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탐방

[스크랩] 아아 삶이 / 이경림

문근영 2016. 6. 25. 03:50

아아 삶이

이경림



절망이라고 치욕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시름이라고만
말할 수 있어도 얼마나 좋으리
시름처럼 순하게 시름처럼 아득하게
깊어질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으리
시름처럼 천천히 해가 뜨고 시름처럼
하염없이 늙어가는 나무 아래선
펄펄 끓는 치욕을 퍼먹어도 좋으리
노란 평상 위에서 온갖 웬수들 다 모여
숟가락 부딪치며 밥 먹어도 좋으리
그때 머리 위로는 한때 狂暴했던 바람이
넓적한 그림자를 흔들며 가도 좋으리
시름처럼 수굿한 구름이 나무 꼭대기에서
집적대도 좋으리

그래
끝이라고 문 닫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시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으리 시름처럼 따뜻하게
시름처럼 축축하게 한 시절
뒹굴뒹굴 보낸다면 얼마나 좋으리
시름의 방 속에서 어른거리는 것들의
그림자를 보는 일도 좋으리
문밖에서 휙 지나가는 도둑고양이 같은 시름들
못 본 척하는 일도 좋으리
풀섶에서 눈 번득이는 작은 짐승처럼
그저 고요히 두근거리는 일도 좋으리

그 또한 시름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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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닫을 시간



나를 닫고
너를 닫고
고통도 닫고
고통 위에 짙푸른 억새들도 닫고
해질녘 미친 듯한 시장기도 닫고
일생 문밖에서 서성거리던 발소리도 닫고
돌아서자, 돌아서 뚜벅 저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가자
사방 치맛자락 붙드는 빈집들 돌아보지 말자
저 초경 같은 이야기들도 돌아보지 말자
생은 천천히 마시는 술 같은 것
돌아볼수록 발목 잡히는 것

너와 나를 닫고 나니 문득 보인다
고통이 얼마나 짙푸른 두엄이었는지
그 꼭대기 사철 푸른 억새는
얼마나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는지
절망의 자물쇠는 얼마나 완강한지
시장기에 지친 것들이 왜 자꾸 늪 쪽으로 걸어가는지

이제 돌아서자
닫힌 문들을 업고
아우성치는 골목을 돌아
미친 듯 붉은 시장기를 지나
가자
캄캄한 골목 끝 깎아지른 벼랑으로
흑장미 같은 어둠들이 툭툭 피어오르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바위처럼 뚜렷한
버려진 시들이 움찔움찔 피어나는
버섯 같은 꿈들이 튼튼한 지붕을 이루는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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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림 1947년 경북 문경 출생. 1989 [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토씨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시절 하나온다, 잡아먹자』『상자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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