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 눈 하나 찾았네, 선하고 어진 눈 하나 - 황금찬

문근영 2010. 4. 26. 08:03

이 세상에서 눈 하나 찾았네, 선하고 어진 눈 하나
[Zoom In] 황금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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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찬 시인

 
2009년 10월 16일(금요일) 오후 5시부터 서울 인사동에 있는 제주미항이라는 횟집에서 한국의 최고령 현역시인 황금찬 씨를 만났다. 올해 아흔하나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한 모습이었다. 젓가락으로 은행 알을 집을 때도, “내가 한잔 따르지.” 하고 상대의 소줏잔에 술병을 기울일 때도 전혀 손떨림이 없었다. 상대가 속삭이듯 우물거려도 정확하게 알아들을 만큼 청력도 좋았다. 어느 시절 이야기를 꺼내도 하나도 막힘없이 기억력이 정확했다.  
 
그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도리우찌[鳥打]라고도 하고 헌팅캡이라고도 하고 납작모자라고도 하는 모자였다. “내가 머리카락이 없어 쓰고 있소. 이해하시오.” 하고 말했다. 우리는 “그럼요. 선생님.” 하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악필이라고 했다. 글씨체가 좋지 않기로는 나폴레옹이 유명하다. 황 시인은 나폴레옹의 친필 사료를 본 적 있다. “나폴레옹이 나보다 낫더군요.” 그는 아직도 원고지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 자신과 홍윤숙 시인 정도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부정확할 것이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원고지파가 많다. 수동식 타이프라이터를 고집하는 작가도 있다. 리본을 사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황 시인은 둘째아들집에 살고 있다. 자신이 쓴 원고는 손녀인 황혜연 씨(27)가 컴퓨터로 작업한다. 황 시인은 손녀에 대해 “중국 북경에 가서 공부하고 온 재원”이라고 자랑했다. 이날도 줌인 단짝 동행인 김요일 시인과 박후기 시인이 같이 인터뷰를 진행했다.


황금찬 시인의 젊은 시절 모습
열두 살 때 순한글 문예잡지 《아이생활》 사서 봐

▶ 속초에서 태어나셨는데, 고향 마을이 정확하게 어딥니까? 생가가 지금도 남아 있는지요? 당시 주소가 양양군 도천면 논산리로 돼 있습니다만.
“지금은 아파트만 들어서 있고 옛날 집터는 없어요. 그땐 포구가 멋들어진 큰 항구였지요. 러시아, 중국, 일본 배들이 드나들고, 동해안에서 제일 컸어요. 그곳에서 여덟 살까지 살다가 떠났습니다. 요만한 초가에서 살았어요. 30년 전에 《조선일보》에서 고향 탐방을 하자고 해서 간 적이 있습니다. 집은 없어지고, 집터는 파밭이 되어 있더군요. 지금은 아마 파밭도 없어졌을 겁니다.”

▶ 생가 근처에 호수가 있습니까?
“호수가 두 개 있지요. 북쪽에 영랑호, 남쪽에 청초호. 청초호에 숫룡이 살고, 영랑호에 암룡이 살아요. 초하루에서 열닷새까지는 암룡이 청초호로 와서 살고, 그뒤 보름 동안은 숫룡이 영랑호에 가서 살지요. 물은 청초호가 깊어요. 겨울에 얼음이 두껍게 얼 때 갈라진 틈으로 물이 솟아 그게 다시 얼어붙어요. 마치 밭고랑처럼. 그것을 용가리라고 불렀지요. 얼음이 갈라질 때 밤새 소리가 납니다. 짜앙 하고.”

▶ 고기도 잡았습니까.
“그럼요. 봄이면 요만한 물고기들이 잡혀요. 남정바리라고 했지요. 바다에서 올라왔는데 얼음이 녹으면 죽은 채 나오기도 했어요. 그 고길 구워 먹었지요. 그 근처 동네들을 아바이 마을이라고 했는데, 한 65% 정도가 이북사람들이었습니다.”

▶ 부모님은 뭐하시는 분이었습니까?
“농사요. 위대한 가난뱅이들이었지요.”

▶ ‘위대’요?
“하도 가난했기 때문에 붙여본 겁니다. 「보릿고개」라는 시가 바로 그거요. 지금 못산다는 사람도 그때로 치면 선비 같을 겁니다.”

▶ 그곳에서 계속 살았습니까.
“함경북도 성진으로 이사했습니다. 함북에는 큰 도시로 청진과 성진이 있었는데, 청진에는 ‘일철’이라는 철공장이, 성진에는 ‘고주파’란 철공장이 있었습니다. 일꾼들만 몇천에서 몇만을 헤아릴 정도로 컸습니다. 그쪽으로 이사를 간 이유는 양양에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당시 아버지는 소작농이셨는데, 소출의 60%를 땅주인이 가져갑니다. 우리가 짓던 논의 주인은 큰 사찰인 S사의 스님이었어요. 어느 해 우박 때문에 흉년이 들었는데 아버지가 절에 찾아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봐주질 않는 겁니다. 떡까지 해다 바쳤는데도 사정이 통하지 않았고, 결국 싸래기 한 말이 남더래요. 그래서 아버지가 차라리 만주로 가자며 나섰다가 성진에 정착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시市란 말이 없고 부府라고 했지요. 인구가 3만 이상이면 부였습니다. 인구가 만 명 이상이 살아갈 때면 만 명이 살게 돼 있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식구들도 노동일을 하면서 살았지요.” 

▶ 어린 시절, 황금찬 소년은 무엇이 되고 싶었습니까? 학교는 어디서 다니셨습니까?
“열두 살 때부터 잡지를 보기 시작했어요. 《아이생활》이란 순한글 잡지였는데, 소년 소녀를 위한 문예잡지로 값이 10전이었습니다. 냉면 한 그릇 값이었습니다. 매달 세계 명작의 초역을 추려서 실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잡지는 하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고동재라는 동갑 친구가 있었는데, 서로 5전씩 내서 그 잡지를 사봤습니다. 그 친구는 나중에 용정에서 대성중학교를 나왔는데 시도 잘 썼습니다. 당시 그곳에는 시인 윤동주도 가르쳤던 유명한 학자가 한 분 계셨습니다. 한준명이라는 분으로 일본에서 신학대학을 나왔고 또 목사이기도 했지요. 나중에 캐나다에서 세상을 뜨신 분이고, 나하고는 강남대학에서 같이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용정으로 이사간 사람들이 살았던 곳을 명동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학생들이 7명이었는데, 한준명 선생은 나라를 사랑하려면 시인이 돼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풍토가 그랬습니다. 7명 학생 중 시인이 4명이나 나왔습니다. 시를 배워야 한다는 물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 고동재라는 친구분은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해방되던 해 2월이었을 겁니다. 그 친구 집에 일본 경관이 1,2주에 한 번 꼴로 찾아와 책도 조사하고 뺏어가기도 했다더군요. 동재가 정지용의 「고향」(“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을 붓으로 베껴 벽에 붙여 놓았는데 그것 때문에 잡혀가 매를 맞았습니다. 일본 경관은 고향이란 독립하자는 거지? 하고 다그쳤다고 해요. 입에서 거품이 나올 정도로 맞았다는데, 동재가 양양에 있는 내게 편지를 보내왔어요. 나라 없는 백성으로서 매만 맞고 살 수 없어 죽을 것 같다고 장탄식을 하던 내용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 《아이생활》 말고도 보던 문학잡지가 있었습니까.
“《삼천리》가 1929년에 나왔지요. 김동환 씨가 냈습니다. 별로 흥미없었습니다. 1931년에 《신동아》가 나왔는데 한자가 너무 많아 읽으려면 옥편을 찾아야 했습니다. 1935년에 《조선일보》에서 《조광》을 냈는데 인기가 많았습니다. 나도 애독자였지요. 현대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70전 했습니다. 1936년 《조선일보》에서는 《여성》, 《소년》 등도 냈습니다.”

1956년 《현대문학》지에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
▶ 그때부터 시인이 될 생각을 했습니까?
“물론이지요.”

▶ 등단할 생각은 안 했습니까.
“그때 《조광》이란 잡지에 <못 잊을 항구>라는 연재물이 있었는데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큰 꿈을 주었습니다. 나도 유명한 시인이 되면 어디를 갈까 하다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결국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은 1981년이었지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했던 잡지는 1939년에 나온 《문장》이었습니다. 새로운 세계가 온 것 같았습니다. 이태준이 소설, 정지용이 시, 가람이 시조를 추천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시인을 만나본 적도 없는 난 참 엉터리였지만, 그때 고동재와 나는 우리가 안 되면 누가 되겠는가 할 정도로 자신만만했습니다. 결국 실패했지요. 당시에 시 공부하는 동아리에 아이들이 19명 있었습니다. 우리는 시 공부가 나라를 사랑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최서해 선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이 말했습니다. ‘나도 시를 쓰고 싶었는데 어려워서 그냥 소설을 썼네. 그런 줄 알게.’ 하고요.” 

▶ 선생님은 1918년 생이시니까 해방되던 해에 벌써 27세이셨네요. 국회의원 김두한, 연극인 김승호, 화가 김종하, 가수 남인수, 문익환 목사, 대한체육회 회장 민관식, 시인 박남수, 시인 오장환, 국무총리 유창순, 연세대 총장 이우주, 국회의원 장준하, 수필가 조경희, 소설가 한무숙 씨같이 쟁쟁한 분들이 동갑이십니다.
“조경희 씨는 생일이 먼저예요. 누이야, 하고 말을 붙이면, 알았어, 알았어, 라고 응대하곤 했습니다. 한무숙 씨하고도 잘 알고 지냈고요.”

▶ 1947년 월간 《새사람》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고, 1965년에 첫 시집을 내신 것으로 돼 있습니다. 《새사람》이란 월간지는 어떤 잡지였나요? 누가 추천했습니까.
“그건 일제시대에 나왔던 잡지입니다. 목사이자 소설가인 전영택 선생이 냈지요. 일제시대에 두세 권 내다가 해방되자 1947년에 한을 푼다면서 다시 시작했는데, 편지를 보내왔더군요, 시를 실으면 등단된다고요. 그런데 그 잡지는 문예지가 아니에요. 나는 《문장》 같은 큰 잡지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데뷔했다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나중에 기독교 잡지 《가정》이 나와서, 그곳에도 시를 많이 실었습니다.”

▶ 그렇다면 등단하는 데 우여곡절이 많았겠습니다.
“말도 마세요. 등단하는 데 나처럼 고생을 많이 한 시인도 없을 것입니다. 1949년에 《문예》가 나옵니다. 이젠 됐구나 하는데 이듬해 전쟁이 터집니다. 모윤숙 씨가 한 달에 한 번 내겠다고 했는데 1년에 한 번 내게 된 것입니다. 1953년 박목월이 나를 《문예》에 추천했습니다. 「경주를 지나면서」 같은 시였습니다. ‘서라벌 천 년 배 떠난 나루……’ 내가 1953년 대구에 갔는데, 그때 박목월이 대구문협 지부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광목에 물들인 옷을 입고, 그나마 철사에 걸려 찢어진 곳을 꿰매 입고 있었는데, 박목월이 2층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런데 내 모습을 보더니 ‘황형, 이게 무슨 꼴입니까’ 하면서 막 울어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박목월의 추천사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황금찬 씨, 이는 청록파가 목표로 했던 지점에서 출발한 시인이다.’ 그 말이 다 퍼졌어요.”

▶ 당시는 추천을 3회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1954년에 박두진 씨가 《문예》에 추천을 또 했습니다. 3회 추천을 완료하려면 1955년까지 기다려야 했지요. 그런데 이듬해 편집장의 전화가 왔습니다. 폐간됐어요, 하고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돼버렸지요. 그러다가 1955년에 《현대문학》이 나왔습니다. 조연현 씨가 또 하라고 하더군요. 박목월, 박두진 씨도 참여하고 있었지요. 천료가 된 것이 38세가 되던 1956년이었습니다. 등단과 관련해서 1949년에도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 해에 《시문학》이 나왔습니다. 1년에 한 번 나오는 연간 잡지입니다. 박목월, 조지훈 두 분이 냈지요. 그분들은 추천제 대신 가족제로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제게도 기별을 했습니다. 그때는 《문예》에 들어가기 전이지요. 창간호가 1949년이었으니까 제2호는 1950년에 간행됐지요. 피난 중 대구에서 박목월을 뵈었는데 《시문학》을 봤느냐 하기에 못 봤다고 했어요. 곧 잡지를 가져와 내 시가 있는가 찾아봤더니 박목월은 내 작품을 실은 것으로 밝혔는데 작품은 실려 있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편집자 조지훈에게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몇 날 후 조지훈에게 물었더니 지훈은 우선 술 한 잔 마시고, 그리고 거푸 몇 잔을 마시고 말했어요. ‘내가 술을 마시고 그 시고를 잃어버렸어요. 주소를 알아야 연락을 하지…… 그래서 그렇게 되었어요.’하는 것입니다. 《시문학》은 2호까지 나오고 폐간됐습니다.”

▶ 지금도 등단과 관련해서 하실 말씀이 많겠습니다.
“그래요. 릴케도 이탈리아 문학 청년이 시를 써서 보내면 그것을 다 읽어보고 정성껏 고쳐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것이 책으로도 나왔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발 거만하지 맙시다. 문학 청년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하는 것입니다.”
 
▶ 작년 봄에 36번째 시집 『고향의 소나무』(시학)를 내셨습니다. 우리나라 시인들 중에 가장 많은 시집을 내고 계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시집 제목을 다 외우기도 쉽지 않겠습니다.
“다 기억 못해요. 금년에 또 하나를 내려고 합니다. 자꾸 고향 생각이 나요. 올해 초, 정월 4일에 아들이 죽었어요. 그렇게 슬퍼요. 아들과 함께 시집 낸 것도 있어요. 제주대학에 내 아들과 동갑으로 동인지 내는 문인이 있는데, 내 37번째 시집을 내겠다고 해요. 제목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흰구름』입니다.”

▶ 참 안됐습니다. 가족 중에 먼저 떠난 분이 또 있지요.
“내가 아들 셋에 딸 둘을 두었는데, 딸 하나도 1975년에 죽었지요. 그때 나온 작품이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란 시입니다. 나중에 영화로도 만들어졌지요. 24일만 더 있으면 이화여대를 졸업할 때였는데 그만…… 그리고 아내는 1981년에 죽었고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서 고 정주영 회장과 함께(1989년)
시는 마음을 움직이는 ‘절대어’를 써야
▶ 시집을 계속 내다보면 지루하다거나 싫증이 나지는 않습니까.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 말입니다.
“나는 노동만 했습니다. 일본에서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고학하는 학생들을 위해 오후 4시에 끝나는 직장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분뇨를 푸는 일도 했습니다. 당시 유학생 중 집에서 돈 대주는 학생은 20%도 안 됐을 겁니다.”

▶ 해방된 직후 강릉농고 교사를 하셨고, 6·25 이후에 서울로 올라와 1978년까지 동성고 교사를 하신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때 물론 국어를 가르치셨겠습니다.
“강릉농고에 있다가 나중에 강릉사범으로 옮겼습니다. 서울에 와서 다른 직장에 1년쯤 있다가 동성고에서 20년을 재직했습니다. 나중에 용인에 있는 강남대학으로 갔습니다.”

▶ 1951년에 시동인 <청포도>를 결성하신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동인들은 누구였습니까.
“최인희라고 《문예》에 당선됐던 학교 선생, 나, 그리고 제자들 중 세 사람인 김유진, 이인수, 함혜련 등과 함께 했지요. 졸업반 제자들과 동인을 했던 것은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

▶ 한 신문과 인터뷰하신 내용을 보니까 ‘생명이 있는 절대어’를 사용해야 지금의 위기를 이길 수 있다고 하셨던데요. 안 된다, 는 부정어를 버리고, 예수가 지금 병이 나아라, 하고 말씀하셨을 때 ‘에바다’라고 했던 것을 예로 드셨습니다. 말의 힘이 그렇게 강력합니까.
“내가 절대어란 말을 만들었어요. 예수가 위대한 시인입니다. 그분이 살았던 2000년 전에는 인류가 쓰던 말이 많지 않았습니다. 반벙어리들이 모여 있는데, 불쌍하잖아요. 그래서 예수가 병을 고쳐주려고 당시에 없던 ‘에바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가 만든 말입니다. 당시 유대에 없던 말인데, 병이 나아라, 하는 말입니다. 시인의 말이 그래야 합니다. 절대어를 써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모방만 하려고 합니다. 절대어가 아니면 유사어라도 써야 합니다.”

▶ 절대어를 썼던 예가 있습니까.
“가령 유치환이 「깃발」에 대해 ‘소리없는 아우성’이라고 하면 그게 절대어인 것입니다. 지훈이 「완화삼」에서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라고 했을 때 차운 산이 절대어가 됩니다. 박목월의 ‘청노루 맑은 눈에’는 또 어떻고요. 개념이 새로 생긴 것입니다. 노루가 모두 노란 색이지 퍼런 색은 없었잖습니까. 우리가 절대어를 많이 쓰게 될 때 이것이 한국시다 하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시를 계속 쓴다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요즘 보면 나이를 먹으면 다들 그만 써요. 아직도 나만 쓰고 있어요. 생각할 게 뭐 있나, 그냥 먹다 죽지 하는데, 다들 귀찮으니까 안 쓰지요. 그렇지만 나는 씁니다. 대신 일체 감투를 안 써요. 그럴 시간이 없어요. 그런 쪽으로 취미도 없고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만 위대한 말인 것은 아닙니다. 가장 작은 말에도 우수는 담길 수 있습니다. 나는 ‘꽃은 다 가을 악기다’라고 하고, ‘코스모스는 고향으로 가자는 소곡을 연주하고 있다’고 말해요.” 

▶ 시인으로서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을 것 같은 위기는 없었습니까.
“못 쓰겠다 한 적은 없어요. 내가 공부를 못해서 그렇구나, 이 관점을 이길 수도 있겠는데 그것을 내가 모르는구나 한 적은 있어요. 다음에 태어나도 나는 시인이 될 팔자입니다. 아니 팔자보다 더한 것이지요. 아무리 고생을 해도 이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입니다.”

▶ 시인들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이리저리 파벌을 형성하고, 서로 이데올로기로 진영을 갖춰 싸울 때 황금찬 시인은 어떤 입장이셨습니까.
“내게 좌익은, 공산당은 일제보다 더 무서워요.
 
지하철역 시낭송 행사에 참석한 시인들. 왼쪽부터 김남조, 민영, 홍윤숙, 황금찬, 조병화 시인.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에서 노벨상 후보로 천거
▶ 연전에 시인 이길원 씨가 위원장으로 있는 한국펜이 황금찬 시인을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노벨상에 대한 기대를 갖고 계신지요.
“처음 듣습니다.”

▶ 산문집도 무려 24권이나 내셨습니다. 시집을 낼 때와 산문집을 낼 때는 어떻게 계획을 세우십니까. 시집 한 번, 다음엔 산문집 한 번, 이런 식으로 번갈아 내십니까. 아니면 책을 낼만한 분량이 되면 그냥 내십니까.
“되는 대로 냅니다. 산문집은 대개 연재하던 것을 묶어서 냅니다.”

▶ 지난해 선생님께서는 헝가리, 체코 등 유럽 6개국을 여행했는데 그 때의 경험 속에 먼저 간 시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도 있습니다. “다뉴브 강가에 섰다 / 그날같이 / 구름은 낮게 떠 있고 / 물새들은 구름 위를 날고 있다 / (중략) / 그중에서 문을 닫은 시인도 있습니다 / 조병화 시인 / 박태진 / 유경환 김영태 / 여러분이 가셨습니다 / 뵈었으면 기뻤을걸 / 시인들은 단명한답니다”(「다뉴브 강」 중) 같은 대목인데요. 그분들과 특별한 추억이 있으신지요.
“먼저 떠난 시인 중에 잊을 수 없는 이는 이성선이에요. 내가 대학 때부터 가르쳤지요. 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나이의 최고의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한번은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달이 나뭇잎에 내려와 앉았다./나뭇잎까지 먹었던 벌레는/ 실수로 달까지 먹었다’ 하고 쓴 거예요. 그래서 내가 ‘달과 나뭇잎은 하나인데, 그 둘은 하나인데 어떻게 따로 먹을 수 있냐’고 뭐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이가 잠을 못 자서 죽었다고 해요.”

▶ 문단 후배들이나 평론가들에게 고마웠을 때는 언제고, 섭섭했을 때는 언제입니까.
“나는 박목월을 잊을 수 없습니다. 첫시집을 낼 때 서문을 써달라 하니, 에이 뭐 그럴 것은 없고 그냥 뒤에다 붙이라고 했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눈 하나 찾았네. 선하고 어진 눈이었어.’ 분에 넘치는 말이었지요. 내 마음을 얼마나 울렸는지 몰라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 섭섭한 것도 물론 있습니다만, 그렇지만 사람한테 그런 말을 남기는 것은 좀 그렇지요.”

▶ 요즘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운동도 자주 하십니까.
“겁내지 않고 삽니다. 죽으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육체 기구를 움직여 봅니다. 움직이는 운동을 한 30분쯤 합니다. 손가락 운동도 하고요. 누워서 발을 들어서 등 뒤로 땅에 붙입니다. 지금 하나 원하는 것은 잊어버리는 병에만 걸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가 시도 꽤 외우거든요.”

▶ 지금까지 연애는 몇 번쯤 해보셨습니까.
“몇 번 못했어요. 물론 여성은 꽤 있었습니다. 지금 세대들처럼 같이 사는 것은 아니라도 몇 번은 있었겠지요. 문인도 있었고, 문인 아닌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그런데 단언컨대 남자나 여자나 죽기 전까지는 이성에 대해 눈을 뜨고 있다는 점입니다.”
황금찬 시인은 가끔 TV도 본다. 주로 열린음악회 팬이다. 현재는 둘째아들 황도정 씨(62)와 함께 살고 있다. 강원도 횡성에서 한우목장을 한다. 황금찬 시인은 “난시에 근시로 눈이 아주 나쁘다”면서 알 굵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황금찬’은 그의 큰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당신의 이름에 대해서 조금은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황 시인은 죽을 맛있게 드셨고, 새우튀김을 몇 개나 잘 드셨다. 이제 그만 갑시다, 하고 일어서는 무릎에는 아직도 힘이 정정했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상청도 때로는 일기예보를 귀신처럼 맞추는 능력이 있음을 과시했다. 김요일 시인이 택시를 불렀다. 가까운 곳에서 화재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집이 불에 탔던 냄새가 매캐하게 코를 찔렀다.
 
김광일   서울대 불어교육과 졸업.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 논설위원, 문화부장 역임. 현재 편집부 부국장. 저서 『우리가 만난 작가들』 『책을 읽은 다음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간지럽고 싶다, 한없이』 『시보다 매혹적인 시인들』이 있음.

본 기사는 계간 시인세계에 실렸던 내용임을 알려드립니다.
문화저널21 & 계간 시인세계  munhak@mhj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