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하여

[스크랩] 신춘문예를 지켜보면서 - 임보시인

문근영 2013. 1. 2. 07:34

<출산과 배설>
―신춘문예를 지켜보면서

문학하는 사람들이 새해를 맞으며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이 신춘문예일 것이다. 신춘문예는 화려하게 각광을 받으며 기성작가로 올라서는 등용문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지방 신문들까지도 신춘문예를 공모하는 바람에 그 희소가치가 다소 퇴색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신춘문예는 문학 지망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정초의 내 홈페이지에 한 네티즌이 모 일간지의 시 당선작을 소개하면서 해설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아무리 읽어 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당선작을 읽어 봤더니 그 네티즌의 답답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글을 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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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당선작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고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대시 가운데는 쉽게 이해되지 않은 작품들이 적지 않습니다.
고도의 은유나 상징의 장치가 구사된 작품이라든지, 선시(禪詩)와 같은 오묘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작품들은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들은 독자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 시의 비의(秘義)에 접근할 수 없는 바도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해되기를 거부한 유형의 작품들이 있습니다.
크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초현실주의를 지향하는 시들이지요. 이들은 현실의 세계보다는 내면의 심층심리를 작품화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나 생각들을 아무런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토해 놓는 것이지요. 그러니 거기에는 어떠한 논리도 윤리의식도 질서도 문법의 규제도 무시된, 언어의 토사물과 같은 글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의미 혹은 비대상의 시라는 유형의 글입니다.
이는 미술의 비구상화가 시도하는 경향과 유사한 작업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비구상화는 대상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그림입니다. 대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그리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언어예술인 시에서는 미술에서처럼 대상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질적인 대상들을 결합시켜 낯선 관계를 조성하거나 혹은 대상을 무너뜨려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만들기도 합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이들의 작품도 대상 곧 사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유형의 글들은 창작자 자신은 스스로 만족할지 모르지만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무시하므로 공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들 작품들의 의의와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시들도 시의 영역을 넓히는 한 유형으로 허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거부한 이러한 시들을 한국시의 전범(典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찬성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내가 정통적인 한국시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하는 두 가지 요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 가지 요소란, 시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글이어야 한다는 것과 심미성 곧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글이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앞에 제시한 특정인의 당선작을 놓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이 작품의 유형을 따진다면 뒤얽힌 의식의 혼란 상태를 표출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설령 이 작품이 심리적 갈등을 뛰어난 감각으로 표출했다 하더라도 내가 만일 선자라면 이러한 작품에 과대한 평가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시를 지망하는 수많은 시학도들에게 시의 바람직한 길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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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혁신을 꿈꾼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세상이 변하는데 시만 변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그러니 시도 전시대의 음풍농월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고. 지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변하는 것도 바람직하게 변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나는 시를 포함한 여타 예술 작품들의 창작 행위를 출산에 비유할 수 있다고 본다. 임산부는 생명의 씨앗을 배태하게 되면 그것을 자신의 체내에 품고 10개월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길러낸다. 그리하여 한 생명체로서의 원만한 기능을 갖추게 되면 모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만을 하게 된다.
한 작품의 탄생도 출산의 경위와 다르지 않다. 시의 씨앗이 잉태되면 시인은 그것을 오매불망 자신의 내면에서 키워낸다. 그 기간이 태아처럼 일정치 않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시의 포태 기간은 며칠인 경우도 있고 긴 것은 수십 년에 걸친 것도 있다. 비록 즉흥적으로 생산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 연원을 따지고 본다면 짧지 않은 수태 기간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수태의 인고를 거쳐 탄생된 작품은 긴 생명력을 갖는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창작 행위를 심리적 갈등의 해소 작용쯤으로 간단히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서양의 ‘카타르시스’라는 문학이론이 잘못 이해되면서 일어난 현상이 아닌가 싶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말을 비극의 효용성을 설명하는 자리에 썼다. 즉 비극을 통해 관객들의 울적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던 것이 프로이드를 거치면서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행동이나 말을 통해 배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회복한다는 뜻의 심리적인 용어로 쓰게 되었다. 그래서 해소의 주체가 독자(관객)로부터 작가로 옮겨진 것 같다.

물론 작자도 작품의 생산을 통해 심리적 갈등의 해소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갈등의 해소가 작자에게만 국한되고 독자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다면 심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시 쓰는 행위가 불필요한 배설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일상인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시는 즉흥적으로 내뱉는 욕설이나 농담과는 다르다. 시가 자기만족을 위한 배설에 그친다면 시의 생명은 기대할 수 없다. 누가 그런 구린내 나는 배설에 관심을 갖고 읽어줄 것인가? 자신의 작품을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기대한다면 그에게도 도움이 될 무엇인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시의 생산은 세상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는 출산이어야지 자기만족에 그치는 배설이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매스컴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신문에 발표된 신춘문예 당선작들은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다. 특히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당선된 작품의 성향이 문학 지망생들의 문학관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그러니 당선작을 결정짓는 심사위원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심사자들은 응모작들을 평가할 때 자기 취향의 작품에 기울기 쉽다. 보통사람이라면 그러한 욕구로부터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소임이 얼마나 막중한지를 알고 있는 현명한 심사자라면 아집을 버리고 공정하게 작품을 평가하려 노력해야 한다. 어떤 작품이 바람직한 시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가. 어떤 작품이 보다 세상을 이롭게 만들겠는가를 생각하면서 작품의 선별에 임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자기류의 작품만을 선호한다면 이는 음식 품평회에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음식만을 고집하는 심사위원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는가.

며칠 전에 대형서점에 들러 시집 코너를 찾았다. 수천 평 광활한 서점인데 시집을 진열해 놓은 서가는 한쪽 귀퉁이에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시를 찾는 손님들이 줄어드니 자연히 그렇게 밀려났으리라. 시가 재미없고 이해하기 힘든 따분한 글이 되었으니 바쁘고 힘든 세상에 누가 굳이 시를 찾아 읽으려 하겠는가?
오늘의 시가 세상의 사랑을 되찾는 길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시에 아름다움과 감동을 회복하는 일이다. 시의 생산은 배설이 아니라 출산이어야 한다. 시는 세상에 방치된 무기물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유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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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한 젊은 시인에게>------

출처 : 대구문학신문 - 시야 시야
글쓴이 : 문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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