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외 2편)
김민정
지지난 겨울 경북 울진에서 돌을 주웠다
닭장 속에서 달걀을 꺼내듯
너는 조심스럽게 돌을 집어들었다
속살을 발리고 난 대게 다리 두 개가
V자 안테나처럼 돌의 양옆 모래 속에 꽂혀 있었다
눈사람의 몸통 같은 돌이었다
야호 하고 만세를 부르는 돌이었다
물을 채운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담그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냈는가 하면
물을 버린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놔두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내기도 했다
먹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밤이었다가 낮이었다가
사과 쪼개듯 시간을 반토막 낼 줄 아는
유일한 칼날이 실은 돌이었다
필요할 땐 주먹처럼 쥐라던 돌이었다
네게 던져진 적은 없으나
네게 물려본 적은 있는 돌이었다
제모로 면도가 불필요해진 턱주가리처럼
밋밋한 남성성을 오래 쓰다듬게 해서
물이 나오게도 하는 돌이었다
한창때의 우리들이라면
없을 수 없는 물이잖아, 안 그래?
물은 죽은 사람이 하고 있는 얼굴을 몰라서
해도 해도 영 개운해질 수가 없는 게 세수라며
돌 위에 세숫비누를 올려둔 건 너였다
김을 담은 플라스틱 밀폐용기 뚜껑 위에
김이 나갈까 돌을 얹어둔 건 나였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봄나물 다량 입하라기에
있을 때 사둔다
무침으로도 버무리고 국으로도 끓이고
죽으로도 불린다
봄이 가면 냉이는 잡초 따위라지 않는가
봄처녀도 아니면서
나물 이름 보고 나물 이름 따라 읽는
한글 떼는 중에 아이도 아니면서
애나 개나 생기면 아꼈다 불러야지
지천으로 나물 향이나 퍼뜨릴 욕심으로
냉이는 왜 냉일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부르면 명찰이지
냉이야 쑥아 달래야 두릅아
개중 씀바귀는 씀바귀야 씀박아
호명으론 좀 쌉싸래해서 별로다 싶고
손맛보다는 이름맛이 나물맛이라
국산 냉이 두 움큼 크게 집어
달아주십사 하니 2,960원
산에 가 뜯어봐야 알까나
장에 가 팔아봐야 알까나
싼 건지 비싼 건지 도통 가늠이 안 되는
냉이더미를 놓고 나물값을 매기는
플러스마트 나물 코너 아저씨가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 적에
냉이는 그냥 냉이네요
한자로는 제채라 부른다는데
보니까 겨잣과에 속한 두해살이풀이래요
겨자는 노랭인데 냉이 어디가 노란가
5월에서 6월에 흰 꽃이 핀다는데
아무리 봐도 그건 나도 모르겠네요
계산대 뒤로 줄 선 나를 끝끝내 찾아와
휴대폰 속 두산백과에 뜬 냉이를
굳이 보여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러한 아저씨의 친절이
내일의 시나 될까 싶었는데
저기 저참으로 간 아저씨의
손으로 코 푸는 소리 들린다
춘분 하면 춘수
머리가 희게 센 할머니가
매실차 세 잔을 탁자에 놓고 갔다
사모님은 아니라고 했다
잔의 크기며 모양새가 제각각이었는데
서두르는 이가 없어
가장 큰 잔을 내가 들었다
뜨시지도 차지도 않았다
선생은 거실 창을 한참이나 쳐다보시었다
일행으로 동행한 사진작가나 나나
셋이 다가 초면이었던 만큼
선생을 따라 한 방향을 바라보는 일이
그럭저럭 예의 같아 그리하였다
넓적한 갈색 뿔테 안경 너머 깡마른 선생은
손잡이 없는 작은 표주박과 닮아 있었다
작고 오목한 것이
애초에 물을 퍼낼 용도가 아니라
전주한지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던
철제 금속으로 형을 뜬 장식용 박 같았다
—아내가 아프오
물 쟁반을 든 할머니가 안방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직사각형으로 드러누운 푹 꺼진 보료를 보았다
흙만이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는 건 아니구나*
이불과 베개도 네모라서 네모라고 메모하는 참인데
—어쩌면 좋소
아내가 할 줄 아니 나는 평생
은행 한 번을 안 갔겠지 않소
이제 그만 나는 큰일이 났소
나는 들고 간 민음사판 『김춘수 시전집』에서
선생의 시 「은종이」에 끼워뒀던
은색 껌종이를 꺼내어 접었다 폈다.
사지 달린 은색 거북이 한 마리
댁네 탁자에 놓아두고 왔다
훗날 선생은 1999년 4월 5일 새벽 5시경이라
아내의 임종을 기억해내시었다
우리가 처음 본 게 언제였더라?
오랜만에 만난 사진작가와 술잔을 기울이다
1999년 이른 봄쯤이라는 계산을 마치는 데는
선생의 아내 사랑이 컸다
————
* 송찬호 시인의 시집 제목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에서.
—시집『아름답고 쓸모없기를』(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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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 1976년 인천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대학원 수료.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산문집 『각설하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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