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고위급회담에서는 ‘남북 사이의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약칭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어 조인된다. 이것 역시 남북 관계의 중요한 진전이었다.


1993년 2월에 들어선 김영삼 정권은 ‘화해 협력에서 남북연합으로, 그리고 통일국가 완성’이라는 3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한다. 그러나 그해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자 남북 교류가 잠정적으로 중단된다. 1994년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하 예비접촉을 벌였으나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회담이 무산된다. 김영삼 정권은 ‘문민정부’라고 주장했지만 대북정책을 스무 번도 넘게 고치면서 우왕좌왕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은 ‘햇볕정책’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이 어휘는 북한의 자존심을 지나치게 자극한다는 지적을 받아 정부의 공식 용어로는 ‘대북포용정책’으로 나타난다. 이 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지 아홉 달만인 1998년 11월에 금강산 관광이 시작됨으로써 처음으로 빛을 본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에서 냉전을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며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요지의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다.


남북 관계 개선에서 김대중 정권이 이룬 최대의 업적이 ‘6·15 남북 공동선언’이라는 점에는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바 있다. 2000년 6월에 평양을 방문한 김 대통령은 1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네 시간 가까이 회담을 하고 이튿날 그 선언을 공식 발표한다.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의 공통성 인정, 인도적 문제의 조속한 해결, 경제협력 등을 비롯한 남북간 교류의 활성화 등’을 뼈대로 하는 ‘6· 15 선언’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국정 책임자가 합의해서 만든 공식 문서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시작한 ‘소떼 방북’은 같은 해 10월과 2000년 8월로 이어진다.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분야의 남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식량을 비롯한 대북 원조도 물량이 상당히 커서 보수세력한테서 ‘퍼주기’라는 비난을 받는다. 또 1999년 6월 15일 서해 연평도 부근 해상에서 일어난 제1차 ‘서해교전’과 2002년 6월 29일 비슷한 해역에서 터진 제2차 교전 때문에 남북 간에 긴장감이 돌았으나 무사히 위기를 넘긴다.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권의 ‘대북 포용정책’을 대체로 이어받는다. ‘참여정부’는 ‘12대 국정과제’의 맨 앞을 차지하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려면 공존정책을 통해 남북 간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경제적 지원을 함으로써 포용정책이 열매를 맺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2003년 3월 6일 ‘대북 송금 의혹 특별검사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 전후에 심각한 논란을 일으킨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 통일·외교 부문의 핵심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주요 대북사업을 성사시키려고 북한 정권 고위층에게 거액의 돈을 보냈다는 혐의에 관해  조사를 해서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사법처리 하겠다는 것이 그 법안의 취지였다. 실질적으로 김대중 정권을 계승한 노 정권이 이렇게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한다. 그리고 북한도 남북 협력과 통일사업을 위해 비밀을 지키면서 주고받은 자금을 공개하는 것은 남북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라면서 참여정부에 대해 싸늘한 반응을 보인다.


그 뒤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관계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락가락 하다가 2007년 10월 2일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가서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한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이다. 선언의 8개 기본 조항은 ‘6·15 남북 공동선언 고수와 적극 구현’을 시작으로, ‘상호 존중과 신뢰’ ‘긴장완화와 평화보장’ ‘정전체제 종식과 평화체제 구축’ ‘경제협력사업 확대 발전’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 발전’ ‘인도주의사업 적극 추진’ ‘해외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 위한 협력 강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선언의 알맹이들이 실현된다면 평화공존체제는 확고하게 굳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10·4 선언’이 남쪽에서 12월 19일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승세를 굳히던 시점에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 후보가 당선되면 그 선언을 이어받아 실천해야 할 텐데 그 점이 불분명했다. 2009년 봄이라는 시점에서 ‘10· 4 선언’은 김대중 정권 시절의 ‘6·15 선언’과 함께 ‘용도 폐기’된 상태이다.




7.6.2. 이명박 정권 대북정책의 향방

‘비핵/ 개방/ 4,000’은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정치적 슬로건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2008년 대통령선거 때 내세운 ‘747’과 쌍벽을 이룬다. ‘경제성장률 7퍼센트, 물가상승률 4퍼센트, 세계 7대 강국’을 이루겠다는 목표가 그의 대통령 취임 한 해를 맞이한 시점에 허황한 수치의 나열로 드러났음은 이 책의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에 관해서는 대통령 자신과 관련 장관들이 자꾸 목표치를 바꾸어 말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정작 중요한 당면 문제는 대북정책과 남북 관계를 둘러싸고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의 정치력에 있다. 그가 2008년 12월 19일에 당선되자 바로 꾸려진 정권 인수위원회 때부터 대북정책은 혼란에 휩싸였다. 무엇보다도 통일부를 없애자는 주장, 그것도 나중에 통일부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그런 주장을 했는데도 당선자가 명확한 지침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2009년 봄의 ‘갈팡질팡’을 예견할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야당을 상대로 ‘이런 부는 폐지하고 저런 부는 다른 부와 합쳐서 더 크게 하고’ 라는 식의 협상을 벌인 끝에 통일부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통일부 첫 장관으로는 김대중 정부에서 ‘햇볕정책’을 주도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임명되어서 한 해 가까이 이렇다 할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그는 야당한테서 ‘영혼을 팔았다’는 호된 공격을 당하면서도 지난 시절의 ‘대북 포용정책’에 관해 소신있는 발언을 하지 못하고 자리만을 지킨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언행을 했다


이 정부는 통일, 평화공존, 남북의 상생, 경제협력을 통한 상호 발전 같은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통일은 아무리 애써도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니 추상적 구호로 남겨두자는 것인가? 북한은 한반도에서 사라져야 할 무리들의 집합체이니 대화와 타협의 상대로 삼지 않겠다는 뜻을 가진 것일까?  북한의 집권세력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남한 보수파의 고정관념이라 하더라도 북녘 땅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남북 간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때마다 출렁대는 경제,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안, 국민들의 심리적 위축감을 해소해줄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긍정적인 쪽으로는 대답을 하기 어렵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어쩌다’는 이런 과정을 거쳤다.


북한은 2007년 8월 20일 이명박 후보가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시간부터 당선과 취임 직후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인수위에 참여한 중요 인물들이 북한을 무시하거나 악의가 담긴 발언들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북한은 2008년 4월부터 “6·15 선언과 10·4 선언을 이행하라”고 이명박 정부에 요구하기 시작하더니 갈수록 비난의 강도를 높여 나간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의 ‘중병설’이 나돌던 무렵 남한 당국과 보수언론매체들이 공개적으로 전파한 ‘김정일 체제 위기설’이 북한의 상층부를 심하게 자극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북한은 이명박 정부를 향해 극단적인 언사를 퍼붓는 한편 강경한 조치들을 일방적으로 발표한다. 그 일지 중 중요한 것들을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2008년 3월 24일-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북핵과 개성공단을 연계한 발언을 문제 삼아 개성공단에서 남측 당국 인원 전부 철수하라고 요구.

 ·5월 30일-북한, 서해상에서 단거리 미사일 3발 발사

 ·7월 11일-금강산 관광객 북한군 총격으로 사망. 남한 정부, 남한 조사단의 현장 조사를 요구하면서 금강산 관광 잠정 중단.

 ·8월 3일-금강산 지역 북한 군부대 대변인 특별담화. “금강산 관광지구에 머무는 불필요한 남측 인원 모두 추방”

 ·10월 2일-남북군사실무회담 북측 대표단, 남측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가 개성공단 사업 등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것이라며 살포 중단 요구.

 ·10월 7일-북한, 서해 상공에서 단거리 미사일 2발 발사.

 ·11월 22일-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 담화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통일하는 것이 최후의 궁극 목표”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남한 정부와 “북남 관계, 통일문제를 논할 여지 없다.”고 선언.

 ·11월 28일 개성관광과 경의선 철도 운행 마지막 실시 후 잠정 중단.

 ·2009년 1월 17일-북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이명박 대통령을 거론하며 “혁명적 무장력은 그것을 짓부수기 위한 전면 대결태세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며 “강력한 군사적 대응조치가 뒤따를 것”이라고 발표.

 ·1월 30일-북 조평통 성명, “북남 사이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관련한 모든 합의사항을 무효화”하고 남북기본합의서의 “서해해상군사경계에 관한 조항들을 폐기한다”고 통보.


이런 과정을 거쳐 2009년 봄이 오기도 전에 북한은 미사일이나 위성 발사에 관한 ‘계획들’을 흘리면서 남한과 미국,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을 긴장시키다가 3월 9일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이유로 개성공단에 남한 사람들을 하루 동안 ‘억류’하는 강경책을 쓴다.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전달한 의사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은 2009년 1월 17일에 나온  인민군 총참모부의 성명이다. 그것을 계기로 조평통은 ‘남북한이 전쟁 접경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뒤돌아보면 남북관계가 전쟁 직전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살벌해진 적이 더러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은 전두환의 집권 시기인 1986년 10월 말에 정부가 터뜨린 ‘북한의 금강산댐(입남댐) 건설 계획’이었다. 당시 이규호 건설부 장관은 “북한이 비밀리에 200억 톤을 저수할 수 있는 금강산댐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는데, 만약 댐이 무너지면 서울은 12~16 시간 안에 물바다가 되고 여의도 63빌딩의 3분의 2까지 물이 차고, 국회의사당은 지붕 부분만 남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 무렵 텔레비전들은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되는 ‘땡전뉴스’로 밤 9시 뉴스를 열곤 했는데, 그런 방송이 하나같이 물에 잠긴 63빌딩과 국회의사당을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주니 국민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 댐을 세웠다고 당국은 설명했다. 성금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코흘리개 어린이부터 지팡이를 쥔 어르신까지 줄을 섰다. 정부는 11월 26일 대응댐인 ‘평화의 댐’ 건설계획을 세웠고, 이듬해인 87년 2월 28일 강원 화천군 동촌리에서 첫삽을 떴다. 89년 5월 27일 댐 높이 80미터에 이르는 공사가 완료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93년 감사원 감사 결과 이 금강산댐 소동은 비등하는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잠재우려는 ‘국면전환용 사기극’임이 만천하에 밝혀진 것이다. 정부의 충격적인 발표가 있었던 86년 10월 30일은 이른바 ‘건국대 사태’로 국면이 요동쳤던 때였다. 전두환 정권은 금강산댐 발표 직후인 31일 3,000여명의 경찰을 건국대에 투입, 대학생 1,525명을 연행했다. (<경향닷컴>, 2009년 2월 27일자, ‘어제의 오늘’에서)


‘금강산댐’ 사건은 국민 사이에 엄청난 위기의식을 일으켰지만 전두환 정권이 ‘집권 연장’의 수단으로 조작했음이 드러나면서 한바탕 소동으로 막을 내렸다.


‘금강산댐’ 공포에 버금가는 것으로 ‘서울 불바다’ 발언이 있었다. 김영삼 정권 시절인 1994년 3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회담에서 북측 대표인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박영수가 남측 대표인 통일원 차관 송영대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서울은 여기서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남한 텔레비전에 생생하게 방영되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다. 기겁을 한 사람들이 비상식량을 챙기고 피란을 준비하는가 하면 서울이 정말로 북의 미사일이나 장거리포의 공격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이들도 많았다. 방송사들이 그 장면을 하도 자주 돌려대는 데다가 보수적 신문들이 공포를 ‘확대 재생산’ 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은 1993년에 시작된 ‘제1차 북핵 위기’로 한반도에 전쟁 분위기가 감돌던 시기였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영변의 핵시설을 공중 폭격 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던 바로 그때였다. 그런데 남한의 보수적 신문과 방송이 박영수의 발언을 거두절미하고  보도한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는 미국이 한국에서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하고 패트리엇 미사일 반입을 추진하겠다는데 남측이 제재에 동참하려는 것은 엄중하게 말하면 전쟁 선언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말을 남북회담장에서 한다. 그러고 나서 “그쪽이 전쟁을 강요한다면 피할 생각은 없다. 불로 불을 다스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남쪽에서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서울은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마지막 대목이 남쪽 언론에서 ‘서울 불바다’로 압축된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 북측 대표의 거친 언동이 일조를 했음은 물론이지만,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특사로 평양을 찾아가서 그 위기를 해결한 뒤에야 불바다 공포가 사라졌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카터는 그해 6월 17일부터 이틀간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면서 ‘북핵 위기’ 해결에 합의한 뒤 김영삼 대통령과 김 주석의 남북 정상회담을 7월 25~27일 평양에서 열기로  남한측과 협의하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정상회담은 7월 7일 김 주석이 사망함으로써 무산된다).


‘금강산댐’과 ‘서울 불바다’는 다분히 과장된 것이었다. 정권과 보수세력이 사실을 왜곡하거나 살을 붙여서 국민의 위기의식을 조장한 면이 다분히 있었다. 그러나 2009년의 시점에서 남북 간에 벌어지는 일들은 대체로 정확히 전달된다. 어떤 발언이나 정치적 공세를 서로 자기 쪽에 유리하게 포장하는 경향은 있지만, 양측의 언론매체를 통해 그 내용이 전해지기 때문에 1980~90년대처럼 없는 사실을 꾸며내거나 과장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을 향해 너무 일방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대화의 통로를 스스로 차단했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오바마가 2009년 1월에 대통령으로 취임하면 부시 1세 재임기와 달리 북한과 활발하게 대화를 하면서 6자회담도 유연하게 진행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북한과 극한적 대립을 하는 일을 자제했더라면 남북관계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래의 글은 이런 면에서 정확한 지적이라고 본다.


  핵문제를 두고 미국과 북한 양측이 가지는 이익과 목표를 고려할 때 북미 관계의 접근과 협상을 통한 해법 강구는 예상된 수순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부시 행정부의 실패를 거울 삼아 조심스레 대북 접근을 모색했을 것이다. 북한도 북미관계 정상화가 체제 안정을 담보하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공언해 왔던 터라 그 목표를 향해 움직였을 것이다.

  (···) 남북관계가 적어도 대화의 틀을 유지하고 있었고 최소한의 협력구도 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한국은 북미관계의 접근 과정을 중재하고 평화 위주의 촉진 정책을 구사하며 외교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른바 선순환 구도 속에서 한국은 외교력을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팽팽한 기싸움을 벌일 때 남북관계에 최소한의 신뢰가 있었다면 아마도 북한은 한국을 통해 미국에 접근하는 방도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위 ‘통남통미’ 구도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지난 10년 동안 남북관계의 진전을 주시하고 있었던 터라 북한에 대한 접근방법에 한국의 대북관계를 충분히 활용했을 법하다. (김기정 교수[연세대 정치외교학과]의 ‘위기 증폭 게임 시작된 남북관계’, <프레시안>, 2009년 3월 11일 자)


이명박 정권이 남북관계에서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지난 정부들이 북한을 상대로 이루어낸 합의나 선언을 이어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태도를 보면 부시 2세가 대통령이 된 뒤 ‘클린턴 말고는 무엇이나’(Anything but Clinton)을 외치다가 전임자의 업적까지 허사로 돌려버리고 나라를 위기로 몰아 넣은 일이 연상된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명박 정권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이루어진 업적을 부정하면서 ‘김대중·노무현 말고는 무엇이나’에 집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북관계에서는 그와 보수적 뿌리를 함께 하는 노태우 집권기에 나온 ‘7·7 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조차 실천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자세로 북한을 대하면 ‘비핵/개방/4000’을 달성할 수 없음이 자명한데 말이다.


이명박 정권이 역대 정부에서 정부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려면 전임 대통령들이 북한과 함께 발표한 합의서와 선언을 당연히 집행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에 나온 ‘10·4 선언’을 세부적으로 실천에 옮긴다면 최소한 북한의 자원을 개발하고 원자재를 확보하는 사업에서만도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강산 관광처럼 실질적이면서도 상징적 의미가 큰 대북사업을 하루라도 빨리 재개해야 한다.



7.6.3. 북한은 어디로 가야 할까

북한문제에 관해서는 남한은 물론이고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에 셀 수 없이 많은 전문가들이 있다. 이 문제가 세계적으로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핵무기로든 다른 무엇으로든, 북한이 뉴스의 초점이 될 때마다 전문가들은 앞을 다투면서 상황을 분석하고 앞날을 전망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9월에 남한에서 시작되어 다른 나라들로 널리 퍼진 ‘김정일 위원장 와병설’이다. 북한 정권 수립 60주년 기념일인 9월 9일(9·9절) 노농적위대의 열병식에 그가 참석하지 않은 사실이 확인되자 남쪽의 정보기관 고위직이 그의 ‘건강 이상설’을 언론에 띠운다. 그 소식은 그야말로 삽시간에 온 세계로 퍼져나간다. 이런 현상을 보고 북한 정권 쪽에서는 김 위원장의 군부대 시찰, 대학생 축구경기 관람, 담화 발표 사진을 잇달아 텔레비전에 내보낸다. 그러나 남쪽의 보수언론과 정보기관의 ‘전문가들’은 ‘어떤 사진은 옛날에 찍은 것으로서 가짜’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중국 또는 프랑스의 전문의사한테 수술을 받은 듯하다면서 의사들을 추적한다. 나라 밖의 기자들도 ‘그 의사들 찾기 경쟁’을 벌인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2009년 1월 23일 평양을 방문한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대표단을 접견했다는 <조선중앙방송>의 텔레비전 화면이 나오자 ‘와병설’은 사그러든다.


그런데 3월 8일의 북한 최고인민회의 12기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다시 언론에서 ‘소동’이 벌어진다. 그 진원지는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이었다. 그 신문은 2월 17일 중국 베이징발 기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3남 김정운이 결정됐다고 보도한다. 그러자 남한 언론들이 그의 출생 내력부터 살아온 과정까지를 샅샅이 전달한다. 그러나 정작 대의원 선거에서는 김정운은 물론이고 장남과 차남인 정남과 정철이 모두 뽑히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최고통치자가 될 사람은 일단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통설인데, 드러난 결과는 마이니치신문 기사를 오보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남쪽 언론매체 대다수는 겨우 26세밖에 안 된 김정운이 권력을 ‘세습’하기로 결정되었다는 남의 나라 신문 기사를 따라가다가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허깨비에 홀리게 만든 셈이 되었다.


남쪽의 언론뿐 아니라 권력이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근거가 박약한 소문을 바탕으로 흥미 위주로 전달하거나 자기들의 ‘희망사항’을 기정사실처럼 만들려고 하면 남북관계에는 악영향 말고 달리 올 것이 없다.


 ‘군사적 강성대국 건설’과 ‘이밥에 고깃국’


북한은 해마다 1월 1일이 되면 ‘신년공동사설’을 발표한다. <로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등 북한의 대표적 언론매체들이 공동사설 형식으로 싣는데, 남한의 대통령 신년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정권 수립 이듬해인 1946년 1월부터 김일성 주석이 전국 인민에게 방송하는 형식을 취하던 ‘신년사’는 그의 사후인 1995년부터는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발표하지 않고 ‘공동사설’로 나오게 되었다.


‘총진군의 나팔소리 높이 울리며 올해를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의 해로 빛내이자’라는 제목의 2009년 신년공동사설은 이 해를 “당의 부름따라 전 인민적인 총공세로 강성대국 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역사적인 비약을 이룩하여야 할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의 해”로 규정했다. 이 대목은 김정일 위원장이 2008년 말 천리마제강을 방문했을 때 ‘강성대국 건설’ 목표인 2012년까지 4년 남았음을 상기시키면서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를 강조한 일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공동사설에는 ‘총공격전’ ‘ 전 인민적 총공세’ 같은 격렬한 용어가 나온다.


  (···) 공동사설이 나오면 이를 관철하는 대회나 강연 및 학습이 전국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된다. 공동사설은 당의 공식적인 지도적 지침을 담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는 이를 숙지하고 이행하는 노력이 강요된다. 올해의 경우 공동사설 관련 강연회에서 다소 이례적으로 ‘이밥에 고깃국’이라는 말이 재등장했다고 한다. ‘이밥에 고깃국’은 지난1950년대 북한의 ‘천리마 운동’ 시절 북한식 사회주의의 미래로 정의된 바 있다. 이번 강연회에서 “수령(김일성)님께서 그토록 소원하시던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세상이 우   리 장군(김정일)님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정영태 통일 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시론 ‘이밥에 고깃국과 미사일’, <서울경제> 2009년 3월 12일자)


나는 북한이 2012년까지 건설하겠다고 하는 ‘강성대국’이 어떤 수준의 나라를 말하는지에 관해 정확한 정보를 보지 못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강성대국’이 자본주의 국가들이 말하는 경제력과 군사력의 총합이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문화적 수준까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북한이 4년 안에 연평균 국민소득을 4,5만 달러로 끌어 올리거나 미국이나 일본 같은 군사력을 갖게 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 정권이 말하는 강성대국은 ‘남한과 외세에 맞설 수 있도록 강한 군사력을 키우고 인민들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뜻이 아닐까?


북한이 오래 전부터 식량난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1990년대 말에 KBS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꽃제비’는 굶주린 어린이들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북한 당국은 한동안 그 방송사를 극도로 적대시했다.


나는 2006년 11월에 금강산지구에서 열리는 문화행사에 참석하려고 북한 땅을 처음 밟았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군사분계선을 넘어서자마자 도로 양 옆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군인들이 버스 안의 남한 사람들이 군사시설을 촬영하는지 감시하고 있었다. ‘현대’ 안내원이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가 적발되는 사람이 나오면 어김없이 차를 세우고 그를 끌어낸다고 한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그 군인들의 얼굴에 핏기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동해안의 한 호텔에서 하루 밤을 자고 나서 이른 아침에 금강산 구경을 가는데, 도로 연변의 집단부락에서 직장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온정리 지역은 남쪽 사람들의 관광 덕분에 다른 데보다 비교적 생활형편이 나으리라고 짐작했는데, 그들의 얼굴은 ‘이밥에 고깃국’을 자주 먹은 혈색이 아니었다. 그들을 보면서 남쪽에서 보통 수준으로 사는 사람들이 쇠고기를 놓고 ‘한우냐 호주산이냐’를 따지는 장면이  생각났다.


나는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대학에 다니던 1960년대까지 굶어본 적이 있어서 굶주림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알고 있다. 특히 예닐곱 살 적이던 한국전쟁 시기에 하루에 한 끼밖에 찾아 먹지 못한다는 것은 코흘리개들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쌀밥은 커녕 불어터진 보리밥 한 덩어리도 없어서 배가 홀쭉해지면 속이 쓰리다 못해 뒤틀리는듯하던 것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햇볕정책’으로 불리던 대북포용정책을 펼친 김대중 정부 시기에 식량이 모자란 북한에 쌀이나 밀가루, 라면 같은 먹을거리를 많이 보내고, 노무현 정부가 그것을 이어받은 것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보수세력 중에서 극단적인 사람들과 언론매체가 ‘퍼주기’라고 비난했지만, 남북의 평화공존을 위해서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북한이 목표로 하는 ‘강성대국’이 자기방어를 하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기르고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먹일 정도의 경제 발전을 뜻하는 것이라면,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군사력은 제한적으로 유지하고 경제에 치중하는 것이 북한 사람들을 위해서 더 나은 길일 것 같다. 왜냐하면 남한이 무력으로 북한을 침공해서 통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전쟁이 일어나면 남과 북의 치명적 무기들이 한반도를 ‘석기시대’로 돌려보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의 미국이 항공모함과 전투기에 장착된 핵탄두로 북한에 선제공격을 가할 까닭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단, 북한이 남한으로 장거리포를 쏘거나 미국, 또는 일본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비상사태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데 2009년 3월 12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끝나자마자 북한이 이른 시일 안에 인공위성을 발사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남한 언론에 나오고, 미국 정부는 그것을 ‘미사일 발사’와 같은 행위로 간주하겠다는 반응이 있었다. 북한은 1998년 7월 26일 제10기 대의원선거를 치른 지 한 달 5일만에 ‘광명성 1호’ 위성을 발사했다고 밝힌 바 있다. 만약 북한이 2009년 4월에 위성을 발사한다면, 15일의 김일성 주석 97회 생일, 20일의 김 위원장 ‘원수’ 추대 17주년, 25일의 조선인민군 창설 77주년 기념일을 맞이해서 쏘는 ‘축포’의 성격이 강하겠지만, 오바마 행정부와 남한 당국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예측하기 어렵다. 북한이 특히 ‘신년공동사설’에서 이명박 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6·15 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에서 “탈선하는 그 어떤 요소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경한 어투를 사용한 뒤라서 우발적이든 고의적이든 북한과의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도 중국과 베트남식 ‘개혁 개방’을


나는 북한이 핵이나 미사일을 ‘전가의 보도’로 삼아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위기 게임’을 벌이는 것은 더 이상 생산적인 결과를 낳기 어렵다고 본다. 북한이 그런 방식을 벗어나서 국제사회를 향해 개방을 하고 경제 교류를 활발히 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미국 정부가 2008년 10월 1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검증 요구를 받아들였다”면서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그것도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계속 비난하던 부시 2세가 결정한 조치였으니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6자회담 참여국들이 강하게 밀어붙였다면 북한이 개방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시 1세는 이미 오래 전에 ‘레임 덕’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임기 말에 북한을 상대로 ‘최대의 외교적 업적’을 만들려고 하던 터라 동조세력을 얻기 어려웠다. 그리고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 정권에 대화의 여지를 주지 않았으므로 절호의 기회는 날아가고 말았다.


나는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중국과 베트남에서 ‘개혁 개방’의 효과를 직접 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맨 처음은 1993년 9월의 베트남이었다. 그때 한 신문사에서 일하던 나는 ‘통일 베트남’을 취재하고, 1965~75년의 베트남전에 참여한 한국 군인들이나 노무자들과 그 나라 여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한국 혼혈아 또는 튀기라는 뜻의 낮춤말)의 실태를 알아보려고 어렵사리 그 나라를 찾아갔다.


호치민시(옛 사이공)의 탄손녓 국제공항에서 가까운 시장통 옆의 숙소에서 아침에 눈을 뜬 나는 마치 기관총을 난사하는듯이 요란한 소리에 놀라 창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가을날 새벽녘인데 오토바이들이 큰 도로를 메운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렇게 이른 시간부터 움직여야 하루에미화로 1달러를 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낮에 돌아본 번화가에는 동냥을 하는 어린이들이 넘쳤다. 그 아이들은 한국 돈으로 100원쯤 줄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어른들도 입성은 초라하고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도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이 통일된 1975년 4월 30일 이래 지속되던 폐쇄적 환경이 1986년 정부가 ‘도이모이’(쇄신 또는 개혁이라는 뜻) 정책을 채택한 뒤부터 조금씩 숨통을 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정책은 “시장경제원리를 적극 도입함으로써 경제 분권화를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베트남은 공산당 독재의 정치적 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당이 경제정책을 주도하면서도 시장경제원리를 바탕으로 민간부문의 공존을 허용하는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한 1986년 이래 1991년까지 베트남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5퍼센트 정도였으나 1992년부터 1997년 외환위기까지는 연평균 8.8퍼센트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베트남 정부가 적극적으로 외자를 유치하고, 1994년 2월 미국의 경제 제재가 해제됨으로써 국제사회의 자금 지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서 그런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북한이 개혁 개방을 할 때 참고해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실제로 김정일 위원장은,  2007년 10월 16일 베트남의 농 득 마잉 공산당 서기장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정상회담에서 “베트남의 도이모이, 곧 개혁정책과 경제발전 방향을 배우겠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0월 하순에  북한의 김영일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베트남을 방문해서 ‘산업현장을 견학하면서 경제발전 학습에 열중하는 장면’이 남한 텔레비전에 방영된 바 있다. 그러나 어쩐 셈인지, 북한이 베트남식 개혁 개방을 추진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아직까지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호치민시에 머무는 동안 베트남 전쟁 전에 ‘동양 최대’였다는 쫄롱 시장을 찾아보았다. 도이모이 8년째이던 1993년 가을 그 시장에는 어느 자본주의 국가 못지않게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생활필수품을 비롯한 온갖 상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상인들과 손님들의 흥정은 우리나라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 비슷했다. 내가 그 뒤 이런 저런 일로 베트남을 찾아갈 때마다 경제는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외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여러 차례 전쟁에 시달린 베트남이 짧은 기간에 한국, 홍콩, 싱가포르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룰 수는 없었다. 1887년부터 1945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제2차 대전 중에는 일제 군대에게 점령당하기도 했으며, 1959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이 개입한 전쟁에 휩쓸리고, 1979년에는 또 중국과 전쟁을 치른 그 나라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1999년 여름에 나는 한 언론사 대표로서 베트남 국영통신사의 초청을 받아 수도 하노이에 갔다. 그때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의 주선으로 응유엔 티 빈(Nguyen Thi Binh) 여사를 만났다. 1927년 생으로 그때 72세이던 그는 베트남의 부총리였다. 나는 20대 중반이던 1968년 봄부터 ‘빈’이라는 이름을 신문에서 너무나 많이 보았다. 여성인 그가 파리에서 열린 ‘베트남 평화회담’에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속칭 베트콩) 대표로 참석해서 미국 대표 헨리 키신저를 상대로 끈질긴 설전을 벌인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였다.


집무실에서 만난 빈 부총리는 키가 작은 편으로, 온화한 얼굴이었다. 내가 놀란 것은 부총리라는 그가 우리나라 여성들이 한국전쟁 뒤에나 입던 ‘유똥 원피스’ 차림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여한 아픈 역사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 그는 “우리는 과거를 잊지는 않지만 일단 화해를 하면 앞만 보고 나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이 베트남과 다시 수교했으니 많은 도움을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의 표정은 담담하면서도 어떤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도이모이가 바로 그런 겸손과 자신감, 그리고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유연하게 외국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한이 2012년까지 ‘강성대국 완성’을 하려면 ‘체제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미국의 부시2세 행정부 시기에 북한이 가장 불안해 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부시와는 달리 북한과 핵문제를 비롯한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북한과 직접 협상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 우선순위에서 북한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뒤에 있다. 게다가 2009년 들어 북한 정권이 밀어붙이고 있는 미사일이나 위성 발사 계획 때문에 미국이 선뜻 대화를 하자고 제안하기도 어렵고, 동맹국인 한국 정부의 동의를 얻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 정권은 ‘강성대국’을 이루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가장 시급한 것은 굶주리는 대다수 인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다. 그리고 미국 국무부나 프리덤하우스 같은 민간단체뿐 아니라 남한의 국가인권위원회까지도 발표한 ‘북한의 인권은 세계에서 지독히 열악하다’는 조사자료를 ‘근거없는 비방’이라고 일축할 단계를 이미 넘어선 것 같다. 중국도 베트남도 개혁 개방 이전에는 인권 탄압을 감추려고 애썼지만 그 뒤에는 그런 자세를 누그러뜨리면서 실제로 인권을 상당히 개선할 수 있었다.


나는 북한이 단기간에 그 사회를 바깥 세계에 완전히 공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속 폐쇄적인 정책을 유지하면  빈곤을 벗어나면서 경직된 체제를 개선할 길을 찾기 어려울 것이므로 점진적인 개방을 추구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이명박 정권도 북한체제가 무너지면 흡수통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뒤 동독을 흡수한 서독은 통일비용을 엄청나게 치르고서도 아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 시기에 동독은 국민소득 1만 달러가 넘는 동유럽 사회주의권 1위의 ‘부자나라’였는데도 그랬다. 그에 비하면 북한은 세계 하위권의 빈국에 속한다.


남쪽의 정권이 미국과 협력해서 일정한 기간 북한의 ‘체제 안정’을 보장하고 개방을 유도한 뒤에 평화공존을 굳히고 통일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까?

글쓴이 / 김종철
· 전 동아일보사 기자
·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 전 연합뉴스 대표이사 사장
· 현 재능대학교 초빙교수
· 평론으로 <상업주의소설론> 등, 저서로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1922)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1995), 역서로 <말콤 엑스>(공역,1978) <산업혁명사><프랑스혁명사>(1982) <인도의 발견> 등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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