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앨범 7
김상미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고 싶다
그 시를 읽으면 모두가 죽어버리는 시를 쓰고 싶다
아니다, 모두가 다 읽는 시를 쓰고 싶다
그 시를 읽으면 죽어가던 것들도 생생히 살아나는 시를 쓰고 싶다
꿈 같은 일이다
아무리 좋은 시에 앙심을 품고 , 주먹을 쥐고, 간절히 갈구하며 훔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고 발을 동동 굴려도
나는 내가 쓰고 싶었던 그런 시를 쓰지 못하고
이 시도 저 시도 다 쓰레기 같아
활활 타오르는 시어들의 모닥불 속에 모두 던져 버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제대로 입히고 둘러줄 게 시밖에 없어
뜬구름 잡듯 또다시 펜을 집어 든다
이 우주에 시 아닌 것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절망에 눈이 먼 채로 큰소리치며 인습을 뛰어넘듯 용감하게
있는대로 생식기를 발기시키면서
허기지고 굶주린 시 속으로
미치고 미친 시 속으로
미치고 미쳐 꺼꾸러질 때까지
꺼꾸러져 희디힌 뼛가루가 되어
폭풍 속의 꽃가루처럼
훨훨 한 편의 시로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현대시학> 2018년 9 · 10월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초원에서 문신을 새기다 / 박남준 (0) | 2019.01.19 |
---|---|
[스크랩] 엉거주춤 / 정수자<시조> (0) | 2019.01.19 |
[스크랩] 첫줄 / 길상호 (0) | 2019.01.19 |
[스크랩] 꽃의 서사 / 박기섭<시조> (0) | 2019.01.19 |
[스크랩] 우리 동네 황후 이야기 / 고재종 (0) | 2019.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