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황후 이야기
고재종
우리 동네 이장부인은요, 몇 십 년 시집살이 끝에 딱 한번 일을 치고 말았는데요. 치매에 걸려 혼자 사는 친정아버지를 집에 모셔왔다가 시어머니에게 된통 당했다지요. 그런데도 역성 한번 들어주지 않고 침묵하는 남편의 낯짝이 순간 철판처럼 여겨졌다네요. 온갖 정내미가 다 떨어진 그날로 집을 나가버렸는데요. 딸네 아들네 사방 대소가들 다 찾아보아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요. 이장 혼자 비닐하우스 짓는데 저쪽 끝에서 아내가 잡아주던 비닐을 혼자 씌우자니 바람에 날리고 날리길 수차례, 끓어오르는 부아에 쐬주병을 나발 불었겠지요. 아무렴 혼자 농사 못짓지요. 그러던 차 서울의 먼 친척한테서 아내 소식이 날아왔다네요. 그 길로 트럭을 몰고 서울의 한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는 아내를 데리러 갔는데 이거야 원, 머리채를 다 뽑아 버린다 해도 따라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코만 빠지고 집에 돌아와 누워 버렸네요. 쯧쯧 혀를 찬 동네 사람들 스물일곱 가호가 관광차를 불러 타고 올라가선, 그중 대표어른 한 분이 무릎 꿀고 빌어서 겨우겨우 이장부인을 모셔왔더랍니다. 아무렴 황후처럼 모셔왔지요. 그 후로 우리 동네에선 부부 사이의 침묵은 금이 아니라 금가는 소리라고 한다네요.
<모든 시 : 2018년 여름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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