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알
안소랑
제비꽃 속에서 얼굴 하나를 꺼낸다
잘 빚어졌구나, 무지개의 무표정과 안개의 또렷한 눈빛으로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아이야
착각을 가르치는 바보들과
온종일 봄꽃들이 내뱉는 과격한 기침소리가 이곳에는 가득하다
마지막 변명처럼 포도알이 익어가는 계절
화끈거리는 콧잔등 위로 또르르
추락하는 이름들,
투명해지는 비명과 광기 어린 화분들
마비된 밤과 하늘 사이에서 떨고 있는 조약돌을 마주한다면
두려워하지 마, 밤하늘을 꿰어 만든 이불과 반짝이는 무덤 속으로 모든 고개들을 초대해
너무 많은 밤들을 마셔버린 나의 배꼽과
흐릿한 구름들이 잔뜩 낀 너의 태명이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애타게 소리치지 않아도 서로의 실패를 알아챌 수 있겠지
너에게는 피가 흐르고 있구나, 나에게는 없는 것
비틀거리는 몸짓과 서툰 의욕들이 가득하구나
제비꽃 빻고 태어난 너의 가슴팍에
커다란 흉터처럼 자라난 포도알 하나
짓누르는 대신 오래오래 입을 맞춰야지
여백 위로 떨어진 한 방울의 아찔한 물감처럼
보랏빛,
의도된 실수처럼 짙게 번져가는 우리의 생
너의 소속은 저 타들어 가는 계절의 한복판
곧 폭우가 내릴 거야, 싱그러운 우연들이 우리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으니까
네가 나를 돌봐줄 때까지
휘몰아치는 보랏빛
<현대시학> 11 · 12월호 신인상 당선작.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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