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하여

습작기의 절망에서 만난 "소월시집" - 김명인

문근영 2010. 6. 19. 21:59

습작기의 절망에서 만난 "소월시집" - 김명인


중학교 2학년 때던가, 우연히 손에 잡힌 낡은 "소월시집"을 되풀이 해 읽으면서, 그 또래의 소년들처럼, 나도 내 사춘기가 그리움, 사랑 등의 막연한 감상으로 채색되어 있음을 알았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시던 형님이 입대하면서 부친 책 꾸러미 속에 정음사판의 낡은 "정본 소월시집"이 끼어 있었다. 오래 전에 잃어버린 그 책 속에는 소월의 대표작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다, '못잊어'와 같은 작품들도 옛날의 철자 그대로 읽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못니저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한세상지내시구려
사노라면 니칠날잇스리다
못니저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니저도 더러는 니치오리다
그러나 또한끗 이럿치요
'그립어살틀히 못닛는데
어째면 생각이 떠나지요?'

동란을 겪으면서 몰락해 버린 가세 탓으로 간신히 고향의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나는, 제때 납부금을 못내 학교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집에다 가방을 던져 놓고 바닷가로 나가 낚시질을 하는 것으로 소일하곤 했다. 공부가 완전히 관심의 밖에 있었던 그 시절에 만난 소월 시들은 내게 슬픔이나 가난, 죽음 등의 막연하고 막막한 감정을 일깨워 주었고, 시란 그런 감정의 응혈로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 그 무렵 한두 번 교내 백일장에 입상했던 경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특별히 시인이 되겠다던가, 글쓰는 방면으로 뜻을 키워 보겠다는 따위의 포부는 갖지 않았다.

오징어 덕장에 파묻혀서도 진학 때문에 갈등했던 고등학교 3학년 가을에, 나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와 상경했고, 그해 겨울을 서울 이모님댁에서 어려운 더부살이로 입시준비에 몰두했다. 그러나 의대 진학을 목표로 치른 입학시험은 낙방으로 끝이 났다. 합격이 되었다고 해도 입학금 마련 등이 막연했겠지만, 일순의 좌절을 견디고 나니 차라리 격심한 갈등에서 해방되었다는 느낌으로 오히려 후련하기조차 했다.
아마도 그런 기분으로 후기 입학시험에도 응시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의대가 없는 문과계만의 입시여서 장난 삼아 지망학과란을 '국문학과'로 적어 넣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인생의 지침을 돌려놓았다. 합격자 발표도 보지 않고 시골집에 내려가 있던 나에게 고등학교의 담임선생님께서 신문 호외지 한 장을 들고 찾아오셨다. 거기서 나는 내 이름 석자를 확인했던 것이다.

진학에 대한 열망보다 스스로의 설움으로 까닭 모르게 울며 지새운 그 며칠 뒤에, 어머니께서 힘들게 입학금을 빚내 오셨다. 나는 단신으로 상경, 그 돈으로 대학생으로서의 성루 생활을 시작했다. 뒷돈을 바랄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나의 대학생활은 글자 그대로 고학이었다.
진학 후, 면학의 어려움보다 나를 갈등케 한 것은 전공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적성을 따지기 전에, 그때까지 내게 남아 있었던 의대에 대한 선망이 학과 공부보다 재수 쪽으로 정신을 팔게 하였고, 그래서 학교는 건성으로 출석하였다. 강의시간을 빼먹기 일쑤였고, 교실에 앉아서도 다른 책을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학 1학년 겨울에는, 그나마 가정교사 자리도 잃어버려서, 학업의 지속 여부가 참담한 고민거리가 되었다. 서울 생활이 견디기 힘든 곤혹스러움으로 다가왔던 그 방황의 시절에, 친구 집에서 한 주를 기숙하면서 나는 닥치는 대로 소설들을 읽었다.
그렇게 하릴없이 뒹굴다가 아예 고향으로 내려가 버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한 주 끝에 내린 결론은, 나는 결코 고향으로 내려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선은 어머니 때문이었고, 또 거기 가서도 내가 할 일이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무엇이든 여기서 내게 허락된 최선을 찾아야지 않겠는가 하는 결심이 오기와 함께 엄습해 왔다.

그 좌절을 딛고 어렵게 2학년이 되었을 때, 조지훈 선생님께서 담당하셨던 시론(글 시, 이론 론)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다. 선생님은 이미 와병 중이셔서 한 학기에 두서너 번 뵙는 것이 고작이었다. 성적도 리포트로 대신 하셨는데, 그때의 과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요약하는 것과 자작시 다섯 편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과제를 위해 처음으로 시를 습작했다. 시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되도록 많은 작품을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괜찮다 싶은 작품을 만나면 또박또박 대학노트에 옮겨 적곤 했다.

그 무렵에 나는 다시 "소월시집"을 만났다. 중학교 때와는 다른 모습의 소월 시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시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실존의 한 모습으로 다가왔으며, 붕괴된 가치 체계의 세계에 대응하는 식민지 시인의 슬픈 내면으로서 그리움(양)의 미학을 아로새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 도저한 시대에 있어서 개인의 생존이 전체적 삼의 이사에 참여할 수 없었던 절망감으로서의 단절과 폐쇄성이 나의 심금에도 절실하게 부딪쳐 왔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소월 시는 내 습작기의 시에 표면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시인으로서의 길이 간단치 않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지만, 그 무렵의 나는 젊은 신예들의 감각을 시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던 성급한 자만심이 결국 소월 시가 갖고 있었던 깊이와 방법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그것은 오랫동안 습작기를 다시 치러야 하는 긴 방황으로 이어졌다.

시가 표피적인 감각보다는 더 깊은 삶의 뿌리에서 움터 나온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한 것은 대학을 마치고 뒤늦게 입대했다가 3년만기 제대한 후였다. 마감이 촉박해 급조한 시 몇 편으로 이듬해의 신춘문예에 당선하고서, 나는 새롭게 우리 시를 읽을 마음의 여유를 가졌다. 그리고 우리 시를 전공으로 대학원에서 공부할 계기가 마련되면서, 나는 우리의 현대시가 삶의 생생함으로부터 얼마나 먼 거리에서 씌어지고 있는가를 절감했다. 그 와중에서도 소월 시는 여전히 절실하게 읽혀졌다.
그때에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뛰어난 미학적 성취까지 비로소 살펴졌던 것이다.


* 김명인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
- 현재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 '김달진 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수상
- 시집 : "동두천", "머나 먼 곳 스와니", "물 건너 는 사람", "푸른 강아지와 놀다",
"바닷가의 장례" 등
- 저서 : "한국 근대시의 구조 연구", "문학의 이해", "문학이란 무엇인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