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김경성
욕실 벽을 오르내리는 도마뱀의 행방을 쫓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샤워기 옆에서 물길을 읽고
어떤 날에는 구석에 엎드려서 곰곰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마음의 부리가 예민해진 날에는 쏜살같이 어딘가에 숨어 버린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물소리가 밀림 속 몬스테라 잎을 두드리면
어딘가에 숨어 있던 도마뱀이
맑은 눈으로 야생의 시간을 풀어놓는다
원시의 시간으로 돌아가
샤워기 아래 서서 교감할 때
나는 차마 비누거품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저 쏟아지는 물줄기만으로 하루 동안 걸었던 길을 지운다
어느 늦은 밤 천둥번개를 몰고 온 스콜은 무섭게 창문을 흔들었고
새벽녘 밀림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흰색 타일 속 그림이 되어버린 도마뱀
그렇게 소리도 없이 뒷모습만 보여주며
고요 속으로 침잠해버린 도마뱀 한 마리
한 달 동안 교감했던 야생의 시간이 압착되었다
도마뱀이 잠든 곳은 이제 더는 밀림이 아니어서
몬스테라 잎마저 그림자를 지우고
거품이 잘 이는 비누로
비구름을 만들어서
타일 속으로 들어간 도마뱀의 등에 무지개를 걸어주었다
<시산맥> 2018년 겨울호.
------------------------------------------------
김경성 : 2011년 <미네르바>로 등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자격증 / 김상배 (0) | 2019.01.19 |
---|---|
[스크랩] 경찰서 / 임승유 (0) | 2019.01.19 |
[스크랩] 포도알 / 안소랑 (0) | 2019.01.19 |
[스크랩] 초원에서 문신을 새기다 / 박남준 (0) | 2019.01.19 |
[스크랩] 엉거주춤 / 정수자<시조> (0) | 2019.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